妓生 眞香과 詩人 白石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
기생 眞香(본명 : 金英韓, 1916~1999)의 號 는 子夜, 法名은 吉祥華. 白石에 의해 子夜라 불리웠던 진향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김영한은 기생이 된 후 춤과 노래와 문학 등에서 높은 예술성을 드러냈다.
특히 그의 스승이자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한 신여성이자 문학여성이기도 했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녀는 몇 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기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글에서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를 포함한 많은 시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진위를 알 수는 없으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만학으로 졸업하였으며,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에는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펴냈다. 그녀는 백석과의 사랑을 나누었던 인연으로 1997년 11월 사재 2억 원을 출연, 백석문학상(창작과 비평사 주관)을 제정하기도 했다. 백석의 연인 진향은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월북 작가 해금이 되자 1987년 9월, 시인 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 (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眞香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고 子夜 여사(김영한)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子夜 여사는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子夜’ 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이 많은 사랑의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이동순 시인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돈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 버렸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 (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의 필치로 쓴 원고를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 조력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다. 생전의 자야 여사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詩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 고 술회한다. 그녀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해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14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고재종 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진향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99년 11월14일,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吉祥軒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이튿날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고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내고 있다.
◀1937년 함흥 영생고보 교사 시절의 백석. 시인 白石(본명 : 백기행, 1912 ~1995)
백석은 195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최근에 1990년대 중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白石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태어났다. 13세 때인 1924년 五山학교에 입학했는데, 재학시절 오산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동문들은 회고한다.
오산학교 졸업 후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modern boy' 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 그의 멋진 헤어스타일이 그의 감각을 말해준다.
백석과 진향의 운명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 재직 중에 이루어진다. 함흥에 와 있던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김진향을 만나서 사랑에 빠졌는데,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唐詩選集’ 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子夜’ 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진향은 우연히 함흥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잃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선수단 인솔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 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 같았다. 나중에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 ‘여성’ 에 발표한 ‘바다’ 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는 자야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 3학년 시절의 백석
"그의 첫인상은 외국 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 댓밖에 안 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 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 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하고 웃었다." 자야의 글을 보면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초례만 치른 후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오곤 했다. 백석은 기생과의 동거를 한사코 반대하는 부모와 장남으로서의 갈등,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백석이 태어난 정주는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 文壇史的으로 대가들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백석은 반세기 가까이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었다.
시집도 <사슴> 한 권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이 이토록 수많은 시인들과 문학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 그의 노력과 시를 읽을 때마다 묻어나오는 솔직함과 서민적이고도 아주 서정적인 시를 白石만의 언어로 쓴 이유가 크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조만식 선생의 사랑을 받아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다. 백석은 월북 작가가 아닌 재북 작가였다. 고당 조만식선생의 비서로 그는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을 번역하며 북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25 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운명의 만남
자야는 집안이 사기를 당해 파산한 후 열여섯 나이에 기생이 된다.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자야는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곧바로 귀국해서 스승을 면회하기 위해 함흥으로 간다.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하나 면회가 불가능해지자 아예 함흥에 눌러앉았고, 다시 함흥의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생이 되면 법조계 유력인사들과 만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스승의 면회가 보다 쉬워 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스승과의 면회를 위해 기생의 길을 선택했던 일만 보아도 그는 대단히 의리가 깊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스승과의 면회는 끝까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김영한은 이곳 함흥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
함흥에서 영어교사로 있던 시인 백석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함흥 영생여고보의 회식자리에서의 처음 이뤄진 두 사람의 만남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진향에게 첫눈에 반한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다고 한다.
당시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의 나이는 스물여섯.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 중 먼저 서울로 올라온 사람이 진향이고, 결국 백석도 함흥의 교사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 다시 김영한의 자취방에서 뜨거운 사랑을 이어나간다.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보금자리를 튼 두 사람은 혼례만 올리지 않았을 뿐 엄연한 부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김영한과 백석의 꿈같은 사랑의 동거는 3년 만에 위기를 맞았다. 하늘도 말리지 못할 것 같았던 이들의 불같은 사랑도 결국 백석의 부모에 의해 엇갈림이 시작된 것이다.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마땅한 백석의 부모는 백석을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인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내려가지만, 혼인을 치루고 도망쳐 다시 김영한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함께 만주로 도피하자고 재촉하지만 김영한의 반대로 결국 백석 홀로 만주로 떠나게 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자신이 싫어 만주로의 사랑의 도피를 포기한 이가 김영한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백석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해방이 되고 다시 한국전쟁이 일어나 백석은 북한에서 재북작가로, 교수로 남고 김영한은 남한의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란 요정을 차리고 이곳을 세를 놓아 많은 돈을 모으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재산 중에 현금 2억원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그리고 대원각의 모든 전각과 땅은 법정 스님에게 시주를 하게 된다. 대원각은 당시 제3공화국 시절 요정정치의 산실이었다. 평소 무소유의 삶을 사는 법정 스님은 길상화 김영한 보살의 뜻을 수차례 거부하다가, 나중에 그 뜻을 받아들여 오늘날의 길상사를 창건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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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극락전에 봉안된 길상화 김영한 영정
당시 전 재산을 보시한 길상화 보살에게 어느 기자가, ‘싯가 천억 원의 엄청난 재산을 이렇게 내놓는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 고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길상화 보살의 대답은 이랬다.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김영한 보살의 백석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알만한 대목이다.
국악계에서는 길상화나 김영한보다는 김진향으로 더 널리 알려진 그녀. 그리고 그녀의 일생과 사랑이 고스란히 드리워진 사찰 길상사. 길상화 보살의 감동적인 순애보를 가슴에 안고 돌아보자면 길상사 경내 한켠에서 법정 스님의 반가운 법문 하나를 만난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실천이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남자건 여자건 누구나 평생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사는 연인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라는 점이겠지만. 그래서 가슴에 묻는 것 아니겠는가. 그 연인이란 영화 속의 아름다운 여배우이거나 문학작품 속의 구원의 여인 등이 대부분이겠으나, 간혹 현실에서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情人일 경우 그것은 일생을 두고 아릿한 아픔이 된다. 물론 이러한 아픔은 어떤 측면에서는 행복한 것일 수도 있다.
'
추억이 많은 사람은 가난하지 않다' 는 말도 있잖은가. 롯데 그룹의 회장인 신격호 씨는 어린 시절 읽었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 나오는 유부녀 '롯데'를 마음속에 묻어두고 있다가 창업 시 자신의 기업 이름으로 썼고, 피카소는 자신의 연인들을 곧잘 그의 화폭에 담았다.
문인의 경우는 이렇게 묻어두거나 숨겨온 사랑을 시나 소설을 통해 드러낸다. 여러 군데 찾아보았으나 진향의 미색에 관한 글은 찾아 볼 수 없었고, 백석에 대하여는 미남이며 서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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