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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나팔소리 -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소 암살.폭발사건<제2부 수사>

풍월 사선암 2012. 10. 11. 23:34

운명의 나팔소리 -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소 암살.폭발사건

 

2부 수사

 

동일(同一) 숫법 전과자(前過者)의 범행(犯行)

 

우리 모두가 테러를 당했다』『이젠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아빠를 돌려달라』 『당하고만 있을 수야이런 표제들의 홍수, 정규 방송을 중단, 무거운 추모 방송을 5일간 계속한 텔리비전, 연일 이어지는 규탄 대회의 함성들. 물론 그 표적은 테러범이었고 그 테러범이 누구냐인가에 대해서는 전 대통령 이하 대다수 국민들이 폭발 사건직후 이미 결론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땐 물증을 찾기 전이지만 그와 비슷한 사건들을 수없이 겪어?한국인들은 본능적인 직관으로 저들이다!고 찍어버린 것이었다. 암살 폭발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국민들의 관심은 나날이 새롭게 밝혀지는 수사 과정으로 쏠렸다.

 

미얀마 정부는 사건 다음날 종교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5인 사문 위원회를 구성,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고 우리 정부도 이원경(李源京) 체육부 장관을 랭군으로 보내 현지 공관을 지휘, 미얀마 정부와 사태 수습에 임하도록 했다. 정부는 또 박세직(朴世直) 안전 기획부 차장을 반장으로 하는 13명의 폭파사건조사 요원을 현지로 파견했다. 아웅산 암살 폭파 사건은 교통 사고와 같은, 지뢰를 밟은 사고와 같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연구되는 꾸며진 사건이었다. 그런 만큼 이 사건의 전조(前兆)로 보이는 연쇄적 사태 발전을 이 사건 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나섰다. 이 사건은 가해자측의 행적을 추적, 분석할 때 일련의 전 단계 사건들이 진화, 발전해 오다가 이번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의 무대가 된 버마 또한 독소의 배양지구실을 할 만한 토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건의 발생을 예비하는 많은 불쏘시개를 갖고 있었다. 범인과 무대, 성냥과 인화 물질, 양쪽의 조건이 합쳐져 대참사로 폭발한 것이 이번 암살 폭파였던 것이다. 지난 68121일의 청와대 습격 기도 사건, 지난 706월의 동작동(銅雀洞) 국립 묘지 현충문 폭파 사건, 지난 925일의 대구(大邱) 미 문화원(文化院) 폭파 살상 사건과 이번 사건을 관류하는 공통된 숫법과 아이디어는 문외한이라도 퍼뜩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동일 숫법 전과자의 범행이었던 것이다. 현충문 폭파 사건70622일 발생했다. 6·25 20주년을 사흘 앞둔 이날 새벽 현충문 지붕 위에 수 미상의 무장 공비들이 올라가 폭발물을 설치하다가 그것을 잘못 다루는 바람?폭발, 무장 공비 1명이 즉사했다. 폭발물은 클레이모어 지뢰와 비슷한 것이었다. 수사 당국은 당시 무장 공비가 6·25기념일에 국립 묘지를 참배하는 박정희(朴正熙)대통령 등 정부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폭발물을 설치하려고 했던 것으로 분석했었다. 현충문은 충혼탑에 분향, 헌화하기 위해선 꼭 거쳐 가야 하는 곳이었다. 당시 박대통령은 6·25기념일에 국립 묘지를 참배하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었다.

 

 

현충문 사건과 아웅산 폭파 사건의 공통점은

범행장소와 대상

폭발물 설치 장소(지붕과 천장)

폭발물의 종류

폭발물의 폭파 장치(시한 혹은 원격조종) 등이다.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을 정문 현관 앞에 놓인 2개의 고성능 폭탄 중 하나가 터지면서 발견, 신고한 고교생이 죽고 문화원 앞부분과 옆건물 유리창이 크게 부서진 사건이이었다. 터지지 않은 폭발물을 조사한 결과, 시한 장치가 되어 있는 고성능임이 밝혀졌었다. 이 사건의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고 있다. IPU 총회를 앞두고 일어난 이 사건은 대남(對南)테러공작의 신호였는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이번 아웅산 묘소에서 발견된 폭발물과 대구사건의 폭발물이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동일 숫법 전과자 집단의 범행이라는 확신을 더욱 갖게 했다. 

