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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갱님, 또 당황하셨어요?

풍월 사선암 2014. 11. 11. 10:13

호갱님, 또 당황하셨어요?”

 

딱히 그 차를 타려던 건 아니었다. 떠나는 차가 그 차밖에 없었다. 열심히 호객 행위를 한 탓인지 그 차에 탄 사람이 제일 많았다. 정원을 못 채운 다른 차들은 운행을 포기했다. 행복동으로 가는 차를 타게 된 것은 내 뜻과 무관하지만, 그래도 행선지 이름은 마음에 들었다. 그 동네에 가면 왠지 나도 행복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고 오산이었다.

 

얼마 전 대학생 20여 명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암울한 세태로 흘러갔다. 스펙 경쟁에 치여 젊음의 꿈과 낭만은 사치가 돼버린 세태, 대학을 나와도 변변한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돼버린 세태, 부모의 재력과 지위가 받쳐주지 않고서는 움치고 뛰기 어려운 세태, 결혼이 부담스럽고 출산이 두려운 세태. 꿈을 잃은 세대의 희망 없는 세태에 대한 한탄이 길게 이어졌다.

 

그 차를 타면 누구나 100% 행복한 동네로 간다고 얼마나 요란하게 떠들었던가. 현란한 광고문구를 보고 긴가민가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했던 대로 처음부터 차는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 예고했던 행선지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지금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알 수도 없다. 거칠게 핸들을 꺾으며 갈팡질팡하는 걸 보면 그 자신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활력은 희망에 비례한다. 희망이 사라진 곳에는 무기력이 안개처럼 번진다. 희망이 제로가 되는 순간 일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의 불명예는 여전히 한국 몫이다. 노인빈곤율 1위도 한국이다. 출산율은 꼴찌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방증이다. 퓨리서치센터 조사 결과 한국인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47%로 베트남(64%)이나 중국(59%)보다 낮다. 지금은 비록 힘들어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소리만 요란하지 차는 시원하게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수시로 멈춰 서고, 덜컹거린다. 그래도 그는 밟기만 한다. 어디가 고장인지 모르는 것 같다. 급가속과 급정거, 신호위반에 난폭운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역주행도 한다. 승객들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흐른다. 준비된 베테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완전초보 아니냐는 불만이 승객들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다. 무면허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학생들과의 대화는 주변을 맴돌았다. 무기력에서 탈출하는 돌파구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얘기해 보자고 했지만 누구 하나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정치적 리더십의 변화, 재벌들의 각성, 남북관계의 획기적 변화 같은 말이 나왔지만 그저 해보는 얘기일 뿐 확신이나 기대를 갖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운전 미숙이 결국 사고를 불렀지만, 그래도 그는 당당하다. 불평하는 승객들을 향해 이제 그만 하라며 싸늘한 눈길을 보낸다. 행복동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뭉쳐서 고함을 치는 통에 승객들은 함부로 소리도 못 지른다. 천천히 가도 좋고, 목적지까지 못 가도 좋으니 그저 조용히, 무사히 가기만 바랄 뿐이다.

 

차에는 온갖 광고문구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경제부흥·국민행복·문화융성·평화통일을 주제로 140개의 다양한 약속들이 내걸렸다. 재원 마련 대책이 없는 공약(空約)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사상 최초로 공약가계부란 것까지 만들었다. 세입 확충(51조원)과 세출 절감(84조원)을 통해 135조원의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는 중앙정부도 죽을 맛이라며 영·유아 무상보육 예산을 지자체에 떠넘기고 있다. 줄줄 새는 방위사업 분야 혈세만 줄여도 무상보육 예산은 충분할지 모른다. 4대 중증 질환 100% 국가부담, 고등학교 무상교육, 초등학교 온종일 돌봄교실 운영, 소득연계형 반값 등록금, 군 복무기간 3개월 단축, 전작권 전환 등 파기한 공약 리스트는 줄줄이 이어진다.

 

한국의 복지 지출 비중은 국내총생산(GDP)9.3%OECD 회원국 평균(21.8%)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남북 대치 상황에 따른 방위비 지출 부담 탓이라고 하지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진지한 노력이나 국방 분야 혈세 낭비를 막을 각고의 노력을 해본 뒤에 할 소리다. 그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도 미군에 기대지 않으면 안보를 장담할 수 없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잘못 산 물건은 환불하면 그만이지만 잘못 탄 차는 운전기사가 멈추기 전엔 내릴 수도, 갈아탈 수도 없다. 현란한 광고문구에 현혹돼 번번이 차를 잘못 탄 우리는 호갱님맞다. “호갱님, 또 당황하셨어요?” 누군가의 비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중앙일보] 입력 2014.11.11 /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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