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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의 비밀 노트] 그룹 미래 전략‘결정판’ 세상을 보고 내일을 읽는다

풍월 사선암 2012. 8. 23. 12:35

[창업주의 비밀 노트] 그룹 미래 전략결정판세상을 보고 내일을 읽는다

 

자서전은 쉽게 쓸 수 없는 책이다. 자서전은 한 사람이 살아온 기록이자 그가 이뤄온 모든 것들의 정수를 담으려고 노력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총수, 그것도 그 대기업을 스스로 일으킨 창업주들의 자서전은 특히나 남다르다.

 

그의 자서전은 개인을 넘어 숨 쉬는 역사의 기록이자 후대를 위한 경영과 인생의 지침서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가 정신의 화신이랄 수 있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자서전을 중심으로 국내 재계 총수들의 자서전을 다시 읽는다.

 

최근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자서전 호암자전이 고서점에서 40만 원에 팔린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호암자전은 출간 당시 비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받아 일본 출간 5일 만에 판매 부수 5000부를 돌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자가 많은 국한문 혼용으로 돼 있어 읽기가 쉽지 않다. 300여 쪽 분량의 이 책은 출간 당시 가격이 2500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지금에 와서 수십 배가 넘는 가격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당시 그가 이 책을 통해 경영에 대해 밝힌 혜안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출간된 지 20여 년이 지났고 시중에 절판된 까닭에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등 대형 도서관에 가야만 볼 수 있을 정도로 귀한 상황이다.

 

이병철 회장은 이 책에서 자신의 경영 철학과 그룹 창업 비화, 개인적인 이야기 등을 자세히 기술했다. 그는 반도체·전자·통신 등 첨단산업이 향후 삼성그룹을 주도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기도 했다. 국내 최대의 그룹사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 외에도 많은 창업주들이 자서전을 냈다. 이들의 자서전에는 그들의 삶과 경영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정주영 고 현대그룹 회장 역시 두 권의 자서전을 냈다. 국내 기업인들이 자서전을 잘 내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정 회장이 낸 책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이땅에 태어나서두 권이다. 전자는 기업인으로서의 원칙이나 신념 등이 강하게 나타난 편이다. 반면 후자는 보다 생활인 정주영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 있다. ‘왕회장으로 불렸지만 서민적인 삶을 살았던 그의 향기가 더 강하게 남아 있다는 평이 많다.

   

LG그룹의 창업주인 구인회 고 LG그룹 회장은 자서전을 내지 않았다. 다만 1980년 연암기념사업회에서 연암 구인회 약전(蓮庵 具仁會 略傳)’을 펴내 그를 살펴볼 수 있는 단초를 준다. 또 구인회 회장의 아들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오직 이 길밖에 없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다.

 

창업주들의 자서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사진은 전경련 창립 당시의 모습.

 

최종건 SK그룹 창업주 역시 따로 자서전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최종현 고 SK그룹 회장은 두 권의 저서를 냈다. 최종현 회장은 최종건 회장의 동생이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아버지다. 최종현 회장의 저서는 1991년 펴낸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가 그의 자서전 격이다. 1993년 펴낸 심신수련도 그가 직접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독특하게 최 회장이 자신의 건강 비법으로 삼은 심기심신수련법의 내용을 담고 있다. 1979년부터 기()에 관심을 가진 최 회장은 특히 내관법(內觀法)으로 몸의 표면은 물론 내부까지 긴장과 이완을 시켜 줌으로써 건강에 자신감을 얻었다. 또 유고집으로 1999년 발간된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도 있다.

 

효성의 창업주 조홍제 회장의 나의 회고란 자서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호가 만우(晩愚)’인 이유를 자서전에서 밝힌다. 조 회장은 모든 게 늦었다. 신학문을 접한 것은 17세였고 고보(·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은 약관(弱冠)을 앞둔 19세였다. 또 대학을 졸업한 것은 이립(而立·30)이었으며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불혹(不惑·40)을 넘어서였다. 그리고 효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독자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이순(耳順·60)을 앞둔 56세였다. 그는 스스로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으로 만우란 호를 지었다. 하지만 그와 삼성 이병철 회장이 동업했던 삼성물산은 국내 재계의 신화로 남아 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답게 자서전이 없다. 대신 동생 신춘호 농심 회장이 1999년 지은 철학을 가진 장이는 행복하다는 제목의 비매품 자서전에서 등장한다.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은 1992코오롱 이동찬 일흔 살의 고백-벌기보다 쓰기가 살기보다 죽기가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다. 이 명예회장은 스포츠인으로서 스포츠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글을 적었다. 이와 함께 경영자이자 소설가, 시인으로 유명한 김준성 이수그룹 명예회장은 2004년 자전 에세이 두 대의 양말 기계가 놓인 풍경을 발간하기도 했다.

