풍월의 쉼터/MBC사우회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 탈북자 北送 반대로 전세계에 北인권 알린 '가녀린 거인'

풍월 사선암 2015. 1. 6. 23:19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탈북자 北送 반대로 전세계에 인권 알린 '가녀린 거인'

 

'역사의 조난자(탈북자·국군포로·납북자·위안부)'에 구명조끼 던지는 작은 산타

 

정권엔 '눈엣가시'라네요

156에 처녀땐 30학창시절 개근상 한번 못타 / 80년대초 열혈 기자 명성의원 된 후 '탈북자 代母'

 

물망초, 그들을 잊지 말아요

탈북자·국군포로·납북자우리 근현대의 희생자들 / 이 분들의 눈물 닦아줘야 한국의 미래가 있지 않겠나

 

"탈북 청소년들 잘 가르쳐서한국의 메르켈(東獨 출신 독일 총리)로 키워내고 싶어요"

 

탈북자 '4등 시민'이라 자조

사회 밑바닥으로 내몰려오는 탈북자 확 줄었죠 / '탈북이 인생 대박'이란 말에 들어가야 통일 이뤄져

 

북송반대 斷食, 인생 변곡점

딸 끌려갔다고 SOS 치는데 구해줄 힘도 능력도 없더라 / 그들만큼 마음 아프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결심했죠

 

정치인 박선영, 이젠 없다

국회의원, 구름처럼 떠 있어땅에 발 닿지 않는 존재들 / 안되면 절대 안 움직여'풀뿌리 운동'이 내 갈 길 

 

지난 21일 경기도 여주에 있는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물망초학교'에선 송년(送年) 행사가 한창이었다. 외국인과 국내 자원봉사자 10여명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고 풍선 놀이, 얼굴에 그림 그리기 등도 이어졌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박선영 물망초이사장은 201218대 국회의원 임기를 끝낸 뒤 탈북자·국군포로 등을 돕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지난 21일 경기도 여주에 있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물망초학교 송년 행사에서 만난 그는 국회의원 옷을 벗으니 족쇄를 푼 것처럼 홀가분하다. 이제부터 제대로 일을 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 이태경 기자

 

한쪽에서 잠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도 몸놀림이 빨라졌다. 행사장 가운데에 음식을 차리고 따뜻한 국을 그릇에 퍼담았다. 156에 비쩍 마른 몸, 빨간색 스웨터에 빨간 목도리를 감고 있는 모습은 작은 산타 같았다.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3년 전 서울 종로구 중국 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에 반대한다'11일간 단식투쟁을 벌였을 때의 비장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탈북자 북송 반대 운동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물망초를 만들었고 3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다""탈북자 이외에 국군포로와 전시·전후 납북자,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동국대 법대 교수를 하다 18대 국회의원(자유선진당)이 됐다. 2012년 초 탈북자 북송 반대를 위한 단식 투쟁을 벌여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난 22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 인권 상황을 정식 안건으로 채택하도록 씨앗을 뿌린 일등 공신이다. 북한 정권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그런 그가 최근 다시 북한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달 초 라오스에서 북송된 탈북 청소년 9명이 처형됐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극렬하게 반발했다. 북한은 그에게 '극악한 호전 분자' '반통일 광녀(狂女)'라며 욕설과 비방을 퍼부었다.

 

斷食, "내 마음도 아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박선영 이사장을 얘기할 때 2012년 단식투쟁을 빼놓을 수 없다. 그에겐 인생의 변곡점이기도 했다. 그는 "단식은 그날 아침에 결정했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정치인들이 종종 단식이란 방식을 통해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린다. 그때 왜 단식을 결심했나.

 

"(한숨을 쉬며)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나. 초선 국회의원, 그것도 교섭단체도 없는 작은 정당(자유선진당)의 비례대표였다. 그런데 국회에서 탈북자와 관련해 한두마디 한 걸 듣고 탈북자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어느 날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새벽에 전화해 '엄마가 잡혀갔어요, 살려주세요' '내 딸이 끌려갔어요, 어떡해요' 울부짖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진 않았나.

 

"외교부에 전화하면 '가만있으라, 시끄럽게 하면 다 죽는다'고 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통일부는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진 자기네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난 무력했다. 이 사람들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SOS를 치는데 난 구해줄 힘도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단식을 했다. '나도 당신들만큼 마음이 아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단식엔 고비가 온다. 언제가 가장 힘들던가.

