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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대학원까지 무상… 졸업하면 실업자

풍월 사선암 2012. 4. 24. 09:44

그리스, 대학원까지 무상졸업하면 실업자

 

[복지 百年大計] 남유럽 실패 연구 그리스 <1>

산업 일굴 돈으로 무상복지, 기업 대신 일자리 만드느라 노동인구의 25%가 공무원월급·수당에 정부예산 허덕

올 상반기 청년실업률 43% "정치선동 혹한 기성세대 탓"

 

◀1(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의 의사당 건물 앞에서 정부에 긴축조치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죄수 복장을 한 채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복지는 백년대계(百年大計). 한번 설계하면 100년을 간다. 소득 2만달러를 넘은 우리도 제대로 된 복지 시스템을 갖출 때가 됐다. 하지만 처음에 잘못 설계하면 두고두고 미래의 부담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런 실례를 지금 남유럽 국가들이 실증해주고 있다. 잘못된 복지·재정 설계로 고전 중인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3개국을 현장 해부했다.

 

그리스 최고 명문 아테네대학에 다니는 스타마티스 사바니스(29·고고학과 4)씨의 대학 시절은 평탄했다. 모든 그리스 대학생처럼 그는 등록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고, 대부분 학생이 그렇듯이 그도 8년째 대학에 적()을 둔 채 군대까지 마쳤다. 그는 무상(無償)교육을 보장하는 그리스의 복지제도에 감사하며 대학 생활을 보냈다.

 

졸업이 닥쳐오면서 가혹한 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기생 앞에 기다리는 것은 월 500유로(80만원)짜리 임시직이나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그는 "그리스에서 졸업장은 의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일자리 자체가 없는데 명문대를 나온들 무슨 소용 있느냐는 것이다.

 

무상교육은 그리스 복지제도가 내세우는 자랑거리 중 하나다. 학부는 물론 대학원 석사·박사과정도 등록금 한 푼 받지 않고, 기숙사비까지 모두 공짜다. 부자든, 가난하든, 원하는 만큼 공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복지 철학에 따른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인재를 배출해놓고 정작 일자리는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선 매년 85000명의 대학 졸업생이 사회에 나온다. 하지만 청년층을 위한 정규직 일자리 공급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친다. 올 상반기 그리스의 청년(15~24) 실업률은 43%에 달했다.

 

그리스엔 관광·해운 외에 변변한 산업이 없다. 기업이 못 만드는 일자리를 그리스는 정부가 대신 제공해왔다. 예산을 쏟아붓고 외국에서 빚까지 얻어다 공무원과 공기업 일자리를 마구 늘린 것이다. 필요하지 않아도 일자리를 주기 위해 공무원을 채용한다는 식이었다.

 

그 결과 그리스는 노동인구 4명 중 1(85만명)이 공무원인 기형적인 구조가 됐다. 그리스의 공무원은 오후 2시 반까지 일한다. 그러고도 온갖 수당과 연금혜택은 다 받아간다. 공무원 자체가 통제불능의 거대한 이익집단이 됐기 때문이다.

 

GDP53%(2010)에 달하는 막대한 정부 지출은 공무원 월급 주느라 허덕일 지경이다.

 

1980년대 초까지 그리스 경제는 유럽의 우등생 그룹에 들었다. 그랬던 그리스가 30년 만에 망한 까닭에 대해 그리스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미스터리'라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 미스터리'의 구조는 의외로 간단했다. 돈으로 표를 사는 정치인, 그리고 그런 정치인을 계속 뽑아준 유권자의 합작품이었다. 앞서의 사바니스씨는 "기성세대가 정치인의 선동에 넘어가 표를 몰아준 탓에 이 꼴이 됐다"고 했다.

 

꿈도 희망도 잃은 청년들을 그리스에선 '700유로(110만원) 세대'라고 지칭한다.

 

일자리 대신 소비성 복지에 돈을 쓴 그리스 모델은 유럽에서도 가장 비참한 '700유로 세대'를 낳았다.

 

그리스 좌파 "국민이 원하면 다 줘라(아버지 총리 파판드레우)"에 우파도 굴복결국 공멸

 

[복지 百年大計] 남유럽 실패 연구 그리스 <2>

국민들, 복지 세례 맛보자 계속 더 바라기만"30년간 '빚내서 복지'에 익숙, 중동 산유국처럼 펑펑 쓸 줄만 아는 나라 돼"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 30년 만에 28%143%

 

그리스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위기의 씨앗이 30년 전에 심어졌다"고 했다. 사회당(PASOK) 정권이 출범한 1981년을 뜻하는 말이었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7년 만에 탄생한 좌파 사회당 정권의 총리는 지금 총리의 부친인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1919~1996)였다. 그는 취임 직후 내각에 유명한 지시를 내린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줘라(Give them all)!"

 

파판드레우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분배와 복지에 국정의 최우선순위를 두고 국가 재원을 쏟아부었다. 복지 드라이브 방향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파판드레우는 국민의 삶의 질을 고민하던 지도자였다. 유럽 평균보다 뒤떨어진 그리스의 복지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당시로선 당연한 시대적 과제였다.

