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나도 몰랐던 나의 살인 행위

풍월 사선암 2014. 5. 18. 19:08

나도 몰랐던 나의 살인 행위

 

20년 전이었습니다. 저는 영국인의 운전매너에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횡단보도 앞에만 서면 차들이 모두 멈췄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차량 안의 운전자를 쳐다봅니다. 눈이 마주치면 서로 빙긋이 웃습니다. 늘 운전자와 보행자 사이에는 그런 교감이 흘렀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사람이 있든 없든 그들은 신호를 지켰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영국 신사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네.’ 영국인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부럽다. 어떻게 이렇게 교통법규를 잘 지키나. 영국인은 참 신사적이다.” 그랬더니 친구가 답했습니다. 영국의 횡단보도에 얼마나 많은 카메라가 숨어있는지 아느냐? 그런 신호를 어기다가 걸리면 범칙금이 얼마인지 아느냐?” 신사적인 운전 매너, 그 밑에 무서운 범칙금이 깔려 있더군요.

 

며칠 전에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를 만났습니다. 세월호 이야기를 하다가 영국인의 운전매너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목사는 그게 다가 아니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스위스에 3년간 머문 적이 있습니다. 큰 도로에서 신호등이 빨간불인데 브레이크를 안 밟고 선을 넘어갔다. 신호가 완전히 바뀌기 전에 일찍 출발했다. 속도를 위반했다. 도처에 카메라가 깔려 있다. 그때마다 무시무시한 범칙금이 날아온다. 당시 제일 싼 범칙금이 20만원 정도였다. 제한 속도가 시속 40인 주택가에서 시속 60로 달리다 카메라에 찍힌 사람이 있었다. 그는 총 100만원을 내고 1개월 운전면허 정지를 당하더라.”

 

그 말을 듣고서 제가 말했습니다. “스위스도 교통범칙금이 센 나라군요.” 이 목사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스위스 사람들은 그걸 살인 행위라고 본다. 주택가 골목에 아무도 없었다. 다른 차도 없고 보행자도 없었다. 그런데도 제한속도를 어기면 살인 행위라고 보더라.”

 

고개가 갸우뚱해지더군요. 그건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와 율법의 사회가 아닐까. 이어지는 이 목사의 설명에 저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더라.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아니라 딱 한 사람 말이다. 그 하나의 생명을 전부처럼 여기더라.”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말입니다. 적지에 있는 일병 하나 구하려고 많은 군인이 투입되고, 그들 중 많은 이가 죽었습니다. 아무리 손가락을 꼽으며 더하기·빼기를 해봐도 답이 안 나왔습니다. ‘하나 구하려고 여럿이 죽었는데, 그게 뭐야? 결국 손해잖아.’ 그게 저의 셈법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대한민국의 셈법일 겁니다.

 

생각해 봅니다. 만약 30만원, 50만원, 100만원짜리 주차위반 스티커를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속이 뒤집어질 겁니다. 5만원짜리 스티커가 날아와도 마음이 그렇게 쓰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인과 영국인, 또 다른 유럽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기에는 하나의 생명을 지키자는 공감대가 있는 겁니다. 하나의 생명이 뭐냐고요? 바로 나의 생명이자 너의 생명입니다. 내 자식의 생명, 가족의 생명, 이웃의 생명, 모두의 생명입니다. 그걸 지키기 위해, 그걸 존중하기 위해, 그걸 살리기 위해 30만원짜리, 50만원짜리 스티커를 받아들인 겁니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주택가 골목에서 시속 60로 달린 차를 살인 행위라고 봤으니까요.

 

이 목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자문했습니다. ‘좁쌀 하나에 수미산이 들어간다. 하나의 생명을 지킬 때 모든 생명이 지켜진다. 국가는 그럴 때 개조된다.’ 나도 몰랐던 나의 살인 행위. 그걸 고치기 위해 우리는 얼마짜리 스티커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중앙일보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4대 종교에 묻다1이재철 100주년기념교회 목사

 

[세월호 아픔과 치유]

"나도 하나의 생명, 너도 하나의 생명 뼈저리게 깨달아야"

 

◀이재철 목사는 우리 사회에는 하나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다. 참사가 나도 수치와 규모를 따진다. 하나의 생명이 소중함을 모르면 제2, 3의 세월호 참사를 피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8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이재철(65) 목사를 만났다. 지난해 전립선암 수술 후 그는 30여 차례 방사선 치료도 받았다. 회복 중인 그와 교회 구내식당으로 갔다. 간만에 식당을 찾은 이 목사를 보자 교인들은 웃었다. 활짝 웃었다. 한 여성 교인이 오더니 이 목사 가슴에 꽃을 달았다. “오늘 어버이날이잖아요.” 제육볶음과 상추·풋고추가 놓였지만 이 목사는 간소하게 식사했다. 문밖에서 쳐다보는 교인들의 눈빛이 5월의 햇살보다 따스했다. 사랑받는 목회자, 영성의 눈을 가진 목회자. 그에게 세월호의 아픔과 치유를 물었다.

 

- 이 참사의 뿌리가 뭔가.

 

제가 보는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 그건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우리 삶의 태도다. 그걸 바꾸지 않으면 제2, 3의 세월호 사고가 또 터질 수밖에 없다.”

 

- 한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면.

 

스위스에 3년간 머무른 적이 있다. 아홉 살 때 한국에서 스위스로 입양 간 분이 있었다. 그가 하루는 자기 집 가까이에서 속도위반을 했다. 제한속도가 시속 40인데 시속 60로 달렸다. 한국에서 그 정도면 양호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 한 사람의 교통위반 때문에 제네바시에서 교통위원회가 소집됐다.”

