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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장기려 박사 - 가난한자 안에서 더 행복했던 바보의사의 일생과 업적

풍월 사선암 2014. 8. 4. 08:52

성산 장기려 박사 - 가난한자 안에서 더 행복했던 바보의사의 일생과 업적

 

남들이 나에게 바보라고 말하면 그 삶은 성공한 삶이다.

- 聖山 장기려 -

 

1911814(평안북도 용천) - 19951225

 

 

출생과 성장

 

장기려박사는 1911년 음력 814이리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의지가 좀 약한 편이었으며 남의 말을 그대로 믿는 성품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글씨를 잘 쓰고 한학에 소양이 있어 고향 사람들이 "장 향유사"라고 불렀는데 친구를 좋아해서 1년이면 365일 술을 마셨다. 그러면 그의 어머니는 360일은 짜증을 내서 어린 장기려의 눈에 안 좋게 보였다. 부모 사이에서 싸움의 원인이 되는 음주는 좋지 않게 생각하여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한학자였던 장운섭은 아들 장기려에게 천자문 까지만 가르치고 7살 때부터 자신이 설립한 의성학교에 입학시켰고 성경을 주로 공부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야곱과 요셉, 다윗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장기려는 학교에 들어가서 그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직접 읽고 자신도 장차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장기려는 5년제 의성학교를 졸업하고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송도고등보통학교시절 "인간은 참으로 죄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수 없다"고 생각하고 세례를 받았다. 동시에 "앞으로 무엇을 해서 나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늘 생각하였다.

 

의대진학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둔 송도고등보통학교 5학년 때 장기려의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장기려의 아버지가 고향의 전답을 정리하고 김포에 수십만 평의 땅을 샀는데 일이 잘 안되어 농장을 저당 잡혔던 수리조합에 빼앗겼고 만주에서 이틀갈이(한 바퀴 도는 데 이틀이 걸리는 넓이) 땅을 산 것이 잘 안되어 집안이 몰락해 버렸다. 서울 대학교 문리대학 자리에도 5천 평의 땅이 있었는데 사업이 잘 안 되는 바람에 평당 5리씩에 팔았다.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되자 장기려는 고향으로 돌아가 의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을 꺾을 수가 없었다. 부득이 돈이 적게 드는 학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궁리 끝에 선택한 학교가 당시 수업료 년 35원으로 제일 싼 경성 의학 전문 학교였다. 그런데 학교 성적은 7~11등 사이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때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수업료는 1백원이었다. 경성 의학전문학교를 목표로 정하게 된 후 장기려는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들어가게만 해주신다면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이런 가운데 장기려보다 더 성적이 좋았던 몇몇 학생들이 친구 결혼식에 가서 술을 마셨다가 1년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수학 4문제 중 어려운 응용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알고 있는 문제여서 혼자서 답을 쓸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장기려는 1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고 고등 보통학교 때의 성적이 상당히 반영되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평양 기홀병원

 

장기려는 19403"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경성 의학전문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그의 스승 백인제는 고등관인 대전도립병원 외과 과장직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장기려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하나님께 서약한 대로 시골의사가 되려고 했다. 또한 일본인들 사이에서 일하기가 싫어 평양 기홀병원(평양연합기독병원, 미 감리교 의료 선교사 홀부인을 기념해서 그렇게 불렀다.) 을 택하였다. 장기려는 스승의 배려를 마다한 자신에게 백인제가 "고약한 녀석"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친구로 부터 전해 들었다.

 

그럼에도 막상 장기려가 평양 기홀병원에 부임하자 백인제는 장기려를 위해 동아일보에 "입지전 중의 인물"이라는 특별기고까지 해서 "초지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칭찬해주었다.

 

평양 기홀병원에서 장기려는 이용설 박사의 소개로 외과 과장 자리를 맡았다. 대전 도립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마다하고 간 기홀병원 이었지만 거기에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병원실행위원회에서 두 번이나 비토를 당한 끝에 이용설 박사에 대한 체면 때문에 세 번째야 통과되었다는 사실을 부임 후에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기홀 병원 의사들이 모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출신이라 텃세가 강한데다, 장기려가 박사 학위로 인해 받게 되는 대우도 그쪽 의사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교를 장기려보다 1년 먼저 나온 유기원(전 서울대학교 총장 유기천 박사의 맏형)의 월급이 215원인데 이용설 박사가 "장기려는 학위가 내정돼 있었기 때문에 일단 250원을 받고 학위가 통과되면 300원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11월 앤더슨 원장이 귀국했는데 의사들 중 장기려만이 박사학위가 있어 병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의사들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잦았고 하루는 자기 고집을 서로 굽히지 않기에 장기려가 "당신네들 세브란스 출신은 왜 그렇게 의견이 잘 맞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이를 계기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출신 의사들은 장기려를 배척하는데 하나가 되었고 원장이 된지 두 달밖에 안 된 19411월 이사회 고문 장로인 베이커 박사로 부터 사표를 종용받았다. 의사들 사이에 의견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후임 원장으로 김명선 박사가 왔으며 장기려는 다시 외과 과장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장기려는 강등 자체를 서러워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의사들의 텃세 때문에 시련을 겪었다. 병원 측은 장기려에게 원장 되기 전보다 25원을 적게 주었을 뿐 아니라 순사를 시켜 괴롭히기도 했다.