 

"이튿날. 못 일어나겠더라.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하늘이 빙빙 돌고 귀에선 '' 소리가 들렸다. 누가 그러더라. '겨우 이틀째인데 벌써 이러면 어떡해'라고. 쇼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말 창피했다. 남들은 30일도 하고 40일도 한다는데. 그날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이 찾아와서 날 보더니 '소금은 드세요?' 물었다.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김 의원이 준 죽염을 입에 넣는 순간 시들었던 식물이 파릇파릇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원래 그렇게 몸이 약했나.

 

"3 때까지 12년 동안 개근상을 타본 적이 없다. 허구한 날 토하고 밥을 잘 못 먹었다. 어머니는 찬 바람 분다고, 비 온다고, 열난다고 툭하면 학교에 안 보냈다. 세 살 어린 동생보다 키가 컸던 기억이 한순간도 없다. 어릴 때 꿈은 '나도 커서 대학에 가봤으면' 하는 거였다. 그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혼 시절 몸무게가 30대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 한참을 울었다."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은 통일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탈북자들이 내 인생의 대박은 바로 탈북해 남한으로 온 것이라고 말할 때 진짜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1일 경기도 여주 물망초학교 송년 행사에서 점심시간이 되자 밥과 국을 퍼주고 있는 박 이사장의 모습. / 이태경 기자

 

역사의 조난자들에게 구명조끼를 던진다

 

박 이사장은 주말이면 장을 봐서 여주에 간다. 물망초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는 탈북 청소년들의 일요일 점심식사를 챙겨주기 위해서다. 월요일 오전엔 물망초 전체 사업 진행을 체크하고 조율하는 회의를 주재하고 주중엔 동국대 법대 교수로 일한다.

 

법인 이름을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꽃말의 '물망초'라고 지었다.

 

"탈북자 북송 반대 운동을 하면서 국민이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런 마음을 계속 이어갈 그릇이 필요했다. 아직도 눈물 흘리는 분들에게 구명조끼라도 던져주자, 그러려면 그들이 존재하는 걸 잊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들은 역사의 조난자들이다."

 

역사의 조난자, 무슨 뜻인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나라가 힘이 없어 망하고, 전쟁 과정에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굴러 떨어진 분들이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조난당한 것이다. 탈북자는 물론이고, 징용에 끌려가고 위안부로 끌려갔던 분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다. 학교 다니다 참전했고 포로가 됐는데 60년 넘게 나라가 구해주지 못했다. 전쟁통에 납북된 민간인만 12만명이다. 이분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가 해야 하는 일 아닌가. 개인이 나선다고 될 일인가.

 

"국회의원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건 정부는 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떠들었는데 안 되더라. 어느 순간 ', 이게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 나서야 하는 거구나' 생각하게 됐다. 4년 동안 국회에 있으면서 깨달은 건 실제로 일이 되도록 하는 데는 '풀뿌리 운동'이 더욱 강력하고 효과적이란 사실이었다."

 

국회의원처럼 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은 하늘에 구름처럼 떠 있어 땅에 발이 닿지 않는 존재들이다. 선거 때 표가 안 되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탈북자 3만명은 정치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

 

단식 이후 지난 약 3년을 돌이켜보면 무엇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탈북자와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움직임에 가속이 붙었다. 우선 강제 북송이 줄었다. 북송 소식이 별로 없지 않나. 외형적으로 엄청난 성과다. 중국도 국제 규범을 중시해 북송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더 중요한 건 유엔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가 북한 인권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물망초는 어떤 역할을 하려는 것인가.

 

"탈북자를 통해 통일을 준비하는 일이다. 탈북자들은 우리에게 미리 온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통일을 준비하는 교과서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통일 후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구체적인 통일 준비는 어떻게 하나.

 

"동독 출신 메르켈이 훗날 통일 독일의 총리가 됐다. 탈북 청소년들을 잘 키워 한국의 메르켈을 배출하고 싶다. 탈북 청소년을 일 년에 한 명씩 뽑아 미국에 유학을 보내고 있다. 독일 통일이 안착할 수 있었던 건 대통령과 총리가 동독 출신이기 때문이다. 머리 좋은 탈북 청소년이 꽤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많은 사또를 배출한 곳은 전라도, 경상도도 아니고 평안북도 정주였다."

