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어머니’

풍월 사선암 2012. 9. 11. 17:17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어머니

 

  섬진강시인' 김용택,

따뜻한 봄볕에 봉긋이 올라온 싱그러운 꽃봉오리 같기만 한 처녀가 꽃가마 타고 낯설고 물 설은 동네로 온다. 얼굴도 보지 못한 신랑과 혼례를 치르기 위해서다. 그렇게 시집온 처녀는 한 집안의 새댁이 되고, 한 마을의 아낙이 되어 한여름 들꽃 같은 생명력으로 질곡의 삶을 살아낸다. 꾀 한 번 부리지 않고 살다 보니 어느새 백발의 노파가 되어 고샅 출입은커녕 겨울 아랫목만 지키는 신세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편안하다. 아이를 낳아 키워 장성시켰고, 수확한 곡식은 곳간에 한가득이기 때문이다.

 

야심차게 시작한 오리 사육이 완전히 실패하고 집안 살림 절반을 말아 먹은 후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는 길이다. 검정 고무신에 철 지난 잠바를 걸치고 걷는 강변엔 봄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강바람 끝은 맵기만 했다. 나는 울었다. 삐쩍 마른 얼굴에도 눈물이 흐를 길은 있었던 모양이다. 태산 같은 걱정을 앞세우고 강 길을 걷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어머니였다. 어머니께서 강 길을 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어머님도 울고 계셨다. 어머님은 마른 풀잎처럼 서서 울고 있는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었다. 참으로 까칠한 손이었다. 가시덤불 같은 손으로 내 손에 2천 원을 쥐어주시며 어머님은 눈물바람으로 말씀하셨다.

 

용택아, 오디 가든지 밥 잘 먹고 건강혀야 한다. 꼭 편지 허고, 알았쟈?”

 

나는 뒤돌아서 뛰었다. , 바람이 내 가슴을 막았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얼마를 뛰다가 길모퉁이에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머님께서 그때까지 마름풀들이 쓰러지는 강바람 속에 마른 풀잎처럼 바람을 타며 서 있었다.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마른 풀잎 같은 손길이었다. 어머님 뒤 마을에 살구꽃이 찬바람 속에 하얗게 피고 있었다. -김용택의 어머니

 

불효자라는 사실에 언제나 목이 메

 

섬진강 시인김용택(64)은 오리 사육에 실패한 후 도망치듯 고향 마을을 떠나던 이른 봄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일은 글로 쓰든 말로 하든 시인에겐 참 아픈 기억인 듯했다. 그가 어머니를 처음으로 울게 만든 일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덤이고 말이다.

 

오는 10월 등단 30주년을 맞는 섬진강 시인김용택이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느낀 일상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특유의 시적 언어로 정겹게 담아냈다. 그동안 시인은 시와 산문, 인터뷰 등을 통해 어머니의 이야기를 종종 다뤄왔지만 책 한 권으로 온전히 풀어낸 것은 이번이 처음.

 

어머니 이야기를 책으로 낸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그 얼마나 조심스런 일인가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건만제 글 솜씨로 내 어머니만 미화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독자들이 책을 읽고 난 후 김용택 시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들의 어머니를 떠올려주기만을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바랄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라는 주제로 책을 집필하는 걸 크게 반대했던 시인과는 달리 이 책은 매우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십여 년간 섬진강을 찍어온, 시인과 절친한 사진작가의 사진 한 장이 그 시작이 되었다. 섬진강을 찍기 위해 봄, 여름, 가을, 겨울 수시로 섬진강에 내려왔던 작가는 강 인근에 자리 잡은 시인 친구의 집에 종종 들렀고, 때마다 그의 어머니를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그렇게 모인 수백 장의 사진 속에 어머니의 사계절이 고스란히 담겼다. 목적을 가지고 찍은 사진이 아니었기에 시인을 길러낸 어머니의 삶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책에 실린 사진만 봐도 필름 사진과 디지털 사진이 뒤섞여 있을 정도니 기록이라 불릴 만한 세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에 글이 더해진다면 뜻 깊은 책 한 권이 탄생할 것 같다는 것이 사진작가와 출판기획자의 변이었다. 시인을 설득하는 데 걸린 시간만 근 반 년이 소요됐다는 후문이다.

 

가슴이 아파 차마 쓰지 못하겠노라 했던 책을 막상 쓰고 보니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종종 어머니에 대해서 쓰고 말해왔지만책으로 정리를 해보니 어머니라는 주제는 제 시의 커다란 한 축을 담당해왔던 모티프였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제가 진짜 불효자였음을 다시 한 번 절절히 느꼈고요. 책을 보시고 어머니가 무척이나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 어머니 모습에 책을 내길 잘했다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저는 여전히 가슴이 아픕니다.”

 

시인이 어릴 적, 손등이 틀라 치면 젖을 짜서 그 손등에 발라 보드랍게 만들어주었고, 눈에 티라도 들어가 아플라 치면 역시 가슴을 활짝 젖혀 젖 한 방울을 짜 넣어 낫게 해주던 어머니다. 그 어머니의 젖은 쭈글쭈글 볼품없이 변했다. 시인은 자신이 어머니를 다 뜯어먹어 그런 것 같아 한없이 아프다.