 

순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석준(徐錫俊) 부총리

이범석(李範錫) 외무부 장관

김동휘(金東輝) 상공부 장관

서상철(徐相喆) 동자부 장관

함병춘(咸秉春) 대통령 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김재익(金在益)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이기욱(李基旭) 재무부 차관

이계철(李啓哲) 버마 대사

하동선(河東善) 해외협력위 기획단장

민병석(閔炳奭) 대통령 주치의

강인희(姜仁熙) 농수산부 차관

김용한(金容翰) 과기처 차관

이재관(李載寬)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중현(李重鉉) 동아일보 기자

한경희 경호원

정태진 경호원

 

부상자 명단

 

이기백(李基百) 합참의장

최재욱(崔在旭) 공보비서관

최상덕(崔尙德) 외무부 의전과장

윤국병(尹國炳) 한국일보 기자

송진혁(宋鎭赫) 중앙일보 기자

최규철(崔圭徹) 동아일보 기자

김기성(金基成) 연합통신 기자

김기석(金基石) 코리아헤랄드 기자

최금영(崔琴煐) 연통 사진부장

김상영(金相榮) 문공부 공보과

임삼택(林三澤) 문공부 공보과

김상태 경호원

 

증거 인멸 노린 소이탄 발견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의 범인들이 조직적이고 치밀한 범행을 계획, 실천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한 것이었다. 버마 수사 당국은 109일 오후부터 현장을 외부와 격리시키고 조사에 착수했다. 우선 무너져 내린 천장에서 폭탄이 장치되었음직한 곳을 뒤지다가 불발 폭탄 2개를 더 회수했다. 하나는 클레이모어, 다른 하나는 소이탄이었다. 이 소이탄이 만약 함께 터졌다면 섭씨 4천도의 고열이 현장의 모든 건물은 물론이고 사상자들의 몸까지 태워버려 원인 조사의 실마리를 거의 인멸해버렸을 것이다. 버마 수사 당국은 이틀 뒤 도착한, 박세직 안전 기획부 차장이 이끄는 한국측 조사반의 도움을 받아 이들 폭발물의 계보를 밝히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미얀마수사당국이 확보한 물증은 원격 조종용 전자 수신 회로 조종기 1, 일본의 히다찌사 제작의 폭발물 원격 조종용 건전지 16개 등이었다. 이 히다찌사 제작의 건전지들은 북괴의 대남 공작에 자주 쓰여 한국 대공 수사관들에겐 안면이 있는 것이었다. 불발탄의 신관(信管)을 조사한 결과, 이 역시 대구 미국문화원 사건 때 남아 있었던 불발탄, 최근 일망 타진되었던 월성 및 임진강 침투 무장 간첩들이 가지고 있었던 폭탄의 그것과 같은 종류임이 확인되었다. 천장에서 터진 폭탄은 클레이모로 밝혀졌는데 인명 살상에서 최대의 효과를 나타냈다.

 

단 한 발의 폭발로 20명이 죽고 47명이 다쳤다. 그것은 폭발물의 파편(또는 탄알) 확산 방향이 기막히게 정확히 우리측 수행원 대열 쪽으로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확산각(擴散角) 뒷편에 있었던 MBC 기자 등은 지근 거리에 있었는데도 조금도 다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폭발물을 장치한 범인들이 참배객들의 도열 위치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폭발물의 무서운 효율성과 정교성은 앞줄에 서 있던 장차관급 인사 중에서 이기백대장만이 중상을 입고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로도 설명이 되는 것이었다.