 

한편 지금은 해체된 상태지만 가장 히트한 최고경영자(CEO)의 자서전으로는 1989년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꼽을 수 있다.

 

단행본으로는 발간 5개월 만에 최초로 100만 부가 넘게 팔려 나갔으며 1991년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에서는 150만 부를 눈앞에 두고 그간의 기사와 팬레터들을 모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그 후의 기록을 내기도 했다. 김 회장의 세계 경영을 표현한 제목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병철 삼성 회장 호암자전

 

내가 얻은 단 하나의 결론은, 기업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것이다. 지름길이 없는 이상 그 길은 당연히 험난하다. 험난함에 지친 나머지 이따금씩 찾아드는 좌절감을 극복하면서 스스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봉사야말로 최고의 도덕이라는 나의 신념 바로 그것이 있었기 때문이다.”(서문, 5p) 이병철 삼성 회장의 생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은 아마도 300페이지가 넘는 자서전 중에서도 첫머리 서문부분일 것이다. 그는 75년의 삶을 기업인으로 살면서 많은 난관을 거쳤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의 격동의 시기에 삼성이라는 기업을 세우고 키우면서 사회의 곡해에 의해 비판 받는 것에 대해 스스로 한 개인에게는 때로 과중했다라고 토로했다.

 

호암자전에는 삼성그룹의 시작과 미래가 담겨 있다. 사진은 삼성상회 설립 당시 이병철 회장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을 국내 최대의 그룹으로 일궈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봉사하는 마음에서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최고의 도덕을 봉사라고 밝혔다. 그는 인간은 기량이라는 것이 있다면서 나는 남보다 특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단지 내 기량에 알맞은 분야에서 국가 사회에 공헌한다는 신념 아래 새로운 사업을 연구하고 개발하면서 끊임없이 맞는 분야에서 기업을 창설하고 운영해 왔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후년 내가 오직 사업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식민지 지배하에 놓인 민족의 아픔을 가슴깊이 새겨두고자 했던 그 부산여객선의 조그만 사건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1편 청소년시절, 13p) 이병철 회장은 후대에 귀족적이고 이성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는 기업인이다. 실제로도 그는 명문가의 자제이며 호암자전전편에도 지적인 성찰이 끊임없이 녹아 있다. 하지만 그가 경험한 일본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멸시는 봉사하는 마음과 함께 훗날 부족한 것 없던 그가 보다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사업에 몰두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일본 유학을 위해 뱃길에 오르면서 그는 일등실에 머무르게 된다. 지독한 뱃멀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회장이 한국인인 줄 안 일본인 형사가 너희들 조선인은 무슨 돈으로 일등선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다며 멸시했다. 그와 그의 동료는 오히려 돈을 듬뿍 가지고 놀러 가는데, 이왕이면 바로 일등실로 가려는 거요라고 일본인 형사를 비꼰다. 묵직한 문체의 호암자전전편에서 거의 유일한 농담(?)이다.

 

열아홉 살의 이 회장은 당시 치미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의 참뜻을 처음으로 실감했다고 썼다. 그는 나라는 강해야 한다. 강해지려면 풍족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풍족하고 강한 독립국가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젊은 시절 겪은 이 작은 사건이 훗날 자신이 사업에 매달리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술회했다.

 

그의 사업에 생각은 호암자전전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회장은 아무리 개인이 잘 살아도 사회 전체가 빈곤하면 그 개인의 행복은 보장 받지 못한다사회 전체를 이롭게 하는 게 사업이며 따라서 사업에는 사회성이 있고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 또한 사회적 존재다라고 말했다(24p).

 

실업자가 십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치자. 그 십 년이 허송세월인지 아닌지, 그것은 십 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내면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2편 사업에 투신, 21p)

 

이병철 회장도 오늘날의 청년백수시절을 거쳤다. 대학 졸업 후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기 일쑤였다. 불과 스물여섯의 나이였지만 아이까지 세 명이나 딸려 있었다. 그는 노름을 하다 들어온 어느 날 새벽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 그는 달빛을 안고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며 독립운동·관사(공무원사업 중 자신과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왜 전란의 폐허 속에서도 제조업을 결의하게 되었는지, 그 본뜻을 다시 한 번 밝혀두고자 한다. 완성품의 수입은 당장 긴요한 물자를 국민에게 공급함으로써 국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귀중한 외화가 소요된다. 또한 국민의 일상적인 필수품을 언제까지나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면, 해외 의존의 국민 생활이나 경제 체질을 영원히 탈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의 자립적인 형성이나 그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3편 수입대체산업, 63p)

