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명상글

바람둥이 남자 / 허홍구

풍월 사선암 2013. 1. 26. 09:48

 

바람둥이 남자 / 허홍구

 

세월이 유수(流水) 같다는 말은 나이가 들고 보니 젊은 시절이 물 흐르듯 쉼 없이 빨리 흘러갔다는 뜻 아닌가? 내가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지만 나이가 60에 이르고 보니 더욱 실감나는 이야기이다. 세상이 바뀌어 이 나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현역에서 물러나 있지만 나는 아직도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생활에 큰 활력소가 된다.

 

누구는 이 나이가 되면 하고 있는 일에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 있거나 분에 넘치는 여러 개의 감투도 갖고 있던데 나에게는 오래전부터 이름 앞에 감초처럼 붙어 다니는 형용사가 있다. 물론 시인이나 수필가 혹은 홍보국장과 같은 것들이 간혹 이름 앞이나 뒤에 붙여서 불러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듣지 않는 곳에서 저희들끼리는 내 이름자 앞에 바람둥이란 형용사가 자주 붙어 다니는 모양이다.

 

하기야 내가 쉰 살 전에 며느리를 보고 손녀를 봤으니 옛날 우리가 흔히 했던 말로 일찍 까진 셈이다. 철없는 나이에 여학생과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일찍 장가를 보낸 것이겠지만 부모님의 속을 얼마나 태웠을까. 요즘 같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오래 전부터 내려온 도덕의 규범에 스스로 묶이고 만 것이다.

 

아버님의 엄중한 문책과 지시는 거역 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사나이가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지

 

간단한 이 말씀 한마디가 한창 공부해야 할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니 그때부터 주변에서는 나를 바람둥이로 불렀는지 모른다. 군대생활 3년 동안도 혼자 군가를 못 부르고 무리 속에 끼어 입으로만 흉내 내는 지독한 음치에다가 디스코나 사교춤은 더 더욱 할 줄도 모르고 신세대들이 말하는 몸짱도 아니고 여유를 부릴 만큼의 시간과 경제력도 없는 그저 그런 내가 전국적으로 소문난 바람둥이란 별명을 가졌으니 가히 놀라운 일 아닌가?

 

그러나 생각 해 보니 (물론 혼자 생각이지만) 나만큼 여자를 좋아하고 많이 아는 사람도 드문 것 같다. 물론 총각 시절에 이쁘고 사랑하는 여학생을 두고도 함부로 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손도 한번 잡지 못하고 아끼고 점잔을 빼다가 결국 그녀는 적극적인 친구의 부인이 되어버렸고 아들이 셋이나 있을 때인데도 남의 집 유부녀의 멋스러움에 빠져서 맘 변치 않고 평생을 살 수만 있다면 한 3년은 감옥도 갔다 올 수 있을 거라고 맘을 먹었으니 기가 찰 노릇 아니었는가?

 

지금도 전철을 타고 가다가 마주앉은 중년여인의 고운 잔주름과 잔잔한 눈 그늘 속에서 혼자 휴식을 취한다고 하면 남들이 믿어 줄는지? 죽은 듯이 있다는 말은 숨죽이고 있다는 뜻이지만 바람은 살아 있다는 몸짓이 아닌가? 내 이름 앞에 붙은 바람둥이란 말은 펄펄 살아 움직이는 사나이란 뜻이다 가까이 지내는 어느 여류수필가는 나를 두고 바람둥이 예찬이라는 글을 적어야겠다고 까지 했으니 굳이 부끄러워 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 생각만 해도 찌르르한 전류가 흐르고, 위로가 되고,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 남자의 감성을 자극하여 분발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고

       조용한 가운데 좀은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여인

    # 무작정 남자를 무장해제 시키고 허물어지게 하는게 아니라

       깨어 있게 할 줄 아는 센스 있는 여자

    # 상처를 입은 듯 연약해 보이고 허술해 보이면서도 완강함이 비치고

       쓰라린 과거를 가졌지만 은은한 미소 속에 오늘을 아름답게 채색하며 살아가는

       그런 기막힌 감각을 가진 여자 를 나는 오래 전부터 혼자 가슴에 묻어두고 산다.

 

사랑하는 이의 눈빛 속으로 발목 적시며 들어가 보면 조약돌 같은 사연을 읽어 낼 수가 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잘난 체 하지 않고 그 외롭고 쓸쓸한 자리에 함께 퍼질러 앉아 보라. 사랑하게 될 것이며 사랑 받게 될 것이다. 친하게 지내는 시인 권천학의 시()“시인 허홍구를 말하다를 덧붙이며 바람둥이 허홍구의 바람은 살아 있을 때까지 쉬지 않는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 할 것이다.

 

시인 허홍구를 말하다 / 권천학

 

비가 쏟아지는 날 천둥번개가 치면

지은 죄업 때문에 문 밖 출입을 삼가 한다는 남자

저놈 잡아라하고 찾아올 여자들 때문에

T.V 에는 절대로 출연을 못한다며 너스레를 떠는 남자

 

가슴이 펄펄 끓어서 찬물만 마신다하고

속이 달아 설탕을 먹지 않는다 하고

단물만 빨아먹고 뱉는 것이 싫어

껌을 씹지 않는다는 사람

 

목욕 할 때와 바람피울 때는

전화를 못 받는다며 예고하는 싱거운 사람

바람둥이란 소문이 있는데도

그의 애인이 누구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고

끊임없이 호감을 갖게 하는 중년남자

그는 늘 바람을 일으킨다.

 

참치 회는 좋아한다면서도

접시위에 꿈틀거리는 활어 회를 보고는

불쌍해서 못 먹겠다는 맘 약한 남자

앞머리가 많이 빠지고 술을 좋아하는 시인

그의 선한 눈빛에

수많은 여자들이 빠져 죽었다 

첨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