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명상글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 / 허홍구

풍월 사선암 2013. 1. 26. 09:32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 / 허홍구

 

마흔아홉에 며느리를 보고 쉰 살에 손녀를 봤으니 나는 어쩌다 젊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일찍 결혼한 탓인지 몸집이 좀 커보여서 그런지, 아니면 바람 탓인지는 모르되 나를 보는 사람들은 대개가 실제의 나이보다 네댓 살은 더 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전철을 타고 가다보면 가끔은 대학생들의 자리를 양보 받기도 하는 처지이고 보면 남들이 보기에도 젊지 않은 것만큼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 점잖아지는 게 아니라 힘이 빠지고 나면 저절로 점잖아지는 법이라 했었는데, 나의 가슴은 아직도 이토록 뜨겁고 어느 장소에 있든 멋있는 여인을 만나면 무슨 명화라도 감상하듯이 시선을 그쪽으로 집중시키기도 하고, 중년 여인의 그윽한 눈 그늘에서는 잠시 휴식을 취해 보기도 하는 판이니 보기에는 점잖아 보여도 실은 점잖은 게 아니라 큰 일 날 듯하다.

 

'점잖다'는 말은 혹 젊지 않다는 뜻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도 힘이 넘치면 점잖지 않다는 뜻으로 주책이라는 말을 곧잘 듣게 되는 것이다. 도덕을 강조하고 예의를 숭상하는 우리네 사회에 또 할아버지가 된 내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당찮은 얘기라서 남들은 미친놈이라 욕할는지는 몰라도 실은 없는 듯 하면서도 위로가 될 수 있는 내 가슴 가득한 비밀 사랑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오고 위로가 되며, 외롭고 쓸쓸할 땐 아무도 모르게 둘만이 만날 수 있는 집, 그 외진 골목길 끝 불 밝힌 창문 안에 둘만이 가질 수 있는 숨막히는 암호도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몸을 함께 하지 않아도 식어 가는 가슴에 불을 지피게 하고 생각만 해도 가슴 가득한 위안과 평안한 휴식처가 될 수 있는 그런 여인 하나 가슴에 꼭꼭 숨겨 두고 싶다. 때로는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되어 허물어지고 싶은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그런 연인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늙음이 주책으로 보여도 식지 않은 가슴으로 있게 해 준 여인, 남 몰래 찾아가서 석양지는 창가에 앉아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며 마주하고 싶은 여자, 일상의 업무에 지치고 피곤할 때 어깨를 대기도 하고 무릎 배고 누웠다가 몸을 내던져 버리고 싶은 여자, 남들이 유혹을 해도 굳은 지조로 살았지만 나를 허물어지도록 할 줄 아는 야한 여자, 그러나 무작정 남자를 무장해제 시키고 허물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깨어 있게 할 줄 아는 센스 있는 여자를 가슴속에 간직해 두고 싶다.

 

오스카 와일드는 '남자는 과거를 가진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미래를 가진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 나도 밝고 예쁘고 명랑하고 곱기만 한 여인보다도 언뜻언뜻 스치는 쓸쓸함이 있어 보이고 우수에 젖은 듯한 그리고 은은한 미소 저편에 나만이 알 듯한 과거를 가진 여자를 나는 좋아한다.

 

나는 멋없고 무드 없는 남자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무드는 저절로 펼쳐지는 게 아니라 여자의 빛나는 센스에서 연출되는 것이다. 센스있는 여자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포근한 가슴과 예절바름 속에 싱싱한 대화가 넘친다.

 

초생달 같기도 하고, 한여름 밤의 수박향기 같은 여자, 남자의 감성을 자극하여 분발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고, 조용한 가운데 좀은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여자, 어쩌면 나는 그런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상처를 입은 듯 연약해 보이고, 허술해 보이면서도 완강함이 비치고, 쓰라린 과거를 가졌지만 은은한 미소 속에 오늘을 아름답게 채색하며 살아가는 그런 기막힌 감각을 가진 여자를 내 가슴 은밀한 곳에 묻어두고 싶다.

 

문전옥답을 두고도 굳이 골짝 가시덤불 속을 찾아가는 것은 거기에 은밀한 나만의 보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은밀한 곳으로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끝내 허망하고 아픔이 되어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둔 연인 하나 있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하루 종일 전류를 흐르게 하고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가슴속에 대못 같은 응어리를 용해시키고 뽑아줄 수 있는 뜨겁고 보드랍고 연한 여자를 가슴에 그리며 산다.

 

죄의 달디단 축배 끝에 바람으로 쓰러져도 살아있는 날까지 불꽃이이고 싶다.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불꽃으로 남아 있음은 내 가슴속에 그리는 연인이 살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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