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가업에서 길을 찾다
조직문화 안 맞아 힘들어하던 아들 아버지의 양복점에서 훨훨 날다
세기테일러 윤인중 원장 & 윤일석 대표 父子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세기테일러’는 ‘대통령의 양복점’으로 불린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의 양복을 제작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해 정재계 숱한 명사들의 맞춤 양복을 제작했다. 세기테일러는 반세기의 역사를 안고 있다. 윤인중(70) 원장이 ‘세기양복점’ 간판을 내걸고 시작한 것만 헤아려도 44년째다. 이곳에는 한국 맞춤양복 흥망성쇠의 역사가 흐른다. 명동과 청계천 인근에 즐비했던 맞춤양복점의 부흥기와 테일러숍의 97%가 문을 닫을 정도의 위기, 그리고 최근 다시 명품으로 부활하는 조짐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살아남았다.
세기테일러 역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6년 전 당시 서른 살이었던 아들 윤일석(36) 대표가 합류하면서다. 경영학도인 그는 4년간 회사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가업에 몸을 던졌다. 암홀(armhole) 깊이가 낮고, 옷깃이 넓고, 바지통이 넓었던 맞춤양복 스타일은 아들이 들어오면서 확 달라졌다. 통이 넓지 않아 몸의 곡선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나폴리 스타일의 양복이 주를 이루게 됐다. 자연스럽게 고객층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6년 전까지만 해도 고객의 80%가 60대였는데, 지금은 뒤바뀌었다. 고객의 80%가 20~40대다. 윤인중 원장과 윤일석 대표 부자를 지난 7월 초 세기테일러에서 만났다. 인터뷰 시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원래 결혼 시즌이 아닌 7~8월은 비수기인데 예복으로 일찌감치 준비하는 30대 고객이 많아져 손이 달린다고 했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양복 한 벌 제작 기간이 3~4주였으나 요즘엔 고객이 늘어 6~7주가 걸린다고 했다. 직원을 추가 채용하기도 어렵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만들기에 10년 이상 경력의 숙련된 장인이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는 인터뷰하기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신중해도 너무 신중했다. 질문 하나를 하면 3초 침묵은 기본이었다. 3초 후 내놓는 답변은 담백했다. 군더더기나 과장이 없었다. 부자가 만들어내는 양복 스타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자는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아버지는 재단과 바느질을, 아들은 상담과 디자인을 주로 맡는다. 패션 정보와 유행을 담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젊은 남성 패셔니스타들과 소통하는 것도 아들의 큰 역할이다. 블로그에 담긴 윤 대표의 전문성을 보고 이곳을 찾는 경우도 꽤 있기 때문. 어머니는 전화와 경리를 담당한다. 가내수공업이나 다름없다.
일본이나 유럽에는 수대에 걸쳐 가업을 이어오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이쑤시개 제조회사 ‘사루야’는 9대 290여년 동안, 연필 제조로 시작한 독일의 프리미엄 필기구 ‘파버 카스텔’은 8대 250여년 동안 가업을 이어오며 발전적으로 존속했다. 명품 브랜드 ‘제냐’는 4대째, 세계 3대 핸드메이드 남성 정장복으로 꼽히는 ‘체사레 아톨리’도 가족 기업으로 유명하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가업 승계를 영광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은 아니다. 사농공상의 잔재가 남아있고 성공의 잣대가 천편일률적인 한국에서 가업 승계는 장려할 만한 덕목이 아니었다. 최근 20~30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걷히는 듯하다. 세기테일러의 윤일석 대표처럼 가업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경우가 하나둘 늘고 있다. 세기테일러를 찾는 젊은 고객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으니 얼마나 영광이냐?”는 반응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다져놓은 토대가 있는 데다가 DNA까지 물려받았으니 다른 어떤 일보다 성공 확률이 높다.