 

묘소 건물 트여져 폭발 피해 줄어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아웅산 묘소 건물의 구조가 사방이 바깥으로 터져 있었으므로 더할 참사를 그 정도로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묘소 건물이 밀폐돼 있었다면 엄청난 폭풍압으로 해서 고막 파열은 물론이고 내장 파열 등 치명적인 상처를 더 많은 사람들이 입었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그런 기술적 면에서 이번 암살 사건은 1944720일에 있었던 히틀러 암살 기도 사건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날 히틀러는 소련 육군의 대공세에 대비하기 위한 독일 국방군 수뇌 회의를 동프로이센의 총통 사령부에서 소집하였다. 이 회의장에 폰 슈타펜베르그 대령은 시한 폭탄이 든 가방을 들고 들어갔다. 그가 검색을 받지 않았던 것은 슈타펜베르그 대령이 독일 육군 참모 본부에선 신화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엘리트 장교로서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왼눈, 왼손을 잃었고 두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그래도 그를 예편시키지 않았던 것은 이 백작 출신 대령의 천재적인 참모 능력을 산 때문이었다. 그는 폭탄이 든 가방을 슬그머니 히틀러 다리 밑으로 밀어 넣고는 회의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회의장을 빠져 나왔다. 이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 슈타펜베르그 대령은 신관(信管)의 목 부분을 으스러뜨려 놓았었다. 그것은 조그마한 유리공에서 흘러 나오는 산이 용수철을 녹여 10분 뒤 격철(擊鐵)을 움직여 폭발토록 한 동작이었다.

 

슈타펜베르그 대령이 나간 뒤 다른 장교가 그 자리에 섰다가 발 끝에 부딪치는 서류 가방을 옆으로 옮겨 놓았다. 목제 탁자의 다리 부분 차폐물이 히틀러의 하체와 가방을 떼어 놓게 되었다. 1242분 폭탄은 작열했다. 지붕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마루바닥엔 큰 구멍이 뚫렸다. 4명의 장교가 즉사했다. 20명이 부상했다. 그래도 히틀러는 가벼운 화상만 입었을 뿐이었다. 왜냐? 첫째는 장교가 가방을 차폐물 뒤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회의가 목조 건물에서 열린 덕분이었다. 당초 회의는 지하 방공호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날씨가 더울 것 같다고 해서 목조 건물로 옮겼는데 이것이 히틀러를 구한 것이었다. 목조 건물의 지붕이 날아가면서 폭풍압의 김을 빼버렸던 덕분이었다.

 

폭약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아웅산 묘소에서 터진 폭탄이 원격 조종 시스템의 고성능 정밀 폭탄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폭발 진동을 1·6떨어진 위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면 TNT로 환산, 1t의 위력에 상당한다는 계산도 나왔다. 6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지난 7711월의 이리(裡里)역 대 폭발은 TNT 30t이 터진 사고였다. 그러나 묘소 천장에는 1t이나 되는 TNT를 설치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군사용으로 쓰이는 RDX, HMX 등 고성능 폭약을 사용했음이 틀림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원격 조종으로 보는 이유는 폭발 시각이 이계철 대사의 입장(入場)과 일치했기 때문.

 

이 대사는 버마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입장했고 먼저 도열했던 수행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교환했다. 그의 용모도 안경을 낀 것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멀리서 보면 전 대통령의 도착으로 오인하기 쉬운 점들이 많았다. 특히 때 이른 진혼 나팔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나팔수도 이 대사를 전대통령으로 오인하고 나팔을 불다가 실수했음을 알아차리고 중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나팔수가 폭파범과 미리 내통하여 폭발 신호로 나팔을 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나팔소리가 작위든 부작위든 원격 조종 폭파범의 행동을 촉발시켰음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원격 조종은 먼 곳에서 폭파 현장을 관찰하다가 타이밍을 잡아 초단파 조종 버턴을 누르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 초단파는 폭탄에 장치된 수신 장치를 통해 음극과 양극을 합선, 격발시키는 것이다. 원격 조종의 거리는 초단파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뜻하는데 중간에 차폐물이 없어야 한다. 통장 1안에서 원격 조종이 가능하다. 폭파범은 묘소를 내려다보는 그 어디에서 보턴을 눌렀을 것이다.

