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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한 소녀팬들 ‘속옷’ 벗어던진 이대강당

풍월 사선암 2013. 4. 12. 22:32

흥분한 소녀팬들 속옷벗어던진 이대강당

 

시민회관·이대 강당

 

나의 공연장 관람은 1980년대 초 MBC 대학가요제의 열풍과 더불어 시작됐다. 보기만 해도 멋져 보이는 형님들의 간지나는 그룹사운드 연주에 흠뻑 매료됐다. 최고의 멋쟁이처럼 보였던 피버스, 터프한 매력의 활주로, 건반을 객석 쪽으로 보이게 놓고 떡 주무르듯 주물러댔던 사막오장의 무대만 해도 심장이 뛰었는데 2부의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사랑과평화의 무대는 환상적이었다. 도리구찌모자를 멋지게 눌러쓴 건반주자 김명곤, 핑크색에 반짝이가 장식된 기타를 한몸처럼 연주했던 최이철, 동그란 파마머리에 감색 반짝이 옷을 입고 연주하던 베이스 주자 등은 노는 물부터 달랐다. 대학 그룹사운드들이 보릿자루처럼 그냥 서서 연주한 반면 사랑과평화는 음악에 맞춰 유연한 몸놀림을 보여주며 음악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1회 공연을 마치고 나자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스태프들이 장내의 청중을 몰아낼 때 화장실에 숨었다. 숨어서도 재입장 상황을 살폈다. 빨리 뛰어가서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후에는 자연히 기타와 사랑에 빠졌다. 변변한 기타악보도 없던 시절 최고의 스승은 실력자가 등장하는 공연이었다. 빈손이지만 내 손은 계속 기타연주를 따라 하느라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지금은 서울의 공연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만, 1970년대와 80년대는 공연장이 귀했다. 하물며 1960년대는 어떠했을까. 그 시절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본다.

 

1995년에 케이블 TV가 생기기 전까지 외국 음악인의 공연을 라이브로 직접 본다는 것은 음악 마니아들에게는 마치 관음보살 친견과도 같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외국 톱스타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 스타가 일본에 왔을 때였다. 기왕 일본까지 왔으니 한국으로 초대하면 비용이 여러 면에서 절감되니 성사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와는 다른 음악적 감동과 청중의 열광이 있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외국의 음악인이 수준 높은 공연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수익이 보장될 만큼 규모가 큰 공연장이 극히 드물었다. 궁여지책으로 영화관을 공연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 가장 컸던 대한극장이 2000석이었는데 1963년에 미국의 스탠더드팝 가수 패티 페이지가 여기서 내한공연을 했다.

 

시설과 규모를 갖춘 공연장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1961년 완공된 서울 세종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던 시민회관이었다. 4층의 강당건물과 10층의 탑실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이천승 교수가 네오클래시즘 양식으로 설계했다. 3000석 규모의 객석에 냉난방시설과 시차 없이 무대를 교체할 수 있는 2중 회전무대를 갖춘 첨단 시설의 공연장이었다. 완공 당시 세종로에 별다른 높은 건물이 없을 때 야간에 이 건물 10층 탑실까지 형광등을 모두 밝힌 장관만으로도 수도 서울의 랜드마크였다.

 

◀왼쪽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화재로 사라지기 전 시민회관 전경(현 세종문화회관 위치)

 

시민회관에서 가장 먼저 내한공연을 한 음악인은 이베트 지로라는 프랑스 샹송가수였다. 1962929일 그녀는 무대 위에서 당시에 최고의 히트곡이었던 한명숙의 노란샤쓰의 사나이를 한복을 입고 나와 한국어로 불러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1960년대 한국에서 가장 많이 내한공연을 한 음악인이 샹송과 칸소네 계열이다. 샹송과 칸소네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일본을 통해 한국에 유입돼 수준 높은 대중음악으로 사랑을 받았다. 1950년대 한국에서 현인, 송민도 등이 샹송을 번안해 부르면서 여전히 인기를 얻었다. 샹송과 칸소네는 비교적 점잖은 음악으로 한국사회의 검열을 통과하기에 별문제가 없었기에 내한공연의 단골 메뉴가 됐다.

 

1961라노비아가 태풍급 히트를 기록했다. 이 곡의 대히트로 유명했던 칸소네 가수 토니 달라라가 1969(시민회관), 칸소네의 여왕이라 불렸던 밀바가 1971(이대강당), 1972(시민회관), 1974(이대강당)에 한국에서 잇따라 공연했다. 샹송가수로는 줄리엣 그레코가 1969(시민회관), 실비바르탕이 1977(시민회관)에 공연했다.

