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탐욕의 종말

풍월 사선암 2013. 3. 17. 08:11

 

안분지족(安分知足)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모습.

* 安()편안하다, ()분수, ()알다, ()만족

 

분수에 편안해하고 만족함을 알다.

자기 처지를 탓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 안분지족의 도를 지키며 살기란 쉽지 않다.

 

탐욕의 종말

 

인간은 누구나 욕심을 가지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모든 인간행동의 동기는 자기의 욕구를 극대화 하려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은 본래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물이며 사람의 욕심이나 욕망 욕구는 그 끝이 없다고도 했다. 불교에서는 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색욕 등 오욕을 인간의 태생적 욕구라고 한다. 그리고 가치중립적 기준에서 그것이 지나치다고 여겨지거나 눈살을 찌푸릴 만큼 넘쳐 천박하게 여겨질 때 탐욕이라고 정의한다. 탐욕은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커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을 짓밟고 누르며 일어서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한정된 파이를 두고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면 작금의 사회현상처럼 양극화가 심화되고야 만다.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게 가진 자는 더 가진 자의 탐욕에 달걀을 던지며 분노를 한다. 젊은 시절의 열정이 있는 순수한 욕망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이 들어 부리는 노욕은 경계해야 할 욕심 중 가장 큰 것이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욕심을 끊을 수는 없지만 반니원경은 참으로 나쁜 마음 중에도 노욕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전한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든다는 것과 세상에 나이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나이가 들면 신체적 기능의 퇴화에 대한 염려보다는 인지능력과 판단력, 분별력이 떨어져 절제가 안 된다는 점이 노욕을 우려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죄악 중에 탐욕보다 더 큰 죄악이 없고, 재앙 중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없고, 허물 중에는 욕망을 채우려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만족할 줄 알면 인생이 즐거운데 그놈의 노탐과 노욕이 뭐길래 인생 말년을 망치곤 하는가. 그래서 인생 일흔 줄에는 항상 자제와 절제, 모든 일에 지나침이 없어야 하지 않던가. 노욕과 노탐 버릴 때 우리는 존경받고 우러르는 원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전 팔순을 눈앞에 둔 한 원로정치인의 몰락이 아침신문의 헤드라인을 검게 장식했다. 어떤 이는 `드디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마침내'라고 말한다. 표현만 다를 뿐 두 단어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판단력이 흐려져 국민의 눈에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국민의 지지로 탄생한 정치지도자들의 탐욕은 언젠가는 사회적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탐욕에 몰입하는 바람에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일까?

 

명예를 한손에 거머쥐고도 모자라 또 다른 한 손에 부패의 고리를 든 채 우왕좌왕하고 섰던 한 노정치인의 몰락은 안쓰럽다 못해 추잡하기까지 하다.

 

남보다 웬만큼 누렸으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볼 여유도, 진작에 전도유망한 후진에게 길을 열어줄 줄 아는 아량이 필요했다. 삶을 통해 땀으로 일군 것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 한쪽 손은 비워 두었다가 그간의 경험을 살려 후대를 위해 회고록이라도 쓸 아름다운 생각은 왜 못했는지 안타깝다.

 

경륜을 가진 한 노정객의 염치를 모르는 행적을 보면서 탐욕을 채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의 부피만큼 탐욕을 치우는 데는 또한 그만큼의 고통이 따르는 것이 순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자(莊子)`노욕은 몰락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버릇이 고쳐지는 무서운 병'이라 했다.

 

-최돈열 강원다문화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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