 

코리안, 차례로 체포되다

 

미얀마 당국은 사고 직후 랭군시내에 비상망을 펴고 검문을 강화했다. 버마 육군과 경찰은 지난 30년 동안 공산 및 소수 민족 반란군들과 격전을 거듭해 온 오랜 실전 경력으로 하여 베트남군과 함께 동남 아시아에선 최강의 경찰 및 군대로 꼽히고 있다. 이 버마 치안 당국이 10일 밤 첫 성과를 기록했다. 랭군 포트구()의 파준다웅 샛강에서 머리만 물위로 내어 놓고 헤엄쳐 가는 사람을 주민들이 발견,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경찰이 즉시 출동, 이 괴한에게 접근하자 괴한은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 폭발로 버마 경찰 2명이 다쳤으나 괴한 자신도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다음날 11일 새벽 랭군 북서쪽 16지점에 있는 타크후트핀 마을 주민들이 또 2명의 수상한 외국인이 달러를 가지고 물건을 사려는 듯 서성거리고 있다고 신고해 왔다. 즉각 경찰이 출동했다. 이 괴한 2명은 수류탄을 던지며 반항했다. 경찰도 응사, 그 가운데 한 명을 쏴 죽였으나 다른 한 명은 달아났다. 버마 경찰도 세 명이 크게 다쳤다. 버마 경찰은 이 시점에서 신중한 표현을 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일엔 괴한의 신원을 아시아인이라고 하더니 11일엔 코리안이라고 했다. 또 중상을 입고 체포된 사람과 사살된 사람의 소지품이 같았다고 발표, 그들이 일당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한국 대사관에선 체포된 자가 코리안이란 발표에 따라 우리 교민들의 소재를 점검했던 바 모두 무사함을 확인하였다. 버마 경찰의 인간 사냥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12일 아침 925분께 엔 전날 새벽 놓쳐버렸던 괴한 1명을 추가로 체포하였다. 체포 과정에서 괴한은 왼팔 일부가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었고 버마 경찰 3명이 죽었다. 버마 경찰은 범행 조직을 가려내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생포할 것을 엄명, 체포 과정에서 경찰의 피해자도 많이 났다. 당초엔 블랙 박스인양 만큼이나 막연할 것 같아 보이던 수사는 급전 직하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물증인 폭발물에 대한 조사, 범인 일당의 추적 등 2대 수사 방향이 착실하게 제자리를 잡아나가면서 그 외곽의 음모 상황도 안개를 헤치고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폭파 직후엔 범행 집단과 동기를 놓고 여러 가지 설이 오고 갔다.

북괴의 사주를 받은 버마 내 반정부 단체 또는 국제 테러리스트의 범행

북괴 특수 부대에 의한 직접 범행

소수 민족 게릴라 등 반정부 단체의 단독 범행

한국계 반정부 단체의 소행 등등.

 

이 네 가지 설() 가운데 미얀마내 반정부 단체에 의한 단독 범행은 미얀마 내 여러 갈래 반정부 게릴라들이 버마 공산 게릴라를 제외하곤 단체로 우익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암살 목표를 한국 대통령에게 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회의적인 반응을 불렀다. 아웅산 묘소 참배에는 버마 정부 실력자들은 가지 않도록 벌써부터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폭발 당시 대부분의 버마인들은 묘소 건물 바깥에 있었으므로 테러의 표적이 버마인이 아니란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던 것이다. 반체제 단체에 의한 범행설은 일부 외국에서 제기된 바 있었으나 한국의 반체제 단체는 철저한 비폭력주의란 점에서 단번에 묵살되었다. 이렇게 되면 이 사건은 북괴와의 관련하에서 이루어졌다는 논리적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동건호는 왜 떠도는가?

 

첫날부터 북괴와의 관련을 암시하는 정보들이 세계의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다. 북괴 화물선 동건호가 전 대통령의 랭군 도착 직전 랭군항에 기행했다가 출항, 다시 전대통령의 방문 예정지인 스리랑카의 콜롬보항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보안상의 이유에서 스리랑카 당국으로부터 출항 명령을 받았다는 콜롬보로부터의 외신 보도가 1010일 북괴 음모설에 대한 최초의 자료로 등장하였다.