윤일석 대표가 처음부터 합류하기로 한 것은 아니다. 자타공인 맞춤양복계의 개척자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윤인중 원장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아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막았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 시절의 맞춤양복점은 지금과는 달랐다. 윤 원장의 말이다. “나는 좋아서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호구지책이었다. 요즘 들어 수제구두, 수제양복 등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명품 수준으로 격상됐다. 그러나 기성복이 일반화되기 이전 맞춤양복점은 열악한 산업군 중 하나였다.” 아들에게는 좋아하는 일을 맘껏 하게 하고 싶으셨냐고 묻자 짧게 “그렇다”라고 답했다.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돌아볼 겨를 없이 달려온 70년의 생. 아들에게는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경험을 해 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윤 원장은 아들에게 무엇을 하라고도, 되라고도 강요하지 않았다.
아들이 가업에 눈을 돌린 것은 2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다. 이전까지 그는 아버지 바람대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서른 살 들어 합류했으니 먼 길을 돌아서 온 셈이다. 그는 “이 일이 그 어떤 일보다 훨씬 즐겁다”며 “천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해서 한 우물만 팠으면 어땠을 것 같냐고 묻자 “지금 걸어온 길이 좋다”고 했다. “다양한 경험을 한 후에 왔으니 아쉬움이 없다. 만약 한우물만 팠다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컸을 거다. 늦게 합류해 기술적으로는 좀 늦지만 다른 면에서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들이었다. 경영에도 도움이 된다.”
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있는 그는 손을 꼼지락거리는 걸 좋아했다. 프라모델(Plastic Model의 일본식 표현) 조립이 취미였고, 취학 전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다. 아홉 살 때에는 자동차 엔진 소리만 듣고도 차종을 척척 알아맞히는 정도였다. 자동차 전문 잡지 구독이 취미였다. 막연히 자동차 관련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 윤 원장은 “얘가 워낙 차에 관심이 많아서 자동차 정비소를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라며 웃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인문계를 택했다. 직업 선택의 폭이 넓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건국대 경영학과를 다니면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전단지 돌리기, 퀵서비스, 교내 관재팀 재산목록 조사 아르바이트, 자전거숍에서 수리 등. 졸업 후에는 LCD 관련 회사에서 기획과 회계 업무를 맡았다. 성실하고 치밀한 그는 회사 업무도 즐겼다. 그러나 점점 지쳐갔다. 일 자체보다 조직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다니면 다닐수록 회사 체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식 자리에 가면 술을 잘 마시거나 분위기를 휘어잡거나 해야 하는데 나는 둘다 어려웠다. 또한 윗분들을 보면서 ‘저 모습이 내 미래인가’ 곰곰 생각해 보면 답이 안 나왔다.”
그즈음 결정적인 두 가지 계기가 생겼다. 하나는 한국의 맞춤양복 시장을 폄하한 한 패션칼럼니스트의 글을 읽고서다. 윤일석 대표는 “그 글이 아버지에 대한 폄하의 글로 읽혔다”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일을 직접 도운 적은 없지만 늘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1970~1980년대 ‘월간복장’이라는 잡지에 아버지가 제도 작품을 연재하셨는데,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작품이 가장 월등했다. 늘 아버지가 최고라고 생각해 왔다. 한국 맞춤수트에 대한 험담의 글이 아버지에 대한 험담으로 읽혔다.” 그때부터 맞춤양복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 2007년 초 백화점 매장에 진열된 한 벌의 명품 수트에 눈이 멎었다. ‘저거다’ 싶었다. 멋졌다. 탐났다. 마네킹 몸의 선을 따라서 자르르 흘러내리는 수트는 하나의 예술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저런 수트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마침 수제양복이 명품 시장으로 옮겨가면서 부활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아버지 역시 아들을 설득할 명분이 보였다. 윤 원장은 “테일러가 뜬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 3대 명품 수제양복은 브리오니, 키톤, 체사레 아톨리다. 셋 다 이탈리아 브랜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탈리아 사람과 비슷한 면이 많다. 취향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고 솜씨도 비슷하다. 최근 한국에서도 맞춤양복에 관심이 많은 젊은 남성이 확 늘었다. 옷감과 디자인 등에서 전문가가 깜짝 놀랄 정도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도 많다. 대학 졸업생들이 나를 찾아와 옷을 배우겠다고 한다. 고무적인 현상 아니냐. 한국은 앞으로 명품 양복 시장의 전망이 밝다. 이 사람(아들 윤 대표)은 나를 닮아 손재주가 있는 데다가 해외에서 유행하는 패션도 꿰고 있으니 나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2007년 하반기부터 세기테일러에 합류한 윤일석 대표. 처음부터 대표 직함을 달았다. 윤 원장은 “책임감 좀 느끼라고 했지”라며 슬며시 웃었다. 세기테일러에 합류한 그는 무섭게 패션 공부에 돌입했다. 패션의 역사, 이론, 잡지 등 관련 서적을 쌓아놓고 읽었다. 600만원짜리 맞춤수트 체사레 아톨리도 맞췄다. 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좋아하던 자동차 구조를 공부하며 부품을 조립하듯이 인체의 구조를 공부했고 옷감을 해체하면서 연구했다.