 

이 회장은 삼성상회를 설립해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6·25전쟁이 일어나 대구를 기반으로 했던 삼성상회는 모두 폐허가 돼 버린다. 하지만 그의 성공을 지켜봐 온 주변의 도움으로 3억 원의 자금을 마련한 뒤 피란지였던 부산에 세운 기업이 제일제당이다. 이 회장은 당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필품 위주의 제조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 국내에 기반이 전무했던 제지·제약·백당(白塘) 산업 중 수입 대체 효과가 제지에 비해 크고 진출 장벽이 제약에 비해 낮은 백당 산업에 뛰어들게 된다.

 

제일제당의 설립은 삼성그룹의 현재를 만든 원동력이 됐다. 이 회장은 후일, 한때 삼성은 소비재 생산으로 치부했다는 비난 섞인 말을 듣기도 했지만 한 나라의 산업 발전에는 역사에서 보듯이 발전의 과정이 있다. 초기에는 소비재 및 경공업을 육성해 기술과 경험과 자본을 축적하고 그 기반 위에 고도의 기술과 거대한 재본이 소요되는 중화학공업이나 전자 등 고도 기술 산업으로 점차 이전해가야 한다고 말했다(70p)

 

미국을 거쳐 동경에 들렀을 때는 마침 폭설이 내린 세모여서 새해를 동경에서 맞기로 하였다. 이것이 습관이 되다시피하여서, 지금도 가끔 새해를 동경의 호텔에서 맞곤 한다. ”(4편 사회의 격동, 94p)

 

이병철 회장은 일찍부터 세계 경영’, ‘지식 경영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런 독특한 경영은 삼성그룹이 본격적 제조업 중심의 그룹사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50년대 중반 그는 당시 한국의 자본과 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비료공장을 세우기로 한다. 지금으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비료공장이지만 이 회장은 당시를 암담한 한국 경제의 상황과 그것을 타개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한계를 분명히 느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 등의 전문가 및 기업인들을 만나 외화 투자 유치, 생산 기술 등에 대해 공부했고 결국 1955년부터 1965년까지 10년간의 노력 끝에서야 비료공장(한국비료)의 설립에 착수한다.

 

(왼쪽)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이병철 회장.(오른쪽)아들 이건희 회장과 삼성전자를 둘러보는 이병철 회장.

 

재미있는 사실은 비료공장 설립에 큰 역할을 하게 된 자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처음으로 해외에서 새해를 맞게 된 1960년 그는 일본의 전문가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정보를 듣는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체제 경쟁 하에서 미국 저개발국의 성장을 위해 자금을 지원하는 중인데 이 자금을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도 활용할 수 있다는 정보였다. 이는 OECD가 조성한 자금으로 훗날 이 자금을 통해 비료공장을 완성하게 된다. 훗날 세계 최대의 단일 비료공장으로 거듭나는 이 비료공장에 대한 이야기는 호암자전’ 4, 5편에 걸쳐 술회돼 있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기업은 생산, 고용, 소득의 증진 등 경제적 가치의 추구를 통해 인간의 행복을 약속해 주지만 인간에 있어서 경제 이외의 가치를 도외시할 수 없다.” 6편 문화사업, 169p) 1955년부터 1965년까지는 이병철 회장의 사업이 빠르게 성장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난관이 있었던 시기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를 그의 사명이라는 사업으로 정면 돌파했다. 그 자신도 생전 처음 맡아본 관직이라는 전경련 초대 회장을 맡아 국내 기업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했으며 최초로 우리가 잘사는 길칼럼을 신문에 연재하며 경제개발을 독려하기도 했다.

 

결국 1965년 그의 나이 55세에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뜻을 이렇게 가족에게 설명한다. “우리 가족이 생활하고도 남는 재산은 그것을 문화재단을 통해 육영·문화·복지 등 사회 공익에 기여하도록 하자. 사회 일반의 복지 증진 없이는 우리 가족만의 행복도 기할 수 없다.”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역시 암이었구나. 가족들 앞에서는 태연했지만 내심으로는 착잡했다. 온갖 생각이 엇갈려 그날 밤은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6편 문화사업, 196p) 수많은 것을 이룬 그였지만 세월은 피해갈 수 없었다. 문화재단·신문·방송·자연농원 등에 매진하던 그는 1970년대 중반 건강진단에서 초기 위암 판정을 받는다. 가족들에게는 인간의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다고 굳세게 말했지만 결국 그 역시도 불치병을 두려워하는 한 사람의 자연인이었다.