   

양글이여사의 좋았던 시절

 

김용택 시인의 어머니는 별명이 양글이. 몸집은 작지만 야무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머니가 열일곱 되던 해에 객지에 있는 공장으로 징용당해 갔을 때도 어찌나 양글게 일을 하는지 동료나 언니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장차 며느릿감이 될 이 양글이 처녀를 선보러 왔던 시어머니에게 물을 떠다드리는 모습이 어찌나 조신했던지 그 자리에서 혼담을 결정했을 정도였다고.

 

어머니가 물을 들고서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오는데 그 몸짓이 그렇게 얌전하더래요. 물을 주고는 뒷걸음으로 걸어 문을 열고 나가는데 마음에 쏙 들고 말이에요. 할머니나 어머니로부터 정말 많이 들었던 말이에요.(웃음) 두 분 모두 같은 말을 하시니 저희 어머니 모습이 꽤나 예뻤던 것 같긴 하지만그 소릴 하도 들어놔서.(웃음) 지금도 그 작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니까요.”

 

양글이처녀는 18세 되던 해 꽃가마를 타고 시집왔다. 굴곡진 현대사가 점철된 가난한 시절이었다. 양글이 처녀는 호된 시집살이를 견뎌내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농부의 삶을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한시도 편한 날 없는 시절이었지만 양글이 처녀의 행복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양글어도 보통 양근 이가 아닌 탓이다.

 

어머니는 평생에 세 가지가 그렇게 좋았노라 하세요. 하나는 저희 아버지예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정말 좋아하셨어요. 소위 말해 첫눈에 반하신 거죠.(웃음) 그 마음 변치 않고 평생 사랑하신 거고요. 다른 하나는 속 썩이던 제가 생각지도 못한 학교 선생이 됐을 때고요. 마지막 하나는 선생 노릇하며 노총각으로 늙어가던 제가 장가를 가겠다며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와 인사시켰을 때랍니다.”

 

힘들었던 삶일지라도 시인의 어머니는 나름 성공한(?) 여자에 속한다. 첫눈에 반한 남자와 결혼해 평생을 사랑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두 개 넘는 20리 길을 가마 타고 시집와 큰집 큰방에 새색시로 꼼짝없이 앉아 하루를 보내는 혼례 날이었다. 펄펄 끓는 구들장에 방이 너무 더워 어떤 이가 방문을 살짝 열어두었는데, 그 문틈 사이로 새신랑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보였다고 한다. 똑같이 연두색 조끼를 받쳐 입고 있는 탓에 누가 신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다 두 명의 새신랑이 새색시가 있는 방문을 향해 돌아섰고 그중 내 신랑이었으면 하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분이 바로 시인의 아버지다.

 

다른 한 분은 저희 고모부였어요. 당시 고모부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결혼 예복을 입고 계셨던 거고요. 만약 어머니가 첫눈에 반한 이가 고모부였다면 큰일 날 뻔했겠죠?(웃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그때 홀딱 반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간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고생하셨는데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 간에 좋다는 다슬기를 한겨울만 빼고 매일같이 강에서 잡아와 국을 끓여주셨으니까요. 제가 어릴 적 가장 많이 먹었던 음식이 다슬깃국인데요. 그건 아주 달디단 사랑의 국으로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어요.”

 

눈물 대신 땀으로 울어온 어머니

 

김용택 시인에게 오리 사육의 뼈아픈 실패 때 본 어머니의 눈물만큼 가슴 시리게 남아 있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어머니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다. 때는 시인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어느 날이었다.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내일은 꼭 내겠다든지 한 번만 봐달란 말 한마디를 못하고 숙맥처럼 14에 달하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밭에서 보리를 베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학교에 있어야 할 시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시인은 기성회비를 달라고 했다. 담담한 표정으로 허리를 펴고 일어난 어머니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가자.”라며 앞장서 걸었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밭에서 가져온 보리 한 줌을 뿌리며 닭들을 구구구구 닭장으로 몰았다. 그리고 닭 몇 마리를 망태에 잡아넣고는 장으로 갔다.

 

“30분을 넘게 걷고 또 차를 타서 장으로 갔죠. 영계라 금방 팔렸어요. 닭 판 돈은 기성회비와 학교로 돌아갈 제 차비에 빠듯하게 들어맞았는데그 돈을 쥐어주시며 어서 학교에 가라고 하시는데가만 보니 어머니가 집에 갈 차비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어떻게 가시려 그러냐고 물으니 자신은 걸어가면 된다며 제게 어서 가라 재촉하셨죠. 빈 망태를 멘 채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버스에 탄 제게 손을 흔드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시인은 버스 안에서 앞 의자 뒤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울었다고 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신작로를 빈 망태기를 메고 걸어가고 있을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 것이다. 가만 생각하니 어머니는 점심도 굶은 채였다. 보리밭에서, 닭을 집어넣은 망태를 짊어지고 장에 가면서, 아들의 손에 닭 판 돈 전부를 쥐어주고 차비가 없는 탓에 걸어서 집에 돌아가면서, 어머니가 연신 쏟아냈을 그 땀방울에 시인은 지금까지도 젖고 또 젖는다. 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던 뜨거운 눈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었을 거라고 짐작해보면서 말이다.

