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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큰헤이드 호를 기억하라 (Remember Birkenhead!)

풍월 사선암 2014. 4. 22. 11:46

세월호 선장 이준석,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

 

세월호 선장 이준석 씨가 승객보다 먼저 탈출해 비난을 받고 있는 가운데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영국 해군 수송선인 버큰헤이드호는 지난 1852년 남아프리카로 항해 중 케이에프타운 66km 전방에서 암초에 부딪쳐 침몰했습니다.

 

사고 당시 탑승객 630명이 있었지만 버큰헤이드호에는 60명씩 수용할 수 있는 구명보트가 3정뿐이었습니다. 이때 선장인 시드니 세튼 대령은 여성과 어린이부터 태울 것을 명령했고 병사들에게 부동자세로 갑판에 서 있을 것을 지시했습니다.

 

세튼 대령 명령에 병사들은 끝까지 부동자세로 움직이지 않았고, 여자와 아이들은 3척의 보트에 나눠탔습니다. 결국 대령을 비롯한 군인들은 버큰헤이드호와 함께 수장됐습니다.

 

이후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은 각종 해상 사고에서 불문율이 됐습니다. 한편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19일 세월호 선장 이준석 씨, 3등 항해사인 박모 씨, 조타수 조모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각각 발부했습니다.

 

 

버큰헤이드 호를 기억하라 (Remember Birkenhead!)

 

영국에는 국민 모두가 긍지를 가지고 지켜 내려오는 전통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버큰헤이드 호를 기억하라는 말을 나누는 것이다. 항해 중에 재난을 만나면 선원들이나 승객들은 서로서로 상대방의 귀에 대고 조용하고 침착한 음성으로 버큰헤이드 호를 기억하라라고 속삭인다.

 

해양국가인 영국의 해군에서 만들어진 이 전통 덕분에 오늘날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이 죽음을 모면해왔다. 일찍이 인류가 만든 많은 전통 가운데 이처럼 지키기 어려운, 또 이처럼 고귀한 전통도 아마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이는 실로 인간으로는 최대한의 자제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18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해군의 자랑으로 일컬어지고 있던 수송선 버큰헤이드 호가 사병들과 그 가족들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를 향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630명으로 130명이 부녀자였다. 항해 도중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으로부터 6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해상에서 배가 바위에 부딪쳤다.

 

시간은 새벽 2. 승객들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선실에는 대번에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다. 부서진 판자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 그 사이를 벌벌 기어 갑판으로 나가려는 사람, 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그때 파도가 밀려 배가 다시 한번 세게 바위에 부딪쳤다. 배는 이제 완전히 허리통이 끊겨 침몰되어가고, 그 사이 사람들은 가까스로 배의 뒤쪽으로 피신했다. 이들 모두의 생명은 이제 문자 그대로 경각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선상의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신병들이었고 몇 안 되는 장교들도 그다지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사관들이었다.

 

남아 있는 구조선은 3척밖에 없었는데 1척당 정원이 60명이니까 구조될 수 있는 사람은 18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더구나 이 해역은 사나운 상어가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반 토막이 난 이 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물속으로 가라앉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풍랑은 더욱더 심해져갔다. 죽음에 직면해 있는 승객들의 절망적인 공포는 이제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승객들은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사령관 시드니 세튼 대령은 전 병사들에게 갑판 위에 집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수백 명의 병사들은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마치 아무런 위험이 없는 듯 훈련을 할 때처럼 민첩하게 열을 정돈하고 나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동안 한쪽 편에서는 횃불을 밝히고 부녀자들을 3척의 구명정으로 하선시켰다. 마지막 구명정이 그 배를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사병들은 사열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구명정에 옮겨 타 일단 생명을 건진 부녀자들은 갑판 위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마침내 버큰헤이드 호가 파도에 휩쓸려 완전히 침몰하면서 병사들의 머리도 모두 물속으로 잠겨들었다. 얼마 후에 몇 사람이 수면 위로 떠올라왔다. 용케 물속에서 활대나 나무판자를 잡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날 오후 구조선이 그곳에 도착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436명의 목숨이 수장된 다음의 일이었다. 사령관 세튼 대령도 죽었다. 목숨을 건진 사람 중의 하나인 91연대 소속의 존 우라이트 대위는 나중에 이렇게 술회했다. “모든 장병들의 의연한 태도는 최선의 훈련에 의해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누구나 명령대로 움직였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명령이라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모두 잘 알면서도 마치 승선 명령이나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이 사건은 영국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버큰헤이드 호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기념비가 각지에 세워졌다.

 

이전까지는 배가 해상에서 조난될 경우 저마다 제 목숨부터 구하려고 큰 소동을 벌이고는 했다. , 힘센 자들이 구명정을 먼저 타고 연약한 어린이와 아녀자들이 남아 죽어야 했다. 여자와 어린이가 먼저라는 훌륭한 전통이 1852년의 버큰헤이드 호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이후 죽음 앞에서도 명예롭고 의연하게 혼란을 축소함으로써 여자와 어린이는 물론 수많은 인명을 살려낸 것이다.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