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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의 파란만장한 생애 재조명

풍월 사선암 2012. 2. 8. 19:43

영조대왕의 파란만장한 생애 재조명

 

60년만에 찾아 온 흑룡(黑龍)의 해 2012년에 