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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의 깨달음

풍월 사선암 2013. 9. 10. 10:22

석가의 깨달음

 

석가의 석가의 원래 이름은 싯다르타 고오타마이며 기원 전 624년경 오늘의 네팔 지방, 남쪽 갠지스 강의 여러 지류가 흐르는 비옥한 평야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카필라 성의 왕자로 태어났다. 흔히 말하기를 싯다르타 왕자는 시내에 나갔다가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 몹시 늙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 죽은 사람 등을 만나, 사람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 문제를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였으나 도저히 그 의문을 풀 수가 없어서 29세가 되던 해 왕자로서의 안락하고 화려한 생활을 집어던지고 출가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싯다르타 개인의 사정이었고 그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인 환경이 또한 그를 출가하도록 더욱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카필라 성은 코살라 국이라고 하는 강력한 나라와 이웃해 있는 한 작은 자치지역으로 싯다르타의 아버지를 정반왕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통치자를 의미하는 군주가 아니라 한 행정구역의 우두머리라는 뜻일 뿐이다. 코살라 국은 카필라 성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오고 있었다. 싯다르타가 어렸을 적에 공격해 온 일도 있었고 싯다르타가 출가하여 사문(沙門)으로 있을 때 카필라 성은 코살라 국에 결국 통합되고 말았다. 생각이 깊은 왕자의 몸으로 자기 나라에 닥쳐오는 불길한 징조를 보며 그는 나라의 운명과 직결된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그 문제만으로도 깊은 고뇌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집을 나온 뒤, 카필라 성과 아버지의 문제는 잊어버리고 사람이면 누구나 다 겪어야 하는 근본적인 인생의 고뇌를 해결해 보려는 생각으로 여러 곳을 전전하며 이름난 선인(仙人)들을 만나보았으나, 그들의 가르침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나 고행의 길을 걷는다. 6년여 동안 계속된 이 고행이 얼마나 철저하고 힘겨운 것이었든지 갈비뼈는 무너진 헛간의 서까래 같았고 머리 가죽은 덜 익은 채 잘려져 햇빛과 바람에 말라버린 조롱박처럼 쭈그러들었다.”고 싯다르타 자신이 회상한다. 그러나 이 지독한 고행도 숙명적인 인간 고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싯다르타의 염원을 이루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극도로 쇠약해져 거의 죽음 직전까지 다다른 싯다르타는 수자타라고 하는 소녀한테서 우유죽을 얻어먹고 가까스로 다시 기운을 차린다.

 

이런 일이 있고 얼마 후에 보드가야라고 하는 장소의 아사타 나무 아래서 명상에 잠겨 앉은 채 밤을 새우고 새벽 샛별이 떠오를 때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35세 때의 일이다.

 

그렇다면 싯다르타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을까?

 

여러 경전과 전설이 전하는 것을 종합하여 미루어 생각해 보면 석가는 결국, “이 세상에 궁극적 실체, 즉 신() 같은 것은 없고 사람이나 짐승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는 죽으면 끝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정말로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전해오는 여러 경전들의 내용이 똑같지가 않다. 가장 믿을 만 하다고 생각되는 설에 따르면, 석가는 12가지 인연, 즉 연기(緣起)의 도리를 꿰뚫어 깨달았다고 한다. 모든 것이 서로 의존적으로 존재하며, 영원하고 불변하고 항구적인 것은 없고 사람에게도 영원히 영속하는 영혼 같은 것이나 자아(自我)와 같은 절대적인 실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三法印)이 그것이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항상 변화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영원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의 깨달음을 얻은 경지)이다. 여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은 괴로움일 뿐이다.” 라고 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하여 4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항상 변화하고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諸行無常)고 하면서 영원한 자유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일까?

 

아무튼 석가는 깨닫고 나서 그 사실을 일반 백성들에게 말을 하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하고 매우 걱정되었을 것이다. 태어나서는 예외 없이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고통을 면할 수가 없는 운명의 사람들에게, 또 강자로부터 박해와 착취를 당하며 끝없는 가난과 질곡에서 허덕이며 아무 희망도 없이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장 서러움을 받는 밑바닥 사람들에게 인생은 한번 죽으면 끝이고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경전을 보면 석가는 깨닫고 나서도 50일 동안이나 깊은 명상에 잠기며, 인간 운명의 이 맹랑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인가 하고 몹시 고민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도저히 그 내용을 이해할 것 같지 않아서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는 기록이 있다. 석가의 깨달음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는 화엄경에도, 석가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주저했다고 전한다. 너무나 어려워서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어려웠던지 석가의 제자 중에서 지혜가 가장 뛰어났다는 사리불(舍利弗), 신통력이 제일이라는 목건련(?)이라는 제자조차도 석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어째서 석가의 깨달음을 설명하는 말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어쩌면,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지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실망스러운 이야기를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설법을 시작하고서도 그 내용이 일정하지 않아서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또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에 맞게 설()했다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나중에 불교의 사상이 다양하게 변화 발전하게 된 것도 당초 석가의 대기설법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의 사상을 보아도 석가는 무슨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은 불교의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실체의 존재와 그 존재를 인식하는 주체까지도 철저히 부정하는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는 아마 최초의 실존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현실문제에 대하여 철저하게 파고들었으며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운명적으로 겪어야하는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라고 보았다. 그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 사성제(四聖諦)라고 하는 고집멸도(古集滅道). 즉 모든 고통의 근원은 욕심에 집착하기 때문이요 이 집착을 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석가는 살아있을 때, 현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형이상학적 공론(空論)이나 신(), 또는 죽은 다음의 세계 같은 추상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유명한 석가의 독화살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석가에게, “이 우주는 끝이 있습니까? 아니면 끝이 없이 무한한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석가의 대답이, “어떤 사람이 갑자기 날아온 독화살에 맞았다고 하자. 그럴 때 그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그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 왔는지를 살피는 것? 아니다. 그러면 누가 그 화살을 쏘았는지를 알아내는 것? 아니면 어떤 종류의 독이 묻었는지 알아보는 것? 그것도 아니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가장 급히 해야 할 일은 먼저 그 화살을 몸에서 뽑아내는 일이다.” 라고 대답을 하더라고 한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은 이 인생의 끝도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이지 그런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 “그러므로 미혹된 어리석음도 없고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끝내 늙고 죽는 것을 벗어나는 것도 없으며, 괴로움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도 없고 괴로움을 없애는 일도 없으며, 팔정도(八正道)의 길도 없느니라.” 라고 이 세상 모든 것이 공(), 그 자체라고 한다. 즉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여기서 색()이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라고 한다. 즉 이 세상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숙명처럼 피할 수 없는 고통, 즉 생, , , , (生老病死)의 고통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석가의 가장 근본적인 고민이었고 그래서 왕자의 신분을 뿌리치고 집을 떠나 설산(雪山)을 헤매며 고행을 했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이 세상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고통을 벗어나서 열반(涅槃)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었다고 하지만 그 고통을 벗어나는 길이란 모든 집착(執着)에서 벗어나는 것, 즉 욕망을 버리고 닥쳐오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불행을 그냥 담담하게 받아드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집가고 장가가서 아이를 낳아 기르며 돈을 벌어 살림을 꾸려 가야하는 평범한,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무 욕심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글쓴이 / 신경용 재캐나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