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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의 전당, 시민회관 화재로 폐업

풍월 사선암 2013. 11. 3. 19:04

대중음악의 전당, 시민회관 화재로 폐업

 

'대중문화'의 시민회관에서 '고급문화'의 세종문화회관으로

 

시민회관 정면, 박정희의 사진이 걸려있다

 

세종로에는 유독 권위적인 건물이 많다. 다행히 조선총독부건물은 일제잔재를 이유로 해체되었고 행인을 째려보던 이순신 동상은 박정희의 퇴장과 더불어 철거되었지만 1978년 지어진 세종문화회관은 일본식도 한국식도 아닌 유럽식으로 그것도 엄청나게 육중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들어서 있다. 그것이 그렇게 지어진 이유는 군사정권하에서 지어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 사회에서 고급음악이라 불리는 클래식음악의 공연을 위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세종문화회관이 지어진 그 자리에는 원래 대중음악의 전당이었던 시민회관이 있었던 자리임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1969517, 시민회관에서 플레이보이배쟁탈 보컬그룹경연대회라는 이름으로 그룹사운드들이 모여 우승컵을 쟁탈(?)하기 위해 대결(?)을 벌이는 일종의 록페스티발이 벌어졌다. 이것을 보기 위해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어 광화문까지 긴 줄이 늘어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원래 3일간의 공연이었는데 몰려드는 청중 때문에 하루를 더 연장하여 4만여명(3천석을 하루에 4번 입장)의 청중이 관람했다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젊은 것들이 설치기 시작하기 전, 시민회관은 1961117일 개관한 이후 성인들을 위한 연극, 뮤지컬, 악극, 리사이틀 등 각종의 대중문화공연이 열렸다.

 

19621월 한국 최초의 뮤지컬 극단 예그린악단의 창단공연이 열렸고, 영화배우협회주최로 무대에 배우를 총출연시킨, ‘스타의 밤은 시민회관 연중행사중 가장 인기있는 무대이기도 했다... 각종 쇼단의 창립공연, 또는 신작공연의 막을 시민회관 무대에 올린 다음 지방무대로 옮겨가는 순서가 되었다. 지방 연예인들의 꿈은 서울 시민회관 무대에 서보는 것이었다... 19663월 패티김의 귀국공연무대인 패티김리사이틀이 화제를 몰고왔다. 이를 계기로 쇼공연에는 의례 ***리사이틀이라는 문구를 쓰는 것이 상례로 되어버렸다.

-야화 가요60년 창가에서 팝송까지-시민회관, 일간스포츠83.2.27, 황문평

 

1969년부터 젊은이들이 대중문화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자 시민회관은 당대의 첨단 유행음악으로 물결치기 시작했다. ‘플레이보이배쟁탈 보컬그룹경연대회는 해마다 열광의 도를 더해갔고 경음악평론가 서병후가 기획한 그룹사운드의 라이브 무대인 고고파티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소울과 사이키 사운드의 진수를 보여주는 무대였다.

 

◀1967년 독수리상 시상식이 열리던 시민회관 내부모습

 

통기타음악 쪽에서는 196912월 조영남이 리사이틀을 가졌고 19709월에는 후트내니고고고라는 한국 최초의 포크페스티발이 열려 젊은이들의 새로운 음악문화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이와 더불어 성인들의 음악도 중요하고 큰 무대는 모두 시민회관이었다. 매년 열렸던 10대가수시상식과 방송가요대상과 독수리상과 같은 각종 음악시상식도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하춘화 리사이틀, 윤복희 쇼 등은 새로운 성인음악을 보여주었고 트로트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른 남진과 나훈아는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19719월 인기가수 남진리사이틀, 10월에는 그의 라이벌 나훈아리사이틀이 열리면서 이들의 대결은 가요계에 회오리바람을 몰고왔다. 외국의 음악인들이 내한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시민회관과 같은 제대로 된 공연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냇 킹 콜, 팻 분, 플래터스, 빌리본악단, 아트블레키, 안 마가렛, 줄리엣 그레꼬, 클라우디오 빌라, 토니 달라라, 브라더스 포 등이 모두 시민회관에서 공연함으로써 한국의 청중들은 본토의 음악을 직접 감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민회관이 대중문화의 전당으로 영광을 누리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을 거친 건립과정이 있었다. 서울시가 1955623일 이승만 대통령 80회 탄신을 기념하는 한편 그의 찬란한 업적을 길이 빛내고자 80여명에 달하는 각계인사의 찬동을 얻어 이승만의 아호인 우남을 따서 우남회관 건립위원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면서 시민회관건립의 막이 올랐다. 건물의 총공사비는 당시의 화폐단위로 약 6억환 정도로 추정되었으며 건립위원회가 최대한 부담하고 나머지는 시제 및 국고보조로 충당키로 하고 1956620일 기공식이 이루어졌다.