 

더구나 이 배의 승무원39명 중 26명이 전대통령의 방문 예정 장소 중의 하나인 스리랑카 칸디시에 들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넘길 수 없는 용의점을 던졌다. 이 동건호란 배는 외신을 통해 통곤호(Tong Gon)로 처음에는 알려졌으나 곧 그 정체가 내외(內外) 통신에 의해 밝혀졌다. 북한 정세에 정통한 서울의 내외 통신은 동건호가 6t급으로 북괴의 대남 공작부가 무역선으로 위장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족보를 살펴 보면 이 배는 지난 76년 조총련(朝總聯) 상공인 문동건(조선화보(朝鮮畵報) 사장)이 기증한 화물선으로 북괴는 이를 동건 애국호로 이름 붙여 특수공작 임무 수행 선박으로 개조, 고성능통신 시설 등을 갖추어 일본, 홍콩, 싱가포르,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등지에 취항시켜 왔다는 것이다. 13일 랭군에 파견된 연합통신 기자는 정보 소식통을 인용, 북괴가 랭군 앞바다 시리암 섬에 있는 주석 제련소를 범행 기지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 제련소는 4년 전 북괴가 지어 준 것으로 북괴 기술자 78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 통신에 따르면 전 대통령의 랭군 방문 직전, 동건호는 소형 선박을 이용, 시리암 섬으로 원료 수송을 하는 것처럼 꾸며 폭파 전문 특수 요원 5명을 잠입시켰다는 것이다. 이 범행 시나리오에 따르면 폭탄 전문 요원 2명과 원격 조종 폭발 전문 요원 3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아웅산 묘소에 접근, 폭탄조() 2명이 폭탄을 천장에 가설하고 기지로 철수한 뒤 폭발조 3명이 9일의 원격 조종 폭발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원격 조종 폭발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파준다웅 샛강을 통해 달아나던 중 1012일 사이 체포, 또는 사살된 코리안이 바로 이들 3명이라는 것이 이 소식통의 말이었다.

 

다른 소식통은 북괴 동건호가 침투시킨 특공 요원은 30명이고 이들 중 상당수는 폭발 사건 뒤 탈출에 성공, 공해상에 대기중인 모선(동건호)으로 돌아 갔고 세 명이 체포, 사살되었다고 했다. 이들 정보들은 특공대 숫자에서 서로 엇갈리고 있을 뿐 아니라 스리랑카 정부 소식통이 지난 1010일까지 문제의 동건호는 랭군항과는 동떨어진 콜롬보 근해에 정박중이라고 확인했던 점과도 상치되고 있어 범행 시나리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1015일 현재 불확실한 상황이다. 코리안두 명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고 기회만 있으면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1014일 현재의 수사는 북괴의 관련을 구체적 물증으로써 확인해 가는 단계에 있으므로 범행 과정 파악은 그 다음 단계의 일일 것이다. 북괴는 이번에 꼬리를 밟힐 만한 여러 가지 단서들을 남겼다. 더구나 수사도 버마, 한국 합동으로 진행되어 그 결과는 공신력이 클 것이다. 그들의 관련이 결정적으로 드러날 경우, 국제 사회에서 북괴는 국가로서의 윤리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테러 집단으로 낙인되고 말 듯하다.

 

그들이 남긴 물증은 소이탄과 불발탄, 3명의 코리안, 그들이 갖고 있던 40점의 소지품, 한국 측 부상자들의 몸 속에서 빼낸 아연 성분 탄알 등등이다. 그리고 한국인이면 잘 아는 그들의 행태(行態)-잠수(潛水) 도망, 들키면 발악적 저항, 그리고 자폭-가 물증의 존재 여부를 떠나 심증을 굳히는 것이었다. 1013일 버마 경찰은 3명의 코리안으로부터 압수한 40여점의 소지품을 공개했다. 소지품은 무전기, 트랜지스트 라디오, 쌍안경, 우산, 달러화(), 실탄10, 미싯가루, 다도, 화약, 가공 식품, 통조림 등등이었다. 우리측 조사단은 12일 랭군의 한 경찰서에서 보관중인 이들 소지품들을 확인한 결과, 통상 북괴 간첩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유형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암살의 토양은 미얀마 내전(內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번 폭파 사건은 미얀마라는 토양으로 해서, 미얀마라는 인화물질로 해서 비로소 가능했다. 미얀마 측에 공범자 또는 하수인이 있으리란 추리는 처음부터 나왔다. 1013일 미얀마 당국자는 아웅산 묘지의 경비 관계자 11명을 일단 용의자로 구속,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이들은 아웅산 묘소에 대해 경호 관계자들이 사전 점검을 할 때 성역(聖域)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금속 탐지기 사용을 완강히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폭발물을 설치하는 데 있어서 묘소 경비자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직무 유기를 했으리라는 추리는 그런 성역에 고성능 폭발물이 세 개나 장치돼 있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수상한 진혼 나팔, 2주 전의 도색 작업, 사전 답사 성격도 지녔던 것으로 보이는 지난 825일의 북괴 최고 인민회의 의장에 의한 아웅산 묘소 참배 등등 북괴 공작대와의 공모 가능성을 보여 주는 사항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사건 당일 아침의 참배 현장 사전 점검에서 어떻게 당연한 체크 지점, 즉 외국 국가 원수가 설 자리 바로 위의 천장 부분이 그냥 넘어가게 되었는지가 용의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북괴는 버마에서 파괴공작을 꾸미기에는 안성맞춤인 조건들들 두루 갖추고 있다.