 

- 그 한 건 때문에 말인가.

 

그렇다. 이유는 간단했다. 주택가 이면도로에서 시속 20나 초과한 것은 거의 살인행위라는 거였다. 교통위원회에서 회의 끝에 처벌이 내려졌다. 범칙금 600스위스프랑에 1개월 운전면허 정지였다.”

 

- 처벌이 무겁다.

 

그뿐만 아니다. 제네바시 교통위원회를 소집하는 데 들어간 비용 400스위스프랑까지 추가로 내야 했다. 그런 범법 내용을 처리하는 데 시민이 낸 세금을 쓸 수 없다는 게 시의 입장이었다. 당시 1000스위스프랑이면 약 100만원에 해당됐다.”

 

- 교통법규라는 약속을 어긴 데 대한 처벌인가.

 

아니다. 이건 약속을 어긴 게 아니라 살인행위라고 본 거다. 위반 당시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생명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가만히 생각해 봤다. 왜 이런 식의 접근이 가능할까. 그건 스위스가 한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이기 때문이었다. 운전자 자신이 한 생명이듯이 보행자도 한 생명임을 알면 그렇게 과속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2년 전에 이 목사는 아프리카 르완다에 갔다. 르완다는 내전으로 1994년 석 달간 약 80~100만 명이 학살된 나라다. 후투족이 인구의 85%, 투치족이 14%. 벨기에 식민지 당시에는 소수인종인 투치족이 후투족을 통치했다. 독립하자 인종분쟁이 일어났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후투족 대통령이 암살됐다. 르완다는 내전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갔다. “수도 키갈리 인근에 성당이 있었다. 지금은 학살기념관이 돼 있다. 거기서도 똑같은 메시지를 만났다.”

 

- 성당이 왜 학살기념관이 됐나.

 

당시 학살을 피해서 투치족 주민 5000명이 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때 성당은 손대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 성당의 성직자들은 모두 후투족이었다. 신부들의 묵인하에 후투족이 성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5000명을 학살했다. 지금도 그때 죽은 희생자의 두개골과 옷들이 전시돼 있다. 그 성당의 강대상에 새겨진 글귀가 제 가슴을 때리더라.”

 

- 어떤 글귀였나.

 

“‘네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알면,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무슨 말인가. 너 자신이 사람인 줄 알고, 나도 사람인 줄 네가 알면,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는 얘기다. 내 생명이 천하만큼 소중한 줄 알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천하만큼 소중하다. 세월호도 똑같다. 나도 하나의 생명이고, 너도 하나의 생명이다. 우리 모두가 이걸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는 이걸 일깨우기 위한 부활의 계기가 돼야 한다.”

 

지난해 6월 이 목사는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암이다. 12군데 조직검사 중 11군데서 암세포가 나왔다는 의사의 전화를 받고서 이 목사가 던진 첫마디는 감사합니다였다. 어떻게 그런 답이 가능했을까.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생각해 봤다. 암은 내 삶의 길벗이더라. 죽음의 길벗을 내 몸에 넣고 사는 거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나는 더 겸허하게 살다 갈 수밖에 없다. 죽음은 퇴장인 동시에 새로운 등장이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는 어둠도 역사한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비친다. 검은 칠판이라야 하얀 백묵이 또렷하게 보인다. 남아있는 시간 동안에 암세포가 제 몸에 있는 생명의 세포들이 더 생명답게 살다 가도록 해주지 않나. 그걸 아니까 감사하더라.”

 

-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아픔이 크다.

 

누가 100만원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내일 당장 집이 넘어간다. 그때 100만원을 주면 된다. 그럼 문제가 풀린다. 그런데 100만원이 없을 때, 혹은 주고 싶지 않을 때 사람들은 위로한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 또 햇볕 들 거야라고. 그게 인간의 위로이고, 인간의 치유다. 수많은 사람이 조문하고, 분향하고, 위문품이 간다고 위로가 되고 힐링이 되겠나. 그렇지 않다. ‘그래, 내 자식은 조금 빨리 갔는데, 이 아이들을 토대로 대한민국의 모든 행정이 바뀌기 시작할 거야.’ 그런 걸 깨달을 때 위로가 된다. 종교가 있든 없든 절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섭리를 깨칠 때 위로가 된다.”

 

- 그래도 자식을 잃은 상실감은 크지 않나.

 

중학교 3학년 봄방학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디로 가셨는가. 정말 궁금했다. 나중에 깨달았다. 내 속에 계시더라. 세월호 참사로 자식 잃은 아픔은 또 얼마나 크겠나. 그런데 사라진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내 속에 있는 거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 있다. 15년을 함께했다. 그 아이가 사라졌다. ‘어디로 갔니? .’ 내 속에 있는 거다. 15년 세월 속에서 내게 준 기쁨, 내게 준 감동과 함께 내 속에 있는 거다. 그걸 깨달으면 이제 내 속에 있는 그 아이와 함께 살아가게 된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때 뭔가 다른 해답이 나오는 거다.”

 

=백성호 기자

 

이재철 목사=1949년 부산 출생. 성공한 사업가로 지내다 늦깎이로 신학대에 들어갔다. 1988년 주님의교회를 개척했고, 약속대로 10년 임기가 끝나자 사임하고 스위스로 훌쩍 떠났다. 3년간 스위스 제네바 한인교회를 섬겼다. 2005년부터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한국의 신학생이 가장 만나고 싶은 목회자로 꼽힌다. 저서로 사명자반』 『사도행전 속으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의 대담집 지성과 영성의 만남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