 

그러나 파판드레우는 끊임없이 자기 증폭하는 '복지의 확대 본능'을 간과했던 것 같다. 한 번 복지의 세례를 맛본 순간 국민의 기대감은 급속도로 높아졌다. 이익집단은 점점 더 많은 혜택을 요구했고, 정치권은 복지의 대가로 표를 받는 포퓰리즘 경쟁으로 영합했다. 그리스 사회는 순식간에 복지 의존 체질로 변했다.

 

문제는 그만한 재정 수요를 충당할 산업 기반이 그리스에 없다는 점이었다. 파판드레우 정권은 그 틈을 정부 지출로 메우는 길을 선택했다. 정부가 돈을 꾸어 일자리를 만들고 재정을 충당하는 '차입형 복지'에 나선 것이다. 파판드레우 집권 8(1981 ~89) 사이 국가 부채 비율은 GDP28%에서 80%로 부풀었다. 지금은 143%에 달한다.

 

"우리 직원의 30%는 아마 지금 밖에 나가 커피를 마시거나 쇼핑을 즐기고 있을 겁니다."

 

아테네 상공회의소의 니콜라우스 소피아누스 이사는 처음 보는 한국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농담기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한국과 달리 그리스 상의는 개발부 소속의 공무원 조직이다. 현재 직원 140여명이 있지만 그는 "40명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직원을 마구 채용했다는 것이다.

 

복지의 일환으로 공무원 일자리를 늘린 그리스 방식은 괴물 같은 관료제를 낳았다. 인구 1100만인 그리스의 공무원은 85만명에 달한다. 인구로 4배가 넘는 한국의 공무원 수(중앙·지방공무원 합쳐 98만명)와 엇비슷하다. 불필요한 인력이 넘치다 보니 쓸데없는 규제가 나오고 부패를 낳는다.

 

아테네대학 아리스티데스 하치스 교수는 주택 거래 때의 비용 부담을 예로 들었다. 그리스에서 집을 팔려면 변호사 2명과 공증인 1명이 입회해야 한다. 예컨대 25만유로(38000만원)짜리 아파트를 거래할 경우 이런 비용이 6500유로(1000만원) 든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관료제로 그리스 경제가 치러야 하는 비용 부담이 GDP7%에 달한다고 하치스 교수는 말했다.

 

그리스 공공 부문의 비효율성을 말해주는 사례는 한이 없었다. 그리스 국영방송 ET의 직원 수는 미국 CNN보다 많다고 한다. 그리스 철도청은 매년 10억유로(15500억원) 적자를 내는데, 차라리 철도를 멈추고 승객을 택시에 태워 보내는 것이 더 적게 먹힌다.

 

◀아들 총리 파판드레우, 긴급 내각회의 참석 -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앞줄 왼쪽) 그리스 총리가 3일 아테네에서 열린 긴급 내각회의에 참석, 자신의 국민투표 제안과 관련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이 자리에서 그리스 지원에 대한 찬반과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 여부를 국민투표에 회부하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철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그리스 정부 관계자가 말했다.

 

그리스 문제의 상당 부분은 공무원에 대한 과잉 복지에서 비롯된다. 그리스 공무원은 오후 230분까지만 업무를 보고 퇴근한다. 그러고도 온갖 수당과 연금 혜택을 받는다. 35년 근무한 공무원이 58세에 퇴직할 경우 생애 월급의 96%를 매달 연금으로 받게 된다. 이렇게 비대한 공무원 조직을 먹여살리려니 국가 재정이 버틸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역대 정권이 세금을 많이 걷지도 못했다. 표가 떨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지출이 그렇게 헤픈데도 그리스의 조세부담률(20.4%)은 한국(20.8%)과 비슷하다. '많이 쓰고 적게 걷는' 이런 그리스 시스템은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산물이었다. 아테네 상의 소피아누스 이사는 "결국 정치가 돈으로 표()를 산 것"이라고 했다.

 

이런 시스템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역대 정부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어느 정권도 공무원 복지를 줄이자거나, 세금을 더 걷자고 하지 않았다.

 

지난 30년 중 10년 동안 집권했던 우파(신민주당)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복지로 표를 모으는 좌파 정권의 성공을 보고 우파도 좌파식 복지 포퓰리즘 경쟁에 가담했다. 하치스 교수는 "1981년 이후 모든 정당이 사회주의화했고 그리스는 펑펑 쓸 줄만 아는 '중동 산유국'으로 변질했다"고 말했다. 그리스 사태는 재정 위기 형태를 띠고 있지만 본질은 정치 리더십의 위기다.

 

30년 전 아버지가 문을 연 '차입형 복지 모델'의 계산서는 아들에게 날아왔다. 아버지가 총리이던 시절 30대였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59) 현 총리는 지금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전 중이다. 복지에 공짜는 없었다.