 

엘리베이터가 갖추어진 10층짜리 탑실

 

예정대로라면 1958년 초쯤에 완공되어야 했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집권당인 자유당의 충성경쟁 차원에서 명명된 우남회관의 이름은 이승만 독재에 염증을 느껴가던 분위기속에서 민주당의 정치공세의 빌미를 주었다. 민주당은 시의회에서 우남회관의 건립불필요성에 대해 집단적으로 성토하여 예산집행을 막았다. 체면이 구겨진 자유당은 민주당 시의원을 매수하는 한편 이승만은 1957116일 자신이 우남회관이라는 이름을 원치 않는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겨우 공사는 재개된다. 그러나 초기 예상과는 달리 눈덩이처럼 불어난 공사예산이 두 번째 복병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시민회관은 1958년 말이 되어도 겨우 상량식만을 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공사가 늦어진 이유로는 첫째는 이 회관 설계 당시에 건립비 총액에 대한 정확한 계산을 하지 못했다는 점. 195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철근 시멘트 등의 기초자재도 국내생산이 안되어 모두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던 시대였으니 정확한 건립비 계산을 못했던 것이다. 둘째는 하늘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가앙등현상이었다. 연도초의 예산에 5억을 계상해도 집행에 옮길 때면 실질가액은 50%도 되지 않을 정도의 인플레가 진행되고 있었다. 셋째는 설계당시에 예상치 못했던 각종 시설비, 냉방시설, 2중회전무대, 실내장식비 등에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것을 공사를 진행해 가면서 새롭게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시민회관건립과 화재, 세종문화회관전사, 81

 

하지만 공식적으로 우남회관이 시민회관으로 대체된 것은 1960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사임함에 따라 서울시의회에서의 의결이 있었던 1960811일부터였다.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게 된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혁명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 준공에 박차를 가하여 착공된 지 만 5년만인 1961117일에 드디어 완공을 보게 되었다.

 

총공사비 20억환, 건물설계 이천승, 실내장식은 서울대학교 미대교수인 이순석에 의해 이루어진 이 4층 건물은 연건평이 2900평으로 당시 한국 최고, 최대의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냉방장치, 승강식 2층회전무대, 전자식 조명장치를 갖추었으며, 건물안에는 4층에 3003명을 수용하는 대강당, 2층에 350명을 수용하는 소강당이 있었다. 기념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종로에 면하는 동남모서리에 10층짜리 탑옥을 설계했는데, 정면을 네오클래시즘적인 기둥처리를 한 이외에는 이렇다 할 장식도 하지 않는 매우 모던한 이 건물이었다.

 

또한 각 층에 켜진 형광등은 서울의 야경에 새로운 정취를 부여하여 시내 최대의 명소가 되었다. 탑실의 1층부터 5층은 사무실, 6,7,8층은 전시실, 9층은 방송실, 10층은 물탱크로 설계되었다. 1961년 시민회관이 완공되었을 당시 세종로 주변에는 시민회관과 조선총독부 건물을 빼고는 이렇다 할 번듯한 건물이 없었음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야트막한 건물과 공사장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펼쳐진 세종로 한가운데 우뚝 솟은 시민회관은 그 자체로 한국의 문화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자존심과 같은 상징물이었다.

 

MBC10대가수청백전 도중 화재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시민회관 건물에 화재가 난 것은 1972122MBC-TV 10대가수청백전이 화려하게 전개되고 있던 오후 828분이었다. 시민회관 대강당 무대는 MBC 기술자들에 의해 휘황찬란하게 꾸며져 있었다. 가수쇼가 시작된 지 한 시간여가 지나 대강당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에 있을 때였다.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위에 가설된 조명장치가 터지면서 불이 붙었다. 주최측이 급하게 막을 내렸더니 그 막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온 강당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관람석을 꽉 차게 메워있던 3천여 관객 대부분은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나 주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다른 관객에게 밟히거나 무대 뒤 또는 옥탑 근처에서 근무중이던 사람들의 적지 않은 수가 질식 후 불에 타죽었거나 중상을 입었다. 사망 51, 부상 76명을 기록한 이 화재는 197112월에 사망 167명을 낸 대연각호텔 화재사건, 197411월에 사망자 88명을 낸 청량리역 옆 대왕코너 화재사건과 더불어 1970년대 전반기 서울시내 3대 화재사건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 화재가 진화된 것은 다음날 새벽 4시경이었다. 이 화재가 났을 당시 10층 옥탑 중 7층에서 서울시 기획관리실 예산과 직원들이 신년도 예산편성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상자를 확인하기 위해 올라가서 5층에 있던 관장실을 들여다보았더니 이남응 관장이 의자에 빳빳이 앉아 그대로 죽어 있었고 7층 사무실 앞에서는 예산과 직원 4명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3층에서 던진 아이를 소방관이 손으로 받고 있다

 

화재가 진압된 이후 화재의 원인규명 과정중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만든 건물임에도 시설물과 실내장식의 화려함에 비해 소방시설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적지 않은 돈이 투여되었지만 눈에 보이는 시설에는 투자하고 우선 급하지 않거나 잘 보이지 않는 곳에는 소홀히 한 시민회관은 탄생부터 대형사고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이것은 압축적 고도성장의 패러다임 속에서 외형을 키우기에만 집중하여 내부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적 현실을 단면적으로 보여준 것이었고 1990년대에 줄을 이었던 대형사고의 전주곡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그 이후 1978년에 그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지어지면서 공연장의 성격은 대중문화에서 고급문화로 바뀌어버린다. 이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가 한국 대중문화의 전성기였고 그 이후 1990년대가 되기전까지 대중문화가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사실과 일치한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대중문화에 굳게 닫혔던 세종문화회관은 조용필과 이미자 등 무시할 수 없는 대중음악가들에게 일부 문호를 개방하면서 선별적으로 대중음악공연을 유치하고 있다. 그러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리고 들어앉아 대상자를 간택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는 않다.

 

-김형찬  대중음악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