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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여인 시인의 기구한 삶 - 허난설헌

풍월 사선암 2014. 10. 1. 10:03

 

길 끝에 초희(楚姬)가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난설헌(蘭雪軒)이라고 부른 여자, 허난설헌(1563-1589)입니다. 세상 남정네들로부터 받은 질시와 투기, 두 아이를 일찍 잃은 한을 품고 산 여자입니다. 스물일곱 해 만에 홀연히 하늘로 떠난 여자입니다. 먹먹한 대한민국에서 먹먹한 가슴을 안고 무작정 떠난 길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허난설헌 생가터 솔숲 사이로 한 여자가 걸어갑니다. 늘 푸른 송림과 노란 나들이옷 대비가 왜 그리 강렬하던지요. 400년 전 먹먹한 삶을 살다 간 여자, 난설헌을 강릉에서 만났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 문장가

 

난설헌은 경포대 옆 강릉 초당마을이 고향입니다. 아버지 허엽, 두 오빠 성과 봉, 동생 균 그리고 초희. 이 다섯을 허씨 5문장이라 합니다.

 

자유분방한 가풍 속에서 난설헌은 어릴 적부터 글을 배웠습니다. 여덟 살 때 쓴 글 한 편에 세상이 놀랐고, 이후 난설헌은 신동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남자 세상에서 천재 여인의 삶은 기구하게 흘러갑니다.

 

나이 열다섯에 혼인한 신랑은 글공부를 핑계로 기생집을 오갔고, 각시는 밤이면 신랑을 기다리며 시를 씁니다. 어렵게 가진 두 아이를 일 년 간격으로 전염병으로 잃습니다. 그사이에 친정은 조금씩 쇠락해 가고 뱃속에 있던 아이마저 유산을 합니다. 스물세 살이었습니다.

 

허난설헌 초상화

 

곡자(哭子)  -허난설헌-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는 으스스 바람이 일어나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도깨비불은 숲속에서 번쩍인다.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存汝丘(현주존여구) 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네.

應知第兄魂(응지제형혼) 아아, 너희들 남매의 혼은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으리.

縱有服中孩(종유복중해)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安可糞長成(안가분장성)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라리오.

浪吟黃坮詞(낭음황대사) 황대 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상명지통(喪明之痛), 눈이 멀 정도로 참담한 어미가 쓴 시 '곡자(哭子·자식을 잃고 운다)'입니다. 난설헌은 그해 이런 시를 씁니다.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다가 구슬 바다를 범하고 / 靑鸞倚彩鸞(청란의채란)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에 기댄다.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스물일곱 송이 아름다운 부용꽃 /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붉은 꽃은 지고 달빛에 서리가 차다.

 

- '꿈속에 광상산에서 노닐다. 夢遊廣桑山(몽유광상산)'

 

허난설헌 시비

 

4년 뒤 봄날, 초희는 "부용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고 말하고선 목욕재계를 한 뒤 세상을 떠납니다. 1589319, 우리 나이로 스물일곱 살이었습니다. 그제야 남자들은 세상을 잘못 만났고 여자로 잘못 태어났고 남편을 잘못 만난 천재 문장가라며 추앙합니다. 남정네들의 이기심이 번뜩번뜩한 치사한 이야깁니다. 동생 허균이 편찬한 시집은 ���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중국에서는 그녀의 화신이라 자칭하다가 "나는 왜 스물일곱인데 살아 있나"라고 좌절한 시인도 있었다지요.

 

그렇게 초희는 슬프게 살았습니다. 혁명을 꿈꾸던 허씨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해 세상에서 잊혔고요. 잊기에는 그 생()이 슬프기에, 훗날 사람들은 이 솔숲 어딘가에서 그녀가 태어났다고 짐작하고 기념관과 공원을 세웠습니다.

 

비범했던 두 오누이의 삶

 

교문암. 비범한 두 오누이의 삶을 끌어안고 바위들은 파도를 맞습니다.