아버지 윤 원장은 유복자다. 그는 ‘아비 없이 자랐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어려서부터 예의를 목숨처럼 여겼다. 지금도 그는 형을 만나면 깍듯이 큰절을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인성을 강조했다. 내내 ‘정직해라. 뭐든 열심히 하라. 작은 돈을 모아서 크게 써라’라고 가르쳤다. 누구나 다 아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가르침들. 하지만 평생 이런 말을 듣고 자란 아들은 정직을 최고의 재산으로 꼽는다. 재산 맞다. 세기테일러의 고객들은 정직한 부자의 모습에서 큰 신뢰감을 느끼니 말이다.
윤인중 원장의 TIP
가업 계승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❶ 공무원보다 더 안정적인 직업, 가업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 하나는 공무원과 교사다. 안정적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다. 가업은 공무원보다 더 안정적인 직업이다. 공무원은 정년이 있지만, 가업은 정년이 없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 바로 가업이다. 윤인중 원장은 70세에도 여전히, 아니 점점 더 정교해지는 장인의 손놀림으로 현장을 지킨다.
❷ 계승에 대한 부담감을 주지 마라
가업 계승에 대한 부담감을 일찌감치 주면 반감이 생길 수 있다.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책임감과 행복도가 높아진다. 만약 다른 길을 원하면 가 보게 해라. 그 또한 가업 계승에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다. 다른 길에 좀 오래 머물더라도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줘라.
❸ 부모가 하는 일의 가치를 꾸준히 알려라
스스로 가업을 선택하게 하려면 가업 계승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 부모가 하는 일이 대단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꾸준히 알려야 한다. 윤일석 대표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남색 벨벳 정장을 맞춰주었다. 웅변대회 출전 의상이었다. 그때 입어본 아버지의 옷에 대한 느낌은 강렬했다. 왕자가 된 기분이었고 그 옷을 입고 출전한 웅변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❹ 가업은 성공 확률이 높다
포춘지가 발표한 세계 500대 기업 중 35~40%가 가족기업이다. 미슐랭, 홀마크, 뉴욕타임스, 피델리티, 에스티로더, 월마트, 이케아 등이 대표적. 왜 가족기업이 강할까. 가족 고유의 가치관과 명예를 중시하기 때문에 투명경영을 지향하고, 단기 이익에 급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멀리 내다보고 투자할 수 있다. 일단 다져놓은 토대가 있는 데다가 그 분야의 DNA를 물려받은 것도 성공 요인.
❺ 가업의 목표는 성장이 아니라 존속
가족 기업이 성공하는 이유 중 하나는 돈에 큰 욕심을 내지 않고 품질을 꾸준히 지켜가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품질을 고수하다 보면 돈은 저절로 모인다. 100~200년 역사를 이어가는 일본이나 유럽의 가족기업 오너 상당수는 “우리 기업의 목표는 성장이 아니라 영속”이라는 경우가 많다.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즐기듯 하는 것이 가족기업 성공의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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