 

우선 그들은 버마와 오랜 유대 관계를 이용, 버마 정부 기관 내부에 동조자를 심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버마 내부의 복잡한 반정부 무장 단체를 테러에 활용할 수도 있었을 터이다. 미국쪽에서는 한때 버마내 반정부 소수 민족 게릴라들이 이번 사건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보도가 나왔었다. 북괴의 가담 혐의가 굳어지자 이번엔 버마 게릴라 조직과 북괴의 공동 작전 가능성을 말하는 정보통도 나타났다. 버마는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오랜, 가장 치열한, 그러면서도 가장 적게 알려진 내전국(內戰國)이다. 영국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버마족과는 인종, 언어, 때로는 종교가 다른 카친, 카렌, 카레니, 샨족 등 소수 민족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켜 여태까지 싸우고 있는 것이다.

 

버마 북동쪽 지역, 전국토의 약3분의 1이 이 내전에 휘말려 있다. 18만 명의 버마 육군은 한 달에도 수백 명씩 희생되고 있다. 여기에다가 버마 공산당(BCP)의 게릴라들이 준동, 버마는 중앙 정부와 소수 민족 게릴라들과 공산 게릴라 등 3대 세력권으로 분할돼 있는 상황이다.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확실하게 미치고 있는 곳은 랭군 부근의 도시 지역인데 지난해부터는 이곳에서도 게릴라들의 폭파 사건이 잇따랐다. 게릴라들의 병력은 56만으로 추산되고 있다.

 

버마 공산당 게릴라들이 약2만의 병력을 확보, 가장 강력하다. 소수 민족 게릴라들 가운데는 카렌 민족 해방군이 4, 카레니족이 1천명 정도의 병력을 가진 비교적 큰 그룹으로 꼽힌다. 이 정글 전선에 올해 들어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최근까지 공산당을 멀리하던 샨과 카친족 게릴라 그룹이 공산 게릴라와 연합 작전을 펴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여세를 몰아 버마 공산 게릴라들은 우익 카렌 게릴라들과도 동맹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수 민족 게릴라들은 우익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아직도 강하게 보여 주고 있지만 전술면에선 공산 게릴라와의 동맹거부란 과거의 터부를 점차 벗어 던지고 있다. 버마 공산당만이 중공으로부터 약간의 무기원조를 받고 있을 뿐 이들 게릴라 그룹은 타이와의 밀무역에 매기는 세금을 주요 수입원으로 하여 자력으로 버티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 전술을 변경, 정글에서 랭군으로 전선을 옮길 것이라고 한다. 이번의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에서 북괴가 이러한 최근의 정세 변화를 교묘하게 이용, 버마 공산군이나 민족 게릴라들을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서방 정보 소식통에선 보고 있다.

 

분노로 떨 뿐이다

 

뉴욕 타임즈는 1013북한이 랭군 폭파 사건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자제하고 무력 보복을 하지 말 것을 전대통령에게 부탁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레이건 정부가 걱정하고 있는 보복방식은 군사 응징이나 대규모 특공대 공격이라고 했다. 이런 보도는 랭군에서의 수사 진전이 북괴 범행설로 굳어가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 한국민의 국민적 감정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점에서 북괴의 이번 암살 폭파 만행은 호랑이의 꼬리를 건드려 화만 나게 한, 역효과의 실패작이었던 것같다. 테러전술의 목적은 상대를 공포로 제압하는 것인데 지금 한국민은 오로지 분노로 떨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