 

어엿한 기와집 안에는 그녀를 기리는 여러 징표들이 보입니다. 그녀 시를 적은 족자, 위패, 그리고 그녀의 초상화. '가인(佳人·용모가 아름다웠다)'으로 남정네들이 묘사했던 그녀의 기품이 느껴집니다. 시들은 한 수 한 수 서럽고 애잔합니다. 마당에는 작약들이 바야흐로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담장 바깥으로 나서니 솔숲이 반깁니다. 낙락장송들이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공원 옆에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난설헌과 허균 남매의 행적과 작품을 전시한 공간입니다. 다례(茶禮) 시연도 하는 곳입니다. 경포호에는 무심한 햇살이 반짝입니다.

 

초당마을에서 순두부로 요기를 합니다. 초당은 아버지 허엽의 호입니다. 도시에서 맛보는 매운 두부 대신, 담백한 전골, 담백한 손두부, 담백한 구이로 속을 채웁니다. 그리고 사천진리로 갑니다. 허균의 흔적이 그곳에 있습니다.

 

경포대에서 북쪽으로 30분을 가면 나오는 교산(蛟山) 끝자락입니다. 교산(蛟山), '이무기의 산'은 허균의 호이지요. 이무기의 승천을 꿈꿨던 혁명가 허균은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산이 끝나는 바닷가는 사천진해변입니다. 큼직한 바위들이 있습니다. 교문암(蛟門岩)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비범한 두 오누이의 삶을 끌어안고 바위들은 파도를 맞습니다.

 

경기도 광주 지월리에 있는 난설헌 묘(뒤쪽). 앞쪽 두 무덤에는 일찍 떠나보낸 오누이가 잠들어 있습니다.

 

초희와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수도권에 사는 분이라면 한 군데가 더 남았습니다. 중부고속도로 곤지암IC를 지나며 왼편을 바라보면 경수산 중턱에 무덤이 보입니다. 난설헌의 묘입니다. 안동 김씨 서운관정공파 문중 선산입니다. 난설헌은 일찍 잃은 두 오누이 무덤 옆에 잠들어 있습니다.

 

강릉과 서울을 오가는 내내 꿈길처럼 먹먹했습니다. 자식을 떠나보낸 어미, 설움 속에 요절한 여자.

이 잔인한 20145, 꿈길밖에 길이 없습니다.

 

여행 수첩

 

당일 코스(수도권 기준) 동해고속도로 강릉IC에서 동해, 강릉 방면7번 국도 주문진, 속초 방면경포대초당동주민센터초당순두부길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 경포대로 나가서 해안길 따라 20분 정도 북상하면 사천진항과 사천진해수욕장. 교문암은 해수욕장에 있다.

 

각 목적지 교통

 

허균허난설��기념관 : 강릉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경포대행 버스. 202, 206, 207, 230번 등 초당두부마을 하차. 기념관은 월요일 휴관.

교문암 : 경포대 현대APT 313번 버스로 사천진리 종점. 내비게이션은 '사천진해변'. 경포대에서 북쪽 20분 거리.

허난설헌묘 : 경기도 광주종합터미널 옆 경안동주민센터 앞 정류장에서 35-32 버스 지월2리 정류장 하차, 1.2km. 내비게이션은 '허난설헌묘' 또는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 산29-5'. 중부고속도로 곤지암IC에서 나와서 고속도로 따라 이어지는 325번 지방도 경충대로~산수로~경안천로 순. 진입로 직전에 급커브길 나오면 우회전해서 산길.

 

맛집

 

초당두부마을. 허난설헌 집안에서 만들어 먹었다는 손두부를 맛볼 수 있다. 생가터 주변에 두부마을이 조성돼 있다. www.cdtofu.kr

여행정보 강릉시 문화관광과 (033)640-4132, tour.gangneun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