 

장기려가 병원에 가고 없는 동안에 순사가 찾아와서 "이 집이 아직도 안 나갔구먼" 따위의 말을 하고 갔다.

장기려는 이때 10개월간을 자신의 평생에 가장 밀도 있는 신앙생활을 한 시기로 회고했다.

이때 그는 오직 하나님과 환자만을 위해 살았다.

 

스승 백인제의 배려

 

장기려는 의사로서 당대 최고의 의술을 지닌 인물이었다. 33세 때인 1943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간을 수술해서 조선의학회 학회지에 보고하였다. 그때만 해도 간을 수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대부분 의사들은 간이란 핏덩어리여서 잘라내면 목숨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장기려는 간암 환자를 진찰한 뒤 간을 잘라내는 수술을 하였던 것이다. 이어 자신이 창설한 부산대학교 외과대학 외과 교실에서 국내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을 대량 절제하는 수술에 성공하였다. 이 결과는 1960년 대한의학회 학술대회에 보고되었고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받았다.

 

장기려가 이처럼 뛰어난 의술을 지닌 의사가 된 배경에는 그의 스승 백인제가 있었다. 백인제는 경성 의전의 조선인 교수 2명 중 한명으로 외과 교수였다.

 

백인제는 1937년 장폐색증에 있어서 상부장관 감압술이 유효한 수술임을 세계 최초로 발표 하였다. 그러난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계학회에는1940년 미국의 왕겐스틴이 먼저 보고하였다. 이를 애석하게 여긴 그의 일본인 제자들이 그의 발표내용을 그림으로 그렸으며 현재 부산 백병원에 보관돼 있다.

 

장기려는 이를 매우 애석해 하면서 제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해 스승의 학문적 업적이 빛을 보지 못한 데 책임을 느낀다고 회고하였다. 장기려는 백인제의 제자로서 수련의 과정을 밟았다. 백인제의 수술 실력은 일본과 만주에 까지 명성이 있을 만큼 대단하였다.

 

일제하에서도 그에게는 일본인 환자들이 수술을 받으려고 줄을 이었다. 의술뿐 아니라 백인제는 입담이 좋고 문장도 잘 썼다. 1937~1938년쯤 독일 유학을 갔을 때의 기행문은 명필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백인제는 장기려를 무척 사랑하며 후계자로 삼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기려가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게 되면서 경성의전을 떠나기로 하자 대전 도립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백인제는 해방 후 장기려가 남하할 줄 알고 서울의대 교수 자리를 장기려에게 물려주려고 계속 유지하였는데 장기려를 만나지 못한채 불행히도 19506.25 전쟁중에 납북되고 말았다. 백인제는 당시 국내 의술계 제 1인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한국 현대의학의 개척자였다. 장기려는 스승 백인제의 계보를 잇는 장기려, 백낙조, 이재복, 백낙환, 김희규 등 제자들을 "백인제 트리"로 표현하였다. 장기려는 자신이 부산 복음병원과 청십자의원(청십자의료보험조합 관련), 부산의대 외과, 간 연구 협회 등을 세웠으며 이재복은 서울 의대를, 백낙환은 부산 백병원을. 김희규는 카톨릭의대 외과와 성심병원 외과를 통해 스승 백인제의 의술과학문을 계승한 것으로 나타냈다.

 

장기려가 평양 기홀병원에 있을 때 였다. 백인제의 제자들이 스승을 모시고 모인 일이 있었는데, 장기려는 "환자를 충실히 돌보는 것이 제자 된 도리"라며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백인제는 "그 친구는 좀 묘한 녀석이야"라고 참석했던 제자들에게 좋게 이야기해 주었다. 장기려는 19506.25 전쟁 중에 남하하여 부산에서 무료로 천막병원을 운영하면서 백인제가 쓰던 수술대를 빌려다1971년 까지 1만명 이상을 수술한 후 돌려주었고 그 수술대는 현재 백병원의 백인제 기념관에 보존 되어 있다.