 

전자산업이야말로 기술·노동력·부가가치·내수와 수출 전망 등 어느 모로 보나 우리나라의 경제에 꼭 알맞은 산업이라는 결론을 얻었다.”(7편 전자 · 중화학공업, 206p)

 

인구는 많고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길은 무역입국밖에 없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세계적 장기 불황과 선진국들의 보호무역 강화와 값싼 제품들의 대량 수출에 의한 무역도 이젠 한계에 와 있어 이를 극복하고 제2의 도전을 하기 위해서는 첨단기술개발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8장 삼성의 장래, 243p)

 

이병철 회장은 1960년대 후반 이뤄진 중화학공업 육성책이 당시로서는 시기상조였다고 평가한다. 한국 중화학공업 제품의 생산성이 낮아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이 회장은 1960년대 후반부터 전자산업에 더 집중했다. 이 회장은 당시부터 지금의 삼성전자에 대한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기초 부품에서부터 가정용 기기, 산업용 기기, 정밀 광학 기기, 컴퓨터와 그 제반 기기, 정밀 금형, 전자교신기, 태양열 기기, 의료 기기, 반도체 등을 양산하는 전자산업의 대단위 종합 업체(290p)”가 바로 그것이다.

 

이 회장은 7편에서 삼성전자는 물론이고 삼성중공업·호텔신라·삼성생명 등 삼성그룹 내 다양한 회사들에 대해 소개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삼성그룹이 원자력 사업에도 진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회장은 원자력은 군수용뿐만 아니라 평화적 이용에도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분야다라고 평가했다.

 

기업 운영의 근간은 처음부터 책임 경영에 있었다. 구체적인 작업 또는 서류의 결재를 하거나 수표를 떼거나 하는 경영 실무를 한 일은 전혀 없다.”(8장 삼성의 장래, 229p)

 

기업에서 최고경영자의 자질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덕망·지도력·신망·창조성·판단력·추진력·책임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물은 쉽게 만날 수 없다. 이 때문에 조직력으로 다양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조화돼 협력하면 능히 훌륭한 기업을 만들 수 있다.”

 

기술의 혁신과 이에 따른 산업 구조의 변화에 기업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이 혁신의 주도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호암자전, 8, 246p)

 

이병철 회장은 8장 삼성의 장래에서 그가 오랜 기간 동안 생각한 경영의 본질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다. 그는 기업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협력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혁신이 중요하며 기업이 사회를 리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으는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만든 것이 아니면 쓴 것, 그린 것, 깎은 것이다.”(호암자전, 9편 취미편력, 264p)

 

이병철 회장은 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취미란 사업이나 인생의 교재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다양한 제품을 수집했다. 그는 9편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물품으로 워터맨만년필을 꼽았으며 던힐파이프 담배를 즐긴다고 말했다.

   

정주영 현대 회장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이땅에 태어나서

 

내가 들어간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주인아저씨가 나한테 장부 정리를 떠맡겼다. 장부 정리를 맡긴다는 것은 너를 철석같이 믿는다는 뜻이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 62p) 현대그룹의 시작이 쌀가게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배달원이었던 정주영 회장은 사장으로부터 자본금 한 푼 없이 4년 만에 복흥상회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그가 종업원으로서 보여준 신뢰 때문이었다.

 

그가 쌓아 올린 신용은 훗날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업체를 인수하게 되는 원동력이 됐다. 쌀가게 시절 그를 성실하게 본 정미소 사장이 당시 돈으로 거금이었던 3500원을 신용 하나만 보고 빌려준 것이다.

 

열흘 걸릴 수리 기간을 사흘에 고쳐 내는 대신 수리비를 다른 수리 공장보다 더 많이 요구했다. 자동차를 발로 쓰는 사람들은 하루라도 빠른 수리가 반갑지 수리비 더 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 69p)

 

나는 김영주를 시켜 트럭 30대를 사방에서 끌어 모아 낙동강 연안 남지, 모래질 벌판의 보리밭을 통째 사서 파란 보리 포기들을 묘지에다 심었다. 깊은 겨울에도 모래질 보리밭의 보리 포기는 잘도 떠졌다.”(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83p)

 

정주영 회장의 사업에 대한 재능은 남다르다. 그는 당시 다른 자동차 수리점들이 별것 아닌 고장도 괜히 고치기 힘든 고장인 것처럼 날짜를 길게 잡고 날짜만큼 수리비를 청구하는 것을 보고 역발상으로 사업을 성공시켰다. 밤샘 작업을 해서라도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자동차를 고쳐낸 것. 이는 당시 몇 안 되던 자동차들이 모두 정 회장의 수리점으로 몰려드는 계기가 됐다.