 

비단 시인의 어머니뿐 아니라 우리네 어머니 모두가 평생을 눈물이 아닌 땀방울로 울어오셨던 것은 아닐까. 김용택 시인이 말하는 어머니가 독자 모두에게 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로 읽히는 지점이다. 물론 눈물은 야무진 양글이 처녀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그리고 동네 아낙으로 살아가는 것이 시골 촌부의 삶이죠. 살면서 속이 썩고, 하늘을 찌르는 분노가 저희 어머니에게 왜 없었겠어요. 속 시원하게 펑펑 울어버렸으면 싶은 일도 있었을 테고요. 그럴 때마다 저희 어머니는 어디에 화풀이하고, 무엇을 잡고 사정하며, 어떻게 그 순간들을 이겨내셨을까. 무척 궁금해져요. 어머니에게 친구는 있었을까, 누가 어머니의 지친 등을 다독여주었을까떠올려 보면서 말이에요.”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들에 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던 때가 한 번 있었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집을 나섰는데 어디선가 호미 소리가 들려오기에 가까이 가보니 시인의 어머니가 맑은 달빛 아래서 홀로 밭을 매고 있더란다. 그런데 그 몸짓이 어찌나 격렬한지 백 마디 말보다 강한 것이었으며, 어머니가 그렇게 화를 땅에다가 풀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후로 종종 어머니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나하고 궁금해라 치면 어머니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호미를 들고 언제나 밭으로 가셨단다. 그리고 언제나 눈물인지 땀인지 분간이 안 되게 젖은 얼굴로 집에 돌아오셨다.

 

시인을 키워낸 자연의 철학자

 

가는 세월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마는 부쩍 늙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에 김용택 시인은 그 어느 때보다 조급해 보였다. 백발 노파의 모습을 한 어머니의 모습은 환갑을 넘긴 아들이라도 낯설게만 느껴질 뿐이다. 산으로 들로, 가지 않는 곳이 없었던 어머니는 이제 집 앞 고샅 출입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쇠약해져버렸다. 며칠, 몇 달 병원 신세도 여러 번 졌다.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잔인한 현실이다.

 

요즘 어머니가 귀가 좋지 않으셔서 부쩍 듣질 못하세요. 한번은 아내가 어머님과 통화한 후 주저앉아 우는 거예요.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어머님이 워낙 못 들으시니 예전처럼 전화로 농담도 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내의 말을 듣고 저도 울었어요. 자식들의 안부 전화도 잘 받질 못하세요. 전화벨 소리를 못 들으시는 탓이지요.”

 

평범한 시골 촌부요, 배우지 못한 아낙이라고 시인이 아무리 겸손하게 말할지라도 시인을 길러낸 그 어머니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보청기를 하자는 아들의 성화에 대한 어머니의 답이 걸작이다. “늙으면 세상 소리 다 들을 필요가 없다며 수선 피우지 말고 가만히 있기를 청하셨던 것. 시인은 그의 어머니를 일컬어 자연의 이치를 완벽하게 이해한 철학자라 했다. 그런 탓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받아쓰고, 자연의 소리를 옮겨 적으면 훌륭한 시 한 편이 탄생한다고 했다.

 

신경림 시인이 저희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어요. 한가로이 마루에 앉아 있는데 꾀꼬리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가더군요.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야아, 꾀꼬리 울음소리 듣고 참깨 싹이 나온단다.’ 그러면서 참깨 밭으로 가시는 거예요. 참깨 싹이 나왔는지 보신다고요. 옆에서 듣던 신경림 선배가 용택이 니가 시인이 아니고, 너그 어머니가 시인이시구먼.’ 하더라고요. 인정합니다.(웃음)”

섬진강 시인김용택은 지금껏 자신은 어머니의 말을 시로 베껴 쓴 것에 불과하다며 삶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만끽해온 늙은 어머니를 예찬해 마지않는다.

 

꽃가마 타고 시집온 봄처녀가 세상 풍파를 다 받아내고 이제는 마른나무처럼 늙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시인은 노모의 삶을 처음부터 고스란히 복원해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늦춰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책 속에 꼭꼭 붙잡아두려 한 것일까. 차마 보내지 못하고 말이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마지막 남은 것 하나까지도 아낌없이 쏟아붓고자 하셨던 만큼, 가진 것 없어 챙겨주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깊디깊다고 말하는 시인의 어머니 말씀을 듣다 보니 어느새 나의 어머니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어스름한 새벽안개를 헤치며 밭으로 향하던 어머니. 호미 끝에 걸려 뽑히는 작은 돌멩이들이 돌아눕는 아픈 숨소리처럼 우리 등에서 딸그락거렸고, 젖은 돌멩이에 팬 호미 자국은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는 다리가 되어주었다. 시인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가 놓아준 다리다.

 

<기획 유슬기 기자, 취재 강은진, 사진 박종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