 

이처럼 백인제는 장기려가 의사가 되는 데 가장 큰 영향과 가르침을 준 인물이었다. 장기려는 백인제를 스승으로서 사랑하고 존경하였지만 자신의 신앙적인 기준과 의지를 지켜나가는 데 있어서는 백인제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결혼관

 

장기려는 6.25 전쟁 중에 아내와 자녀들을 북한에 남겨둔 채 차남 장가용만 데리고 월남하였는데, 주변으로부터 여러 차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재혼하지 않았다. 그는 후지이 다께시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와 사별했으나 아내가 영생하고 있음을 믿어 내세를 확신하며 재혼을 부정하고 실천한 데 대해 공감하며 크게 감명 받았다. 장기려는 재혼이란 생각도 못할 일이라고 단정 지었다. 한번은 미국에 가있는 여의사한테 "이상적인 여성이 있어도 재혼을 하지 않겠느냐?" 라는 구혼의 뜻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훌륭한 사람으로 끌리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있어도 재혼을 하지 않는다. 내게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딸이 이북에 있고 그가 이상일 수밖에 없다" 고 답장을 해주었다. 장기려가 북에 두고 온 아내를 두고 월남하여 재혼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신앙적인 것이었다. 결혼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였던 장기려에게는 하나님께서 배우자로 짝지어 주신 김봉숙만이 아내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6.25전쟁이 휴전된 1952년에 장기려는 부산 복음 병원에서 무료로 환자를 돌보았고 아들 장가용은 서울에서 하숙을 하며 경복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때 쌀 한 가마는 7~8백원 이었고, 혼자서방을 쓰는 한달 하숙비는 쌀 두가마 값이었다. 장기려는 아들에게 매달 3천원씩을 보내주었다. 장가용은 그 돈으로 하숙비와 수업료를 내고 책도 사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꼬박꼬박 보내주던 하숙비가 오지 않았다. 다음 달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숙비를 못 내자 하숙집 주인은 심하게 독촉하였다. 그렇게 하숙비가 밀린 가운데 겨울방학이 되었고 장가용은 기차를 타고 아버지가 있는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 도착한 장가용은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느라 자신에게 하숙비를 보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1960년대에는 이불이나 양복이 매우 귀하였다. 이때 장기려는 가끔 이불이나 양복을 선물로 받았는데 받는 선물마다 자신이 사용하지 않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63년 장기려의 아들 장가용은 윤순자와 결혼하였다. 이때 윤순자는 시아버지를 위해 고급 비단 이불을 선물로 준비하였다. 그런데 장기려는 며느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 이불을 가난한 고학생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였다. 이에 며느리는 깜짝 놀라며 정 그렇다면 장기려가 쓰던 이불을 고학생에게 주고 새 이불은 장기려가 쓰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그것도 안 되면 그 학생을 위해 새 이불을 장만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왕 주려면 새 이불을 주어야 하고, 새 이불은 살 필요가 없다는 시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 어느 날, 산정현 교회의 교인들인 방귀녀와 이정순은 장기려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장기려의 집에 있는 이불이 너무 낡았기에 새 이불을 선물하기로 하였다. 시장에 가서 햇솜을 많이 사서 정성껏 이불을 만들어 장기려에게 주었다. 방귀녀와 이정순은 장기려가 받는 선물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불만큼은 꼭 장기려가 써야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장기려는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두 사람이 다시 장기려의 집을 찾았는데, 아무리 방안을 둘러보아도 지난번에 선물한 이불이 없었다. 이에 두 사람은 "장로님, 저희가 드렸던 이불이 보이질 않네요? 그 이불 누구한테 주신 것은 아니시겠죠?" 라고 말했다. 이에 장기려는 "아니, 나보고 어떻게 그런 호사스런 이불을 덮고 자란 말 이예요?" 라고 꾸짖듯이 말했다. 장기려의 제자들 역시 스승 장기려에게 선물 하고 싶을 때마다 장기려가 직접 쓸 수 있는 선물을 고르는데 신경을 쓰곤 하였다.

