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부항면 월곡마을 문부자집 전경(명례궁 건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건물로 보존이 매우 잘 되어 있음)
기와에 임진 5월 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1892년 임진년)기와도 명례궁의 자재임.
부항면 월곡마을 입구 안내판 / 양산경찰서에서 가져온 주춧돌
금척 이태일씨 창고에 보관중인 명례궁 자재(영동군 양산경찰서 철거 시 운반하여 현재 보관중임)
무풍의 명례궁(明禮宮)
무풍의 명례궁(明禮宮)은 무풍면(茂豊面) 현내리(縣內里)에 소재한 행궁(行宮)이다.
본 궁은 철종(哲宗) 9년(1858)에서 1940년 사이의 인물 민병석(閔丙奭)이 건립한 궁실(宮室)이다.
민병석(閔丙奭)은 고종때의 척신(戚臣)으로 행서(行書)를 잘하던 서도가(書圖家)로 명성이 있어 양반들의 비문을 많이 남긴 인물이기도 했는데 벼슬이 내부대신(內府大臣)에 올랐던 그는, 한 · 일(韓 · 日) 합방 이후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고 망국내각(亡國內閣)의 궁내대신(宮內大臣)까지 지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말기 우리나라에는 미국(美國), 일본(日本), 청국(淸國) 등 여러 나라 군대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전국 각처에서는 민란民亂)까지 일어나 정국은 시끄럽기만 했다.
이때 민병석(閔丙奭)은 이곳 무주(茂朱)의 무풍동(茂豊洞)을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땅이요 십승지지(十勝之地)중 하나라는 남사고(南師古)의 비결(秘訣)을 생각한 후 난세의 피난처로 삼기 위하여 집을 지을 결심을 했다.
민비(閔妃)의 친척으로 척신(戚臣)이 된 그는 상당한 권력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고종 27년(1890) 당시 무주부사(茂朱府使) 서완순(徐完淳)의 협력을 받아 건평 99칸 규모의 건물을 세웠다. 이때 공사에 쓰인 사업비는 본군에서 상납(上상納납)해야 할 공물(貢物)을 대납(代納)하고 거기서 얻어진 이익금으로 충당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민병석은 토지 300두락(斗落)을 부속시킨 다음 쌀 1,500(石)을 확보한 후 민비(閔妃)에게 상납하고 명례궁(明禮宮)으로 개명(改名)하였다고 한다. 그로써 이 고장에도 유사시 임금이 거동 할 수 있는 행궁(行宮)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궁이 건립됨으로써 이 고장 백성들은 뼈를 깎는 고통을 받아야 했는데 민병석이 국가에 대납한 상납의 댓가로 무주군민들은 그 몇 배의 세금을 낼 수밖에 없던 관계로 한 가족이, 더러는 한 동네의 주민 모두가 야반(夜半) 도주를 하기도 했고 그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굶주린 허리띠를 졸라매야하는 실정이었다.
이렇게 건립한 명례궁을 민비(閔妃)가 받아들이자 조정에서는 구모승지(具某承旨)를, 초대 관감(官監)으로 부임시키면서 제원찰방(濟原察訪)을 겸임토록 했다.
그 후 2대 관감(官監)으로는 민병석(閔丙奭)의 사촌 민병형(閔丙馨)이 부임했다가 회덕군수(懷德郡守)로 전출하면서 전기(前記) 구승지(具承旨)의 양자이던 구일모(具日摸)가 3대 감관(官監)으로 부임했는데 명례궁(明禮宮)의 관감(官監)으로서는 구관감(具官監)이 마지막이었다.
무풍(茂豊)의 명례궁(明禮宮)에 3대째 관감이 부임해 오는 동안 수많은 정국의 변화가 일어났다.
고종 32년(1895)에는 민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있었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광무 9년(1905)에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어 통감부(通監府)의 권력 하에 들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명례궁의 관감을 폐지하고 이 별궁은 민병석(閔丙奭)에게 다시 환부(還付)하여 개인소유가 되게 하였다.
이로써 명례궁은 임금이 한 번도 거동하지 못한 태행궁으로써의 기능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풍에 거주하던 하인환(河寅煥)이라는 사람이 10여 년간 관리 하다가 이장우(李章雨)라는 사람에게 매각되어 버렸었다.
8.15 해방 후 부터는 이 궁에 딸렸던 토지마저 금융조합(金融組合) 농지가 되어 버렸고, 건물은 강순열(姜順烈)이라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가 일부는 경북 금릉군 대덕면 정각(大德面 亭閣)으로 필려갔으며, 일부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 경찰지서 건물(楊山面支署 建物)로 팔려갔다.
◀무풍면 현내리 새터마을에서 바라본 대덕산 전경
1991년 그 당시 무풍청년회(회장 이대석) 주관으로 양산에서 주춧돌 및 기둥 서가래 등 일부를 회수하여 무풍면 체육공원과 금척에 현재 보관중이다. 회수하면서 조그마한 사건은 있었으나 문제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이 고장 주민들의 살림집으로 전락되어 수십 가호가 살기도 했으나 일정(日政)이 지나는 동안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던 관계로 결국은 모두 훼손되고 말았다.
근래에는 단 한 칸의 건물만이 남아있을 뿐이나 그것마저 변형된 채 개인이 사용하고 있고 그 주변에는 천주교회와 민가가 어지럽게 건립되어 옛 궁터는 흔적을 잃었으며 그후 이상문씨 소유에서 육영식씨에 매각되어 현재는 일부 터에 개인 주택이 지어지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무풍시장 장옥(場屋)이 들어서서 이 지역 주민들의 교역장(交易場)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 무풍면 지역주민들은 숙원사업으로 명례궁 복원을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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