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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와 예술의 나라 ‘체코에서 온 편지’

풍월 사선암 2013. 9. 17. 08:08

맥주와 예술의 나라 체코에서 온 편지

 

물질은 넘쳐나지만 마음은 가난한 시대, 국가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윤택한 행복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저마다 처한 환경이나 생활 방식은 다르겠지만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만큼은 어디든 같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는 세계 곳곳의 행복한 삶들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그 속에서 행복을 대하는 자세와 노력을 배울 수 있겠지요. 이제부터 매달 함께 행복의 나라로 떠나는 겁니다.

   

프라하 구시청 벽의 천문시계와 틴 성당.

 

9행복의 나라: 체코

 

작정하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면 선뜻 초행길로 택하기 힘든 곳이 바로 동유럽이다. 동시에 다녀온 이들이 입을 모아 언젠가 꼭 다시 한번을 외치는 곳 또한 동유럽이다. 얼마 전 프라하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김규진(64) 교수였다. 드보르자크의 멜로디와 플젠 맥주의 유혹에 흠뻑 취해 올해로 25번째 체코 여행 중이라는 그는 체코 문화를 빛낸 인물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아지타 크라티우스 상을 받았을 정도로 이 나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의 시선과 발걸음을 따라 9, 행복의 나라 소식을 전한다.

 

Happiness 1 체코라는 인생의 선물

 

때때로 인생의 곳곳에 우연이라는 선물이 숨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뜻밖의 선물을 풀어보는 순간의 기쁨, 그것이야말로 행복이 아닐까. 김 교수에겐 체코와의 만남이 그랬다.

 

“1979년 정부에서 낸 국비 유학 공고가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공산권이나 동유럽권과 같은 특수 외국어 국비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전 전공이었던 노어가 아닌 체코어를 선택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공산권 국가로는 유학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차선책으로 가게 된 곳이 미국이었습니다. 첫 학기엔 미시간대학에서 체코어의 ‘ABC’를 배웠습니다. 이후 9년간 시카고대학에서 체코어와 문화를 공부했죠. 시카고는 프라하 다음으로 체코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여러 체코인 친구들을 사귀며 체코의 문학과 음악, 예술과 역사 등을 알게 됐고 사랑하게 됐습니다.”

 

마침내 1989, 체코슬로바키아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고 이듬해 김 교수는 체코 카렐대학교의 서머스쿨에 입학해 부족한 공부를 보충했다. 이후 매년 여름방학이면 체코행 비행기를 탔다. 연구년이었던 지난 2000년엔 1년간 프라하 체코 국립대학교인 카렐대학교 한국학과 교환교수로 한국어 초급 및 중급을 가르쳤다.

 

1 ‘프라하의 봄당시 많은 시민들이 희생당했던 역사적인 장소이자 현재 프라하의 최대 번화가인 바츨라프 광장. 2 체스케부데요비체의 프레미슬라 오타카라 2세 광장 앞에서 만난 신랑 신부. 3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마을 곳곳이 여행자들로 넘쳐나는 체스키 크룸로프.

 

시간으로 환산하면 3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체코에서 산 셈이네요. 지금도 프라하의 기숙사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답니다. 카프카가 일생 동안 프라하를 벗어나지 못했듯이, 한 번 인연을 맺으면 강렬한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은 곳이 바로 체코입니다. 플젠 맥주 향기가 저를 이끄는 건지, 밀란 쿤데라가 묘사한 에로틱한 분위기에 사로잡히는 건지, 모차르트나 드보르자크의 멜로디에 중독된 건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난 24년간 서울과 체코를 오가며 세월의 타임머신을 탄 듯 초현실적인 환상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Happiness 2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예술

 

제각각의 개성을 품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 그중에서도 중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체코다. 우아한 바로크 양식의 돔과 고딕식 첨탑들, 빛바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길을 걷다 보면 마치 중세의 시간 속으로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 연극에서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해 국제적인 언어로 통용시킨 극작가 카렐 차페크부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 그리고 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까지 체코 문학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가들의 대작들도 이들의 자랑이다. 체코인 특유의 향수와 정서를 잘 표현한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감성을 이어받아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카를교의 악사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

 

1체코의 가장 전형적인 르네상스 도시인 텔치의 전경. 2 체코를 대표하는 후기 고딕 양식의 성 바르보라 성당. 3 브르노 거리의 집시 연주자.

 

체코의 넘버원은 역시 음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8세기 유럽 사람들은 체코를 유럽의 컨서바토리(음악원)’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실제로도 프라하에서는 하루에도 30, 40여 곳에서 클래식 음악회가 열립니다. 대중가요는 말할 필요도 없고요. 18세기 말 모차르트가 코믹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비엔나에서 실패하고 프라하에서 크게 성공해 대환영을 받자, 프라하 시민들이 자기 음악을 좋아한다고 1년간 머물면서 오페라 불후의 명작 돈조반니를 작곡해 첫 공연을 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모차르트의 일생을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90%를 프라하에서 촬영했다죠. 개인적으로는 아내가 한국에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배우지 못한 성악을 배워 숲 속의 작은 음악회를 열었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했던 순간입니다. 푸치니, 모차르트, 드보르자크 등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들을 연습하던 중이었는데, 숲 속 조그마한 연못가에서 노래 연습을 시작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박수를 쳐주던 기억이 선하네요.”