 

부산 복음병원

 

1) 천막병원

 

부산 복음 병원(지금의 고신대 의료원)은 장기려가 6.25 전쟁 중에 부산으로 피난 와서 무료 천막병원을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장기려는 처음에 제3육군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다가 1951620일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였던 한상동이 전영창과 함께 새 일거리를 갖고 장기려를 찾아왔다. 전영창은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다가 중공군이 개입하자 졸업을 1주일 앞두고 친구들에게 5천달러를 모금해서 급거 귀국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돈을 유엔 민사원조처에 가지고 가서 "약을 사서 전재민에게 주어야겠다." 고 의논했다. 그때 민사원조처의 노르웨이인 책임자 넬슨씨가 그 돈으로 조그만 의원이라도 내면 매일 50인분의 약을 원조해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한상동과 전영창은 장기려를 찾아와 의원을 운영해줄 수 있느냐고 의논하러 온 것이었다.

 

불우한 사람들을 치료해 준다는 것은 장기려가 의사가 되려고 결심했을 때 하나님께 서약한 일이었기에, 6월 말로 제3육군병원을 그만두고 영도에 있는 제3교회 창고에서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다. 처음에 의사는 장기려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두 달 후에 경성의전 후배 전종휘 박사가 합류해 도와주었다. 이때 병원도 2백여 미터 떨어진 영선국민학교 공지에 천막 셋을 치고 자리를 옮겼다.

 

치료비를 받지 않았기 때문인지 환자들이 몰려들어 하루에 전종휘가 80명쯤 치료했고 장기려는 50~60명을 진료했다. 환자가 많은 날에는 2백명이 넘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무의촌 순회 진료도 나갔다. 이때 직원은 총무인 전영창, 서무/경리/약국을 맡아본 오재길, 간호원 김재명, 김순리, 이금숙, 운전사 김정일 등 11명이었다. 직원들에게 딸린 가족이 모두 44명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미국의 개혁 선교회에서 나오는 월 5백 달러로 생활하였다.

 

무료로 치료해주는 복음 병원으로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직원들은 토론 끝에 "감사함"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실비정도를 받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감사함"을 설치하자 수술환자는 80%정도 돈을 넣고 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병원 운영이 궤도에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복음병원이 존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상기, 김병일, 조영식 등 여러 의사들이 무료봉사를 해주었고 무료시술을 받는 사람 중에 그대로 주저앉아 일을 도와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4년째가 되자 도저히 병원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1인당 1백환씩 치료비를 받았다. 부산의 전신 연합대학 시절이었던 1953년 봄, 전종휘는 장기려를 서울대 서울의대 교수로 추천하고 이재구 학장도 그것을 받아들여 장기려는 복음병원장직과 겸직하였다. 그런데 대학이 서울로 복귀할 때 전종휘가 "복음병원이 언제까지 가겠습니까? 같이 서울로 가서 교수 일에 전념합시다." 라고 간곡히 권해주었지만 장기려는 차마 복음병원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에 서울 - 부산 간을 왕래하였다.

 

2)병원 경영철학

 

장기려는 무료 진료로 천막병원에서 출발한 복음병원이 계속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이 주어지도록 병원을 운영하였다. 특히 돈이 없어 진료비를 낼 수 없는 환자들에게는 여전히 무료로 수술과 진료를 해주었다. 그런데 병원 규모가 커지고 의료진과 직원들의 수도 늘어남에 따라 병원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직원들은 장기려에게 최소한의 병영 경영에 필요한 진료비를 받아야 한다고 건의하고 무료 여부는 병원 간부회의에서 결정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장기려는 "병원이 무슨 돈이나 버는 곳인 줄 아나? 돈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치료비를 달라고 할 수 있어"라고 말했지만 직원들의 요청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복음병원은 치료비만은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술비 또는 진료비를 부담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장기려를 찾아와 애원하였다. 장기려는 하는 수 없이 치료비가 없어 퇴원할 수 없다며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원장이라도 마음대로 퇴원 시킬 수 없으니 늦은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 놓으면 몰래 도망가세요." 라고 말해주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사라졌다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치료비를 내지 않은 환자가 달아났으니 직원들에게는 정말 큰일이었다. 그러나 장기려는 "그 환자가 오죽하면 도망갔겠느냐" 며 환자 편을 들어주었다.

 

장기려로 하여금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할 수 있도록 의견을 냈던 채규철의 증언에 따르면, 장기려는 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복음병원을 운영하였다. 병원 원장이나 대학 교수 및 학장으로서 월급이나 수당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 가불이 더 많았다. 1967년 채규철이 처음 장기려를 만났을 때 장기려는 사면초가 상태에 있었다. 장기려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병원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소원은 마지막으로 장기려에게 진찰이라도 받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입원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었다. 이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환자들은 바보처럼 마음이 착한 장기려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인데, 이렇게 많은 입원비와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장기려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먼저 생각하곤 눈물겨워하였다. 병원비 대신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 할 수 없겠느냐는 것이 환자들의 제안이었다. 장기려는 그런 환자들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납 처리하곤 하였다. 이렇다 보니 장기려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어 병원자체의 운영도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려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3)옥탑방 생활

 

장기려는 25년 동안 맡았던 복음병원 원장 직에서 은퇴한 후 병원옥상의 조그마한 옥탑 방에서 기거하였다. 이 병원의 설립자이며 원장이었던 장기려는 세속적인 욕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노후에는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찾아오는 환자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장기려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환자들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로부터 진료 받기를 원하였다.