 

물망초 활동을 하는 데 어려운 점은.

 

"탈북자를 돕자고 하면 꺼리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도와주자면 지갑을 여는데 탈북자 돕자면 고개를 돌린다."

 

우린 북한과 탈북자를 너무 모른다

 

그의 이름은 원래 박운희였다. 박선영이란 이름을 갖게 된 건 1995. 어렸을 때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 박운희를 '바구니'로 바꿔 '꽃바구니' '감자바구니' 하는 식이었다. 결혼 후 어느 날 남편과 상의해 이름을 '베풀 선(), 비출 영()'으로 바꿨다.

 

박 이사장은 1980년대 한국 언론계에 여기자가 별로 없던 시절 꽤 유명한 방송기자였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보건사회부를 출입했는데, '땡전뉴스'에서 대통령 소식에 이은 두 번째 뉴스는 거의 그의 차지였다. 당시 방송사 메인 뉴스는 오후 9시를 알리는 '' 하는 시보(時報)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께서는"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해서 땡전뉴스라고 했다. 건강보험 대상 확대, 국민연금 도입과 생수 판매 허용 논란 등 그가 맡은 분야에서 대형 뉴스가 계속 터졌다. 뉴스마다 그가 등장하니 북한 고위층에서도 그의 이름을 알았다고 한다.

 

기자 생활을 10여년 한 뒤 그는 언론계를 떠나 법 공부를 시작했다. 나이 서른셋, 두 아이의 엄마였다.

 

인정받는 기자였는데 왜 법 공부로 진로를 바꾸게 됐나.

 

"5공 직전 계엄령 시절, 기사 원고를 들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시청 본관 2층에 가면 군인들이 검열을 했다. 중위나 대위가 빨간 펜으로 북북 지워버렸고 왜 그러느냐고 해도 대꾸도 안 했다. 돌아오면서 하염없이 울곤 했다. 입사 동기들은 언론 통폐합 때 다 쫓겨났다. 국가란 무엇인가 회의가 많이 들었다.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일본군위안부와 사할린 한인, 731부대 등이 눈에 들어오더라."

 

탈북자도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관심을 갖게 됐나.

 

"북한은 나라가 사람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곳이다. 하지만 북한은 이제 수명이 다한 엔진이다. 문제는 우리가 북한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북한의 어떤 면을 모른다는 건가.

 

"북한은 돈이 다스리는 곳이 됐다. 돈이 사람을 살리고 죽인다.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건 골수분자 20만명에 불과하다. 혜산에서 난 감자를 청진에 갖다 팔면 6배가 남는다. 옛 보부상 같은 사람들이 북한 전역 장마당을 돌아다닌다. 배급은 종말을 고했다. 장마당이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공교육도 다 무너졌다."

 

교육은 어느 정도로 무너졌나.

 

"평양·개성·신의주 등 6개 주요 도시와 지방 도시의 대표적인 학교 한두 곳을 빼곤 다 붕괴했다. 교사도 없고 학생도 없다. 교사에겐 월급도 제대로 안 준다. 학생들은 교과서 한 권으로 세 명이 공부한다. 무엇보다 먹고살기 바쁘다. 장마당 가서 장사하고 먹을 거 찾아다녀야 하는데 언제 학교에 가겠나."

 

북한 엘리트 교육도 그렇게 망가졌나.

 

"그렇진 않다. 김일성대학 나오고 외교관 하다 온 사람들은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다. 일반 탈북자들은 다르다. 국내 대학에 넣어줘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국어도 안 되고 영어도 안 된다. 서로 똑같은 한글을 쓰는데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대학에 진학해도 60%가 중도 탈락한다."

 

그렇게 교육받지 못하고 방치됐던 사람이 남한에 오면 적응하기 어렵겠다.

 

"탈북자들은 스스로를 한국 내 4등 시민이라고 한다. 남한 사람, 조선족, 외국인 노동자·며느리 그다음이란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다. 탈북자들의 자살률은 우리 평균의 6배다. 서독에선 동독을 탈출한 사람들의 취업률이 90%를 넘었다. 우린 탈북자의 90% 이상이 비정규직 또는 실업자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극빈층으로 내몰리고 있다. 최근 남한으로 오는 탈북자들이 줄어든 것도 이 때문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국내 입국 탈북자는 20112706명에서 20121502, 20131514명으로 큰 폭으로 줄었다. 올해는 10월 말 현재 1131명에 그쳤다.