 

Happiness 3 한 박자씩 쉬어가는 사람들

 

체코인들은 정확하고 완벽한 삶을 추구한다. 동시에 여유를 중요시 여긴다.

 

체코의 식당이나 카페, 술집에 갔을 때 바로 옆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는 웨이터를 보면 답답해 가슴을 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테이블의 주문을 받고 사라진 웨이터가 언제 다시 올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렇지만 목소리를 높이거나 손을 흔들며 웨이터를 부르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한꺼번에 주문을 받아서 전달하면 훨씬 빠르게 음식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적도 여러 차례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도착한 순서대로 주문하고 식사하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일을 하는 데도 그렇습니다. 체코인들은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기보다는 한 번에 한 가지씩 일을 하는 것이 불량률을 줄일 수 있어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성, 완벽성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주재원들이나 현지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체코인들이 게으르고 일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들을 지켜보면서 게으름과 무책임에 대한 기준이 우리와 다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체코인들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은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고 여깁니다. 이들에게는 정해진 규정 속에서 계약한 대로 업무 내용을 해내는 것이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는 행동입니다.”

 

현존하는 돌로 된 다리 중 가장 아름답다는 까를교. 다리 난간에 있는 30여 개의 조각상 자체만으로도 볼거리를 제공한다.

 

출근 시간이 빠른 만큼 퇴근 시간도 빠른 편인데 퇴근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이들의 삶에 가장 중요하고도 행복한 고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말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5일 내내 고민하고, 한 달간의 휴가를 위해 11개월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렇다고 시끌벅적한 이벤트를 벌이는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퇴근 후 일찍 집에 들어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생일 혹은 명명일(체코의 달력에는 각각의 날에 성인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태어난 날의 성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은데 명명일은 생일만큼이나 중요한 날이다)을 맞은 친구, 동료들을 축하하기 위해 집 근처 호스포다(체코식 선술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이 전부다.

 

이번 여름엔 프라하 근교에 위치한 동료 교수의 별장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정말 삶다운 삶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경험을 했죠. 별장에 도착한 순간 넓은 잔디와 꽃밭, 채소밭, 과수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그 모습에, 마치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2층에는 부부의 침대와 아이들의 침대가 있었고 지하 창고에는 와인과 감자, 과일들이 저장돼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습니다. 이웃 별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0세의 할머니 한 분이 매일 자전거를 타고,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고 계시더군요. 꽤 건강해 보였습니다. 여유가 묻어 있는 인자한 웃음이 인상적이었고요.”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독립을 하고 난 뒤부터 별장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국민의 60% 이상이 개인 별장을 가지고 있고, 친척들과 공동 별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삶의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밤낮으로 일만 하는 우리네 삶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습니다. 은퇴 후 이곳에서 자그마한 일자리를 구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이 시각에도 그날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네요.”

 

Happiness 4 흐르는 빵, 맥주

 

체코 하면 맥주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전 세계에서 연간 1인당 맥주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답게 체코인들의 식생활은 맥주로 시작해 맥주로 끝난다. 체코인들의 맥주 문화를 이해하면 체코인들의 관심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일상이 된 맥주는 체코인들에게 달콤한 행복이다. 실제로 프라하나 지방 도시의 선술집에 가면 하얀 거품이 철철 넘치는 맥주잔을 앞에 놓고 시간을 잊은 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저녁을 대신해 맥주를 마시는 일이 빈번하다 보니 맥주를 흐르는 빵이라고 부른다. 체코인들의 자유분방한 기질과 맥주의 궁합은 천생연분이다.

   

1 프라하 구시청 광장 앞에서 만난 청년들. 2 별장에서 만난 할머니와 함께. 3 영화와 음악의 도시 프라하.

 

특히 플젠 지방의 필스너 우르켈은 체코를 대표하는 맥주다. 밝고 투명한 황금색의 필스너는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홉의 쓴맛이 특징인데, 현재 우리가 마시는 라거 맥주의 대부분이 바로 이 필스너 공법으로 만들어졌다. 체스케부데요비체에서 생산되는 부드바이저 부드바는 미국의 버드와이저라는 브랜드의 시초가 됐다. 두 맥주 모두 3개월 이상의 자연 발효공법을 통해 맥주 본래의 맛을 유지한다.

 

플젠에 위치한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맥주 박물관은 15세기의 맥주 양조장에 위치하고 있어 맥주 제조 과정, 제조 도구와 그릇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 견학 후에는 생맥주를 시음할 기회도 있습니다. 바로 옆 공장에서 가져온 것이라 그런지, 분위기 탓인지 맛이 한결 신선했습니다. 지하 전시실에는 수많은 복도와 지하 창고, 우물 등으로 이어진 미로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창고는 14세기에 만들어져 시 중심부까지 연결돼 있는데, 플젠 시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20139월호 / 글김지윤 기자 I 사진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