 

자신의 모든 소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장기려가 세상을 떠날 때 그에게는 15백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그는 이 돈을 절반은 손자 장여구에게, 나머지 절반은 그의 간병인에게 주라고 유언하였다. 이에 장기려의 아들 장가용과 며느리 윤순자는 전액을 간병인에게 주었는데, 후에 간병인이 장기려의 유언대로 절반만 받겠다고 하여 되돌려 주었다. 장기려는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리고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된 후 많은 부를 쌓을 수 있는 여건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모으는 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오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드렸던 약속을 평생에 걸쳐 지켜갔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장기려의 사회봉사에서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의 창립과 성공적인 운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민간으로는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일 뿐만 아니라 이 조합의 운영체계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도입되었다.

 

1968513, 장기려는 "부산모임"에 옵서버로 참석한 채규철의 제안에 따라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창립하였다.

 

채규철은 "부산모임"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만 사회인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며 자신의 덴마크 유학시절 경험을 털어놓았다. 채규철은 덴마크에서 유학하던 중 병이 났을 때 의료보험 덕분에 무료로 치료받고 온 사람이었다. 장기려는 이북에서 의료보험제도를 체험하고 온 터여서 월남 후에도 항상 의료 혜택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복음병원도 운영하였던 것이다. 그때 복음병원은 확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무료병원의 성격이 변해 새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장기려는 의료보험조합이 이북에서는 강제적으로 된 것이지만 남한에서는 자유롭게 자의로 협동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장기려는 채규철, 조광제, 김서민 등과 함께 서둘러 의료보험조합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회비는 한달에 60원으로 정했는데 당시 담배 한 갑의 가격이 100원이었다. 회원들은 회비를 내면 몸이 아플 때 자신이나 가족들이 병원에서 무료로 검사를 받고 치료비의 20%만 부담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처음엔 주변의 우려 속에 출발했지만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은 나날이 발전해갔고 회원은 갈수록 빠르게 늘었다. 1974년 당시 15천명의 회원들이 혜택을 받았으며 부산지역 전체가 장기려의 청십자 운동에 협조하였다. 나중에는 회원수가 20만명에 이르러 부산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부산시민의 의료보험조합 역할을 하였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의 성공적인 발전은 정부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정부는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된 뒤 9년이 지난 1977년에 처음으로 근로자 5백명 이상의 사업장과 공업단지를 대상으로 의료보험조합을 구성하게 하였다. 장기려가 처음 의료보험조합을 만들 때만 해도 국민들은 의료보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는데 뒤늦게 정부가 사회보장 제도의 하나로 의료보험제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이 아니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국민들에게는 별다른 효과를 주지 못했다.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조합은 1989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장기려가 설립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은 전 국민 의료보험제가 시행되기까지 21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한 일반 국민들이 질병의 두려움과 치료비의 걱정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을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로 도입하여 발전하는 데 중요한 계기와 지표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로서 살았던 장기려의 생애는 일반적인 상식과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장기려는 가족들을 이북에 두고 왔기에 남한에서는 자신에게 유일했던 아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데 더 헌신했다. 수십 년간 병원 원장과 외과 대학 교수를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소천 할 때 그의 소유로 된 조그만 집 한 채도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오직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하여 내주었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통하여 20만여 명의 조합원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게 하고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 전 국민 의료보험조합이 도입될 수 있게 한 그의 빛나는 업적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장기려의 생애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절대적 가난이 당시 시대적 상황이었으며 장기려 자신도 가난한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영달과 안위보다 자기희생으로 이웃사랑에 헌신하였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또한 해방을 전후한 혼란의 시기에 6.25전쟁으로 전 국토가 피폐되고 모든 국민이 헐벗고 굶주린 상황에서 장기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전쟁 중에 사랑하는 아내와 5남매를 이북에 둔 채 월남하여 45년간이나 이산의 고통을 처절하게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장기려로 하여금 평생을 변함없이 가난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아가게 만든 힘은 하나님과의 약속이었다. 그것은 장기려 자신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사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 절대 순종하는 신앙이었다.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장기려의 생애와 기독교 신앙 /황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