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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사태 후 만든 전경, 42년 만에 역사 속으로

풍월 사선암 2013. 9. 26. 17:28

김신조 사태 후 만든 전경, 4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최루탄·화염병이 날았다. 시위 막다 마주친 친구, 젊은이들의 아픔이자, 역사의 아픔이었다.

 

1990년대 중반 서울시내의 시위 현장에 배치된 전투경찰이 보호용 헬멧을 쓰고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시위대를 응시하고 있다.

 

시위 진압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전투경찰(전경)이 창설 4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5일 오후 서울 미근동 경찰청에서 마지막 전경(3211) 183명의 합동 전역식이 열렸다.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전경의 역사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되돌아봤다.

 

성난 군중이 돌과 화염병을 던진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엄숙한 기도문 같은 구호가 서울 상공을 뒤흔든다. 돌과 화염병이 야수(野手)의 송구처럼 날아오는 시위 현장. 우리는 그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시위대에 대응했다. 최루탄을 발사하면 시위대는 주춤대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금세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됐다. 우리는 진압봉을 휘두르며 그들을 쫓았다. 1980년대 화염병과 최루탄이 폭우처럼 내리던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때는 민주화 탄압하는 공공의 적

 

사람들은 우리를 전경이라고 불렀다. 정식 명칭은 전투경찰순경. 군 입대를 했다가 차출돼 경찰로 배치된 젊은이들이었다. 누구도 자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많았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엔 특히 그랬다. 시위 현장에서 전경과 시위대는 전투에 가까운 싸움을 벌였다. 최루탄을 쏘고 진압봉을 정신없이 휘두르다 보면 함께 캠퍼스에서 공부하던 친구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특히 87년은 잊을 수가 없는 해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갔다. 우리는 최루탄을 쏘아가며 그 들불을 꺼야 했다. 그해 69. 연세대 앞에서 시위를 하던 이한열(당시 21·연세대 경영학)군이 우리 중 누군가가 쏜 최루탄을 맞고 숨졌다. 당시 시위 현장에선 우리가 쏜 최루탄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속출했다. 우리의 강경 진압은 ‘87년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우리의 출생일은 7111. 사람으로 치자면 마흔둘 중년에 이른 나이다. 2013925. 우리는 42년간 명맥을 이어온 전경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마지막 전경(3211) 183명이 서울 미근동 경찰청 대강당에서 합동 전역식을 했다. 국방부와 경찰은 병역 감소를 감안해 20121월부터 전경 차출을 하지 않았다.

 

42년간의 전경 역사가 마무리되는 오늘, 전경이란 이름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앞서 말했듯 우리에겐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 민주화 투쟁 시대에 전경은 시위를 진압하는 게 임무였다. 그때 합법 시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조건 시위대를 막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강경 진압의 장면만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는 대간첩작전을 위해 창설됐다. 68년 북한군 31명이 청와대를 목표로 침투해온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계기가 됐다. 701231일 전투경찰대설치법이 공포됐다. 이듬해부터 군 입대자 가운데 일부가 전경으로 차출됐다. 이후 42년간 전경으로 복무하다 전역한 인원은 329266명에 이른다.

 

시대마다 우리의 역할은 조금씩 달라졌다. 70년대는 대간첩작전에 주로 투입됐다. 그때는 간첩이 자주 출몰했다. 75911일엔 전북 고창군 자룡리 해변에 나타난 무장간첩과 교전을 벌이던 김갑중(당시 21) 일경 등 전경 3명이 순직하기도 했다.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시위 진압이 우리의 주된 임무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타고 다니는 버스를 닭장차라고 불렀다. 그때 우리 처지가 꼭 그랬다. 우리는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닭들처럼 시위 현장으로 실려갔다. 그곳에서 성난 시위대에 맞서 최루탄을 쏘고 진압봉을 휘둘렀다. 어찌 보면 20대 청년 또래끼리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형국이었다. 대학생 시위대를 향해 대학생 전경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대학생 전경을 겨냥해 대학생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피아 구분이 모호한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도 전경도 목숨을 잃는 일이 적잖았다.

 

부산 동의대 시위 땐 화염병에 3명 순직

   

198953일 부산 동의대 사태 현장에서 시위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발생한 불에 타 숨진 경찰관의 시신을 경찰동료들이 옮기고 있다.

 

격동의 현대사는 우리에게도 위태로운 시간이었다. 지난 42년간 시위 진압이나 대간첩작전 등 임무를 수행하던 중 순직한 전경은 322명에 이른다.

 

8953일 부산 동의대 시위 현장에선 모성태 수경 등 전경 3명이 순직했다. 당시 학생 시위대는 전경 5명을 감금했고, 이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불이 나면서 참극이 벌어졌다.

 

훗날 동의대 시위 학생 46명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돼 보상을 받았지만 전경 순직자에겐 400만원 남짓한 보상금이 전부였다. 지난 4월에야 보상 절차가 제대로 이뤄져 유가족에게 각각 11400여만원이 지급됐다.

 

90년대 후반부터 돌과 화염병을 동원한 시위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이후 우리의 주된 임무는 경찰의 치안 업무를 보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도 우리가 시위 현장에 차출되는 일은 계속됐다. 사람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 위해,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위해 광장에 모였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 우리는 광화문에 닭장차로 차 벽을 만들어 시위대를 온몸으로 막아야 했다.

 

일부 시위대는 화염병 대신 쇠파이프와 죽창을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방패 하나로 버텨야 했다. 2006년에는 ·의경 부모 모임이 결성돼 시위대의 폭력성을 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도 우리를 향해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력 시위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전경이란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오늘, ‘전경=가해자’ ‘시위대=피해자라는 등식도 함께 사라질 수 있을까.

 

329266명 복무 어제 마지막 기수 전역

 

지난 42년간 전경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빠지지 않았다. 때때로 우리는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공공의 적처럼 비춰졌다. 하지만 그것은 법질서 수호라는 우리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불상사였다. 우리가 해 왔던 역할은 의무경찰순경(의경)과 직업경찰로 넘어간다. 군에 입대해 차출됐던 전경과 달리 의경은 처음부터 경찰로 지원해 21개월간 의무복무한다. 의경은 요즘 경찰공무원 취업에 유리하다는 이유 등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라고 한다.

 

우리는 군대에서 차출돼 경찰복을 입었고, 제대를 하면서 군복을 다시 입었다. 군인도 경찰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 그러나 우리의 소속이 어디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날 마지막 전경 전역식에서 이성한 경찰청장이 말했다. “전경대원들은 국가를 위해 불꽃같은 청춘을 바쳤습니다.” 대한민국 전경 42. 우리의 불꽃같은 영욕(榮辱)의 역사가 뒤안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