 

먼저 온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지 말라고 하기 때문인가.

 

"탈북자들이 북한 가족과 친지에게 나오지 말라고 한다. 여기선 피눈물난다고. 자기가 개처럼 돈 벌어 보내줄 테니 장마당 잘해서 집 사고 땅 사라고. 통일되면 만날 수 있으니 나오다 죽지 말고 거기 남아 있으라고 울면서 전화한다. 나중에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주민들이 투표로 미래를 선택하게 된다면, 과연 그들이 남한과 합치겠다고 할까. 그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통일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하지만 그건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이뤄진다. 그걸 좌우하는 게 탈북자들의 민심이다. '탈북이 내 인생의 대박'이란 말이 북한으로 흘러들어 가야 통일이 되지 않겠나."

 

남북 간 교류가 차단된 현실이 답답하겠다.

 

"남북 간 정부 대화는 단절됐지만 탈북자를 통한 물밑 교류는 엄청나게 이뤄지고 있다. 올해 초 한 탈북 학생의 어머니가 다쳤다. 당일 휴대전화로 연락이 와서 300만원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보내줬다. 브로커 비용 35% 빼고 나머지 돈으로 중국 의사를 불러다 수술받아서 지금은 완쾌됐다. 작년에 우리 학교는 북한 채소 '영채'로 김치를 담갔다. 돈과 물건이 왔다 갔다 하는 건 쉽다."

 

탈북자 문제 외에도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분야는.

 

"누구보다 국군 포로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가장 아프다. 북한에 있는 국군 포로를 만나는 것이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다. 북한엔 생존자가 350명 정도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분들이 언제까지 살아계실까. 너무 늦게 실현되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안타까운 일도 많을 것 같다.

 

"일년에 두 번 국군 포로 위문 행사를 한다. 올해 6월과 11월에 했는데 그사이 네분이 돌아가셨다. 우리 품에 돌아온 국군 포로 81명 중 살아계신 분이 35명에 불과하다. , 폐지 등을 주워 생활하는 분들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대가가 이것인가 하고."

 

정치인, "크게 욕을 두 번 먹었다"

 

그가 한창 단식 투쟁 중이던 20122월 자유선진당 당직자들이 찾아왔다. 서울 2곳과 충청, 강원 지역 여론조사를 해보니 당선 가능성이 높게 나왔다며 지역구 출마를 권유했지만 거절했다. 그는 "정치 시작할 때 딱 4년만 하고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건 나 자신과 학생에 대한 약속이었다"고 했다.

 

그는 정치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만둘 때도 엄청나게 욕을 먹어야 했다.

 

정치 시작할 때 욕을 먹었다는 게 무슨 말인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면서 당을 위해 왜 돈 한 푼 안 내느냐는 거였다. 면전에서 쌍욕을 해 댄 사람도 있었다. 대변인 열심히 하면서 그런 욕이 잦아들었다."

 

왜 갑자기 정치에 뛰어들었나.

 

"정말로 어느 날 갑자기였다. 그전에도 입당 제의는 많았지만 다 거절했었다. 그런데 문득 현실도 제대로 모르면서 헌법과 입법 과정을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4년만 실습하고 오자'고 생각했다. 공천 신청 마감 이틀 전에 자유선진당에 입당했다."

 

정치를 그만둘 때는 왜 욕을 먹었나.

 

"지역구 한 석이 절실할 때였다. 나가면 당선될 텐데 왜 안 나가느냐는 거였다. 혼자 고고한 척, 잘난 척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국회의원 4년 하고 나서 정치인이 아니라니.

 

"비례의원은 정치인이라기보다 전문가이다. 좋은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앞으로도 정치를 안 할 건가.

 

"물론!"

 

그가 정치를 시작했을 때 남편 민일영 대법관은 화가 나서 1년 동안 말도 안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엔 큰 힘이 되어준다고 했다.

 

"남편이 물망초 회비 꼬박꼬박 내주고, 주변에 물망초 얘기도 해준다. 그 정도면 엄청나게 도와주는 거다."

 

<조선일보 장일현 기자 / 입력 : 2014.12.27 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