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엄마는 비로소, 내일을 궁금해하셨다

풍월 사선암 2013. 12. 10. 09:12

엄마는 비로소, 내일을 궁금해하셨다

 

300일 동안 50개국 세계일주 한동익·태원준 母子

 

환갑을 넘긴 어머니가 젊은 아들에게 물었다. "엄마랑 단둘이 해외여행 갈래?" 300일 동안 50개국 세계일주를 한 한동익(61·신창제일교회) 태원준(31) 모자(母子)의 소식을 듣고서다. 아들의 답은? '내가 미쳤어?'였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들의 여행이 그만큼 낯설어서다. 올해 여름과 가을 모자의 여행기 '엄마, 일단 가고봅시다' '엄마, 결국은 해피엔딩이야'가 연이어 발행됐다. 수만권이 팔렸다.

 

한씨는 만인의 어머니로부터 시샘을 받고 있다. 아들로부터 환갑 기념 세계여행을 제안 받은 '엄마'가 또 어디 있으랴. 어머니는 아들의 선물을 기꺼이 받았다. 어쩌면 이 선물은 30년 동안 자식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보답이다. 태씨 역시 만인의 아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 여행은 어머니에게 '인생의 쉼표'가 됐다. 두 사람을 최근 서울 여의도 본사 1층 카페에서 만났다.

 

'가느냐, 마느냐'에서 '간다' 선택

 

어머니는 30년 동안 경기도 안산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식탁이 7개뿐인 작은 식당이었어요. 메뉴엔 만둣국도 있고. 하루라도 문 닫는 날 없을 정도로 일했어요. 그렇게 안 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어요." 2008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2011년 친정어머니마저 노환으로 소천했다. 딸 윤미(32)씨는 환갑을 맞은 어머니에게 세계여행을 권유했다. 아들은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채근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 나이에 세계일주라니. '경비와 일정은 우리가 다 준비하겠다. 엄마는 시간만 내면 된다'고 설득했어요. 용기를 냈어요. 다들 저나 아들에게 대단하다고 하는데 차이는 별 것 아닌 것 같아요. '가냐, 마냐'에서 '가냐'를 선택하고 실행한 것뿐이에요. 누구나 갈 수 있어요. 어느 집 어머니나, 누구 집 아들이나 다!"

 

지난해 216일 인천 제2국제여객터미널.. 몸무게 42160어머니와 60180아들, 깡마른 모자가 배를 타고 중국 산둥성 항구도시 칭다오로 향했다. 영하 1520도 속 대륙의 칼바람이 모자를 맞았다. 장기 여행을 위해 비용을 아껴야 했다. 칭다오에서 베이징으로 이동할 때 가장 낮은 등급의 좌석 '잉쮜(硬座)'를 탔다, 14시간 동안. 90도 각도의 의자에 입석 승객까지 계속 밀려왔다.

 

14일보다 긴 14시간이었다. 베이징에 도착해 처음 '' 곳은 24시간 패스트푸드점 맥도날드. 값싼 숙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차를 기다려 숙소 밀집 지역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야시장 왕푸징 거리에서 양꼬치를 우적거리기도 하고 천안문 광장을 거닐기도 했다. 어머니도 아들도 배낭여행의 소소한 재미에 빠져들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베이징 천단공원 산책. 공원 한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중국인들이 군무를 추고 있었다. 아들은 왈츠 추는 할아버지, 화려한 스텝을 자랑하는 여사들을 찍다 어머니 '한 여사'를 발견했다. 어머니가 노랫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아들은 셔터를 마구 눌렀다. '내가 엄마와 함께 여행하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엄마가 노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버스로 청두에서 리장으로 이동하는 23시간은 논스톱 롤러코스터 놀이기구 같았다. 엄마는 아들에게 고백한다. "엄마는 살면서 처음으로 내일이 궁금해지는구나." 아들은 속으로 되뇐다. '그녀도 어머니가 되기 전 내일을 꿈꿨을 텐데 자신을 내려놓은 채 누나와 나만을 위해 살았구나. 어머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어버이날 007작전, 태국서 딸 상봉

 

어머니는 여행하는 동안 항상 기도했다. '하나님, 아들과 저의 여행에 동행해주세요. 이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과 건강을 허락해주세요.' 모자는 410명이 함께 머무는 도미토리에 자주 투숙했다. 리장 숙소에서는 2층 침대가 있었다. 하필 150거구의 사내가 아들이 누운 자리 바로 위를 차지했다. 어머니는 밤새 기도했다. 침대가 무너지지 않게 해 달라고.