 

그의 아이디어는 현대건설 설립 후에도 다시 한 번 빛을 발한다. 휴전 직전 부산의 유엔군 묘지 단장 공사를 현대건설이 맡게 됐다. 당시 유엔 사절들이 묘지를 참배하게 됐는데 묘지의 뗏장을 푸르게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는 실제 공사비의 세 배를 요구하는 한편 한겨울 유일하게 살아 있는 초록색 풀인 보리를 묘지 위에 심었다. 미군 관계자들은 원더풀을 외쳤다. 훗날 미8군의 공사를 현대건설이 독식하게 된 계기였다.

 

중동 건설 현장을 방문한 정주영 회장의 모습.

 

나는 기회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수많은 기능공들과 어울려 허물없이 팔씨름도 하고 술잔도 나누곤 했다. 도시락을 못 싸오는 기능공들이 안쓰러워 점심 제공을 맨 처음 시작한 것도 우리 현대이다.”(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2163p)

 

왕회장으로 불렸던 정주영 회장이었지만 그의 서민적인 행보는 유명하다. 특히 그는 현장 직원들의 애환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해소하는 데 무엇보다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임금 수준을 높임으로써 생산성이 향상되고 기업의 채산성이 올라간다고 강조했다. 근로자들의 기대치에 맞는 임금 그리고 이를 통한 안정적인 생산 환경이 기업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그에게 중역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자거나 회장을 위한 카펫을 깔자고 하는 임원들에게는 여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비용을 차라리 직원들에게 주자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내가 데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절대 쓰지 않았다. 이는 객기이자 오만이라고 했다. 사람은 피차 도와가면서 사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부정적인 사람은 태양 밑에서 고된 노동의 고통만 끔찍하게 생각하지 그늘 아래서 서늘한 바람을 쐴 때의 행복은 느낄 줄 모른다.“(시련은 있어도 실패는없다, 3, 326p)

 

정주영 회장의 해봤어정신은 유명하다. 어떤 고난이 예상돼도 일단 도전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전은 긍정적 사고에서 나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 현실이 됐다. 그는 울산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해 해외 차관을 빌리러 갔을 때 영국의 금융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해낼 수 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이 일을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면 당신들을 만났을 것이다. 한국조선공사와 다른 선박업자가 어렵다고 답했는데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해낼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 돈을 빌려 달라.”(330p)

 

8000만 달러의 투자금은 이렇게 탄생했다. 

 

구자경 LG명예회장 오직 이 길밖에 없다

  

신제품의 아이디어는 다 고객으로부터 나오니 고객이 우리의 스승이며, 혁신의 바탕에는 고객에 대한 인식의 혁신이 앞서야 한다.”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992년 펴낸 자서전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서 자신을 고객에 미친 영감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대기업 총수 중에서도 평소 대리점이나 서비스센터·공장 등 고객들과 만나는 현장을 각별히 챙겨 왔다. 럭키증권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정부의 에너지 절약 정책으로 영업장인 3층까지 엘리베이터를 중단하고 있는 상황을 구 명예회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임원실 방의 크기도 못마땅했다.

 

구 명예회장은 해당 임원에게 임원 방이 내 방보다 더 커요?”라고 말하며 잔뜩 불편한 심기를 갖고 돌아왔다. 그는 직원이 적은 층을 멈추고 고객이 드나드는 3층을 운행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임원실 공간을 줄인 경비로 고객의 불편을 덜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직원들이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여분으로 고객을 위한다면 고객의 몫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봉사 활동에 참석한 구자경 LG 명예회장(왼쪽)과 울산공장을 둘러보는 최종현 SK 회장.

 

최종현 SK회장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오일쇼크 시절, 석유화학 산업 진출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끝까지 굴하지 않고 도전한 것이 성공의 주요인이다.” 최 회장은 자서전에서 석유 개발 사업이 고도의 기술과 대규모 자본 투자가 요구되고 위험성이 높아 최고경영자의 결단과 의지가 중요하다는 석유 개발에 대한 철학을 담았다. 그는 특히 경영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유고집 나는 한없이 살았다에서 기업가는 항상 신선한 사고력과 투시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백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경제매거진 > 855(20120425) 이홍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