 

미군부대의 담을 넘어 한국사회에 가장 무난하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음악은 스탠더드팝이었다. 1950년대부터 한국 스탠더드팝의 디바였던 패티김의 예명이 미국의 스탠더드팝 가수 패티 페이지의 이름을 딴 것으로 봐도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스탠더드팝 가수로 시민회관에서 가장 먼저 공연을 한 사람은 미국의 흑인가수 냇 킹 콜이었다. 때는 1963. 그는 흑인이지만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기가 높았다. 한국의 최희준이 그를 모델로 허스키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의 노래를 불렀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흑인이 아닌 백인 스탠더드팝 가수가 내한공연을 한다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그것도 팻 분처럼 사월의 사랑’(April Love), ‘모래 위에 쓰여진 사랑의 편지’(Love Letters in the Sand)와 같은 대중적 히트곡을 지닌 가수라면 공연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3000석의 시민회관을 능가할 장소는? 당연히 정상적인 장소는 없다. 그 대안이 장충체육관이었다.

 

◀장충 체육관(역사적 흔적 보존된다.)

 

8000석 규모의 돔지붕을 가진 장충체육관을 1963년 필리핀의 기술자들이 와서 지었다는 사실을 알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계발계획이 성과를 드러내기 전인 1960년대 한국의 경제수준은 미국의 원조를 제대로 받았던 필리핀보다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역시 미군의 지배를 받았던 필리핀은 대중음악의 수준 또한 높아서 적어도 1970년대 전반기까지 한국의 나이트클럽에서 필리핀의 악사들이 한국 악사들의 밥그릇을 위협했다. 팻 분은 1966년 그의 아내와 네 딸들까지 함께 손을 잡고 장충체육관 무대에서 공연했고 1970년 두 번째의 내한공연 때는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다.

 

이후로도 시민회관은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공연들을 소화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1969년부터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플레이보이컵쟁탈 보컬그룹경연대회는 한국 록음악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중요한 공연이었다. 여기서 데블스라는 무명의 록그룹이 해골의상으로 분장하고 시체를 넣은 관을 끌고나와 청중들을 경악시켰던 사건이 벌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신중현이 자신의 야심찬 사이키델릭밴드를 무대에 올려 환각조명과 현란한 댄스와 몽롱한 사이키데릭 음악으로 한국 록음악의 정점을 찍었던 곳도 시민회관이었다.

 

그런데 시민회관은 1972년에 122일 화재로 영영 사라지게 된다. 한 방송사 연말 시상식인 10대가수쇼가 열리던 도중이었다. 가수쇼가 시작된 지 한 시간여가 지나 대강당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에 있을 때였다.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가설된 조명장치가 터지면서 불이 붙었다. 주최 측이 급하게 막을 내렸고 그 막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온 강당이 불길에 휩싸였다. 관람석을 꽉 차게 메웠던 3000여 관객 대부분은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주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다른 관객에게 밟히거나 무대 뒤 또는 옥탑 근처에서 근무 중이던 사람들은 적지 않은 수가 질식 후 불에 타죽었거나 중상을 입었다. 사망 51, 부상 76명이라는 참사로 드러난 사실은 이 건물이 외부의 화려함에 비하여 소방시설 같은 것은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민회관이 화재로 사라진 뒤 대안으로 떠오른 공연장이 이화여대 강당이었다. 대학강당이라 시설은 부족했지만 좋은 교통여건과 4000석이라는 규모는 시민회관을 대체할 만했다. 미국의 스탠더드팝 가수 브랜다 리(1967), 빌리본 악단(1967), 영국의 아이돌가수 클리프 리처드(1969), 샹송가수 밀바(1971),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 밴드였던 벤처스(1975, 1979)의 공연이 열렸다.

 

◀내한공연이 자주 열렸던 이화여대 강당 전경.

 

이화여대 강당이 한국대중문화사에 기록적인 사건을 맞이한 순간은 바로 1969년 클리프 리처드 공연 때였다.

 

처음에는 시민회관에서 하루공연으로 계획됐지만 표가 매진됐다. 열화같은 팬들의 요청으로 이틀을 더 연장해 이대 강당에서 공연이 이어졌다. 공연 날짜가 다가오자 초조해진 쪽은 서울의 여고들이었다. 많은 여고들은 비상을 걸어 클리프가 도착하는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중간고사를 보게 했다. 몇몇 학교는 학생지도부 교사를 공항까지 파견하기도 했다. 특히 전교생이 클리프의 팬이다시피 한 정신여고에서는 교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저녁 늦게까지 학생들을 교내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여학생들이었지만 학교 측에서 뜨거운 피가 끓는 청춘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고, 그들의 열기는 공연장에서 분출돼 급기야는 한국 대중문화사에 미증유의 사건을 만들어냈다.

 

소녀 팬들이 공연에 열광해 클리프 리처드에게 속옷을 벗어던졌다는 풍문이 그것이다. 현재에도 이런 일은 인터넷 검색 1위에 오를 일인데 과연 44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에서 당시의 모든 기록을 조사했다. 당시 리본을 단 사과와 마스코트, , 복조리, 액세서리 등을 던졌고, 클리프가 땀을 흘리자 손수건들이 날아들었다는 기록으로 확인됐다.

 

1960년대 한국사회의 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수준 높았던 시민회관의 건물과 시설은 1950년대 전쟁의 참화를 막 벗어나 국가적 자존심을 문화적 자존심으로 대체해보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필리핀의 기술원조로 지어졌던 장충체육관은 공연장소로는 미흡했지만 국내 스타디움 공연의 시초였다.

 

김형찬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