 

태국은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 가장 고온인 5월을 지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더위를 먹었다. 기력을 잃고 제대로 먹지 못했다. 두 사람의 몸무게는 합쳐서 95. 여행 중 몸이 축난 거다. 어머니는 "김치가 먹고 싶다"고 울먹였다. 마트에서 일본식 절임 김치를 겨우 구했다. 노점에 사온 돼지고기 꼬치와 함께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싸 먹었다. 아들에게 "우리 한국 가면 보쌈부터 사먹자"면서.

 

어머니가 먼저 잠든 밤. 아들이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가늘게 뜬 눈 앞에 나타난 딸, 윤미. "엄마! 나야!" 어머니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른다. 이름하여 남매의 어버이날 '특급 007작전.' 딸이 어버이날에 맞춰 휴가를 낸 것이었다. 한씨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딸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윤미랑 팔짱 끼고 같이 쇼핑도 하고, 아이스커피도 마시고"라고 했다.

 

이전까지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아껴야 오래 여행할 수 있다며 생수까지 마다했다. 가족은 예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아들은 놀랄밖에. 딸만 어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다고 느낀다. 딸은 가방에서 김치, 즉석 떡볶이, 라면 등을 마구 쏟아낸다. 세 사람은 숙소 작은 화장대에서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었다. 최고의 만찬이다. 어머니는 에너지를 충전한 것 같았다.

 

여행 98일째. 비행기 한번 타지 않고 7차례 국경을 넘어 30여곳의 도시를 지나 동남아 대륙 최남단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100일 만에 창이국제공항에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가기 위해 처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았다. 아들은 일단 기사가 부르는 가격의 31 정도로 깎는다. 한 대, 두 대, 세 대를 보낸다. 지칠 대로 지칠 무렵 택시에 올랐다. 어머니는 화난 표정이다.

 

"엄마, 왜 그래? 오늘이 우리 여행 100일째야. 우리처럼 행복한 모자가 어디 있어?" 돌아온 말은 "내가 지금 행복한지, 안 행복한지 네가 어떻게 알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들이 힘들까 지칠까 배려하며 짜증과 피로를 누르고 있던 어머니가 폭발한 것이다. 어머니는 지쳤던 것이다. "엄마가 태국에서부터 더워서 힘들었어. 돈을 아껴야 하지만 쓸 때는 쓰자."

 

아버지가 보낸 비행기? 외할머니가 건넨 자두?

 

아들은 미안해졌다. "엄마, 나도 할 말 있어. 엄마가 하고 싶은 걸 얘기해줘. 나한테 알아서 하라고만 하지 말고. 나는 슈퍼맨이 아니야.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어." 서로 솔직해지기로 했다. 어머니는 자카르타 뒷골목에서 8000원짜리 파마를 했다. 좀 쉬었더니 여유가 생겼다. 스리랑카 콜롬보. 어머니는 천진하게 어린이들과 신나게 지구봉 놀이기구를 탔다.

 

바닷가 해변에 앉은 모자. 한 청년이 다가온다. 어머니에게 손을 펴 보라는 시늉을 한다. 손을 폈다. 청년은 어머니의 손 위에 조개껍데기를 올려놓는다. 이집트 사하라 사막에서 석양을 바라봤다. 태양이 사라지자 반대편으로 초승달이 나타난다. 별이 쏟아져 내린다. 마침 아들의 생일이었다. 아들은 "제가 태어난 지 30년 만에 엄마와 함께 그 아름다움을 목도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이집트 다합에서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신청했다. 국경 심사가 혹독했다. 심사자는 온갖 질문 끝에 왜 어머니랑 여행을 하냐고 물었다. "여행이 어머니 환갑 선물이고, 환갑이 한국에서 어떤 의미이고, 어머니가 얼마나 신앙심 깊은지 숨도 쉬지 않고 말했어요." 겨우 심사를 통과했다. 진이 빠졌다. 어머니는 "신성한 여행이야. 너무 화내지 마렴" 하고 아들을 다독였다.