 

복지에 젖은 국민, 부패 정치인에 관대'30년간 처벌 0'

 

[복지 百年大計] 남유럽 실패 연구 그리스 <3>

의원이 돈 받았다고 밝혀도, 관리가 수천만유로 수뢰해도 복지파티 30년간 처벌 全無

정치책임론 커지자 부총리가 "우리 함께 해먹지 않았나"민간 부문 세금탈루도 심해 지하경제 규모 GDP25%

 

20088월 지멘스 스캔들이 그리스를 뒤집어 놓았다. 독일 지멘스가 장비 입찰 계약을 따내려 3500만유로(540억원)를 그리스 정·관계에 뇌물로 뿌렸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의회는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조사에 착수했고, 오랜 조사 끝에 지멘스가 광범위하게 돈을 뿌린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정·관계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돈을 뿌린 것은 맞지만 누가 받았는지 인물을 특정해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집권 사회당의 한 국회의원이 지멘스로부터 20만마르크의 선거 후원금을 받았다고 시인했어도 역시 처벌받지 않았다. 언론이 일제히 들고일어났지만 유야무야 사그라졌다.

 

익명을 원한 한 재계 인사는 "1981'복지 파티'가 시작된 이후 부패 문제로 처벌받은 정치인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였다. 지난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독일제 불량 잠수함 도입 사건 때도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국방부 고위관리가 수천만유로를 수뢰했고 유력 정치인들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무성했지만 결국 덮어지고 말았다.

 

그리스 정·관계의 부패는 악명 높다. 현지를 취재하며 생긴 의문은 어떻게 그토록 부패에 너그러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엄격하게 추궁한다면 부패는 생길 수 없다. 하지만 스캔들이 터져도, 검은 거래 의혹이 쏟아져도 그리스 유권자는 30년간 줄기차게 사회당·신민주당 2개 정당에 표를 주었다. 왜일까?

 

아테네상공회의소 니콜라우스 소피아누스 이사에게 이 질문을 던지자 "탱고()는 혼자 추지 못하는 법"이란 답이 돌아왔다. 국민이 복지 혜택을 대가로 정치 부패를 눈감아 주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 사태는 복지 포퓰리즘을 치달은 정치만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 정치권에 힘을 실어준 국민도 책임이 있다고 소피아누스 이사는 말하고 있었다.

 

작년 5월 정치 책임론이 비등하자 집권 사회당 판갈로스 부총리는 공개석상에서 이렇게 반박했다. "우리 모두 함께 해먹지 않았나." 정치는 포퓰리즘에 빠져 돈을 쓰고, 국민은 복지에 젖어 표를 주었다. 그리스 위기는 결국 정치와 국민의 이해관계가 맞아 30년간 21조로 함께 춤을 추었던 결과인 셈이다.

 

그리스에서 부패는 정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민간기업과 상류층은 탈세로 국가 재정을 갉아먹었다. 아테네 대학 하치스 교수가 구글 위성사진을 통해 아테네 지역 고급 주택에 설치된 수영 풀을 세어보니 17000개에 달했다. 그리스 세법은 주택 부설 풀을 신고토록 의무화하고 있고, 그만큼 세금을 더 매긴다.

 

◀30년간의복지밀월이 끝나자 그리스 국민은 정부에 대한 저항에 나섰다. 아테네 시내엔 3일에도 개혁·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거리를 메웠다.

 

그러나 지난해 실제로 국세청에 풀이 있다고 신고한 주택은 364(2.1%)에 불과했다. 상류층 98%가 세금을 탈루하고 있다는 얘기다.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오스트리아 린츠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과세를 피한 그리스의 지하경제 규모는 GDP25.1%에 달한다. 그래서 세금만 제대로 걷어도 거뜬히 재정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리스 정치와 국민의 '공범(共犯)' 관계는 재정지출 구조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그리스 정부는 공무원 인건비와 각종 지출로 국민 1인당 연 1600유로를 썼다. 반면 세금으로 걷은 수입은 8300유로뿐이다. 1인당 매년 2300유로(370만원) 씩 적자를 보는 것이다. 도저히 지속될 수 없는 지출 구조가 30년간 계속돼왔다는 얘기다.

 

결국 복지 혜택을 줄이든지, 세금을 더 내든지 양자택일할 도리밖에 없다. 그리스 국민은 둘 다 못하겠다고 저항하고 있다. 국가부도 사태 앞에서도 그리스에선 온 나라가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야는 정치폭탄을 상대에 떠넘기려 여념 없고, 국민은 개혁반대 운동에 나섰다.

 

우리 눈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다 같이 공멸(共滅)할 수 있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도 국민이 저항하는 점이다. 그 이유에 대해 400년간 터키 지배를 받았던 그리스의 역사로 설명하는 전문가도 있다. 오랫동안 식민통치를 받다 보니 국가 의식과 애국심이 약해지고,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습관화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파판드레우 총리의 당초 엄포처럼 국민투표가 실시됐다면 부결될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복지 혜택을 맛본 국민이 이것을 포기하기란 마약 끊기만큼 힘든 법이다.

 

<조선일보 2011,11,03~05 / 아테네=박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