 

두 사람은 예수가 승천한 올리브산 정상에 올랐다. 어머니는 2000년 전의 성전 터 '통곡의 벽'에서 기도 제목을 적은 종이를 벽 틈에 넣고 기도했다. 예수가 부활한 곳에 세워진 성분묘교회에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아들은 가족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의 뒷모습을 봤다. 어떤 기도를 했는지 물었다. "아마 어머니라면 누구나 같은 기도를 할 거예요." 한씨는 아들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공항에서 모로코 카사블랑카로 가는 비행기. 웬일인지 승객은 이 모자와 다른 모자 3명뿐이었다. 전세 낸 것도 아닌데 텅 빈 비행기를 타다니. "제 인생 전체로 보면 여행은 찰나인데도 선물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하늘 가까이에서 받은 선물은 남편이 준 것일지도, 제 어머니가 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씨는 인증 샷을 여러 컷 남겼다.

 

전통가옥 수백 채가 보존돼 있는 터키 사프란볼루 시골마을 차르시. 어머니와 아들은 오래된 동네 돌담길을 슬슬 걸었다. "여긴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네." 멀리 담벼락에서 히잡을 두른 할머니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어머니에게 손짓을 한다. 할머니는 어머니 손 위에 자두 몇 알을 건넸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둔 것처럼. 아들은 어머니에게 말한다. "여기는 정말 외할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곳이네."

 

"행복을 60세까지 아끼지 마세요"

 

두 사람은 모로코부터 영국까지 40차례 카우치 서핑(Couch-Surfing)을 했다. 말 그대로 남의 집 소파를 파도타기 하듯 여행하는 것이다. 이방인을 초대하는 이를 호스트, 이용자는 서퍼라고 한다. 모자의 첫 호스트는 모로코의 환경운동가 필립 로더. 아들은 걱정됐다. "엄마, 불편하지 않아?" "불편하긴. 그동안 왜 이거 안했어? 남의 집 구경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계속 이렇게 여행하자!"

 

다정한 아들도 한눈판 순간이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였다. 아들은 음료수를 사기 위해 혼자 편의점을 찾았다. 그곳에 어린 미국 여배우 '캐서린 제타 존스'가 있는 게 아닌가.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 "당신은 이 부다페스트만큼 아름다우세요." 그녀가 혼자 여행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들은 ", 혼자예요"라고 했다. 맙소사. 로맨스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들은 두고두고 죄책감을 느낀다.

 

동유럽 에스토니아 탈린. 8개월 만에 최종 목적지에 도달. "엄마, 우리가 정말 해냈네." 어머니는 내친김에 '엄마' 아닌 ''로 서유럽까지 더 여행하길 원했다. 아들은 누나에게 'SOS(조난신호)'를 쳤다. 자금이 왔다. 두 사람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솔렌튜나 교회에 갔다. 눈이 내렸다. 호스트 에릭 페스테리우스는 "첫눈이야. 반가운 손님이 온 걸 하늘도 아는 모양이야"라고 했다.

 

여행이 연장되면서 아들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경비가 한정된 상황에서 매 순간 돈을 아끼려고 머리를 쓰는 게 힘들었다고 한다. 유럽은 대학 시절 아들이 둘러본 곳이기도 했다. "저는 사실 마지막 두 달이 가장 힘들었어요. 여행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연장이 됐으니까."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힘을 냈다. 12월 여행의 막바지. 어머니가 에펠탑 앞에 섰다. "나 좀 만져 봐도 될까. 친구들한테 자랑하게." "엄마, 진심이야?" 어머니가 에펠탑을 쓰다듬었다. 바로 그때 거짓말처럼 에펠탑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매 정시 에펠탑 2만개 조명이 켜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여행은 300여일 만인 1210일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어머니는 현재 그림을 그리며 일상을 즐긴다. 서울의 호스트가 돼 서퍼를 맞는다. 아들은 여행 작가로 일한다. 어머니는 몸무게를 회복했고 아들은 10가량 늘었다.

 

남기고 싶은 말을 물었다. 한씨는 "젊은 친구들이 어학연수 대신 배낭여행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세상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예요"라고 했다. 태씨는 "외국인들은 인생의 100가지 행복을 1년에 하나씩 누리면서 사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60세까지 아꼈다 한꺼번에 누리려고 해요. 하지만 환갑이 되면 누릴 여건이 또 안 돼요"라고 했다. 모든 아들과 어머니에게 주는 조언같기도 하다.

 

2013,12,07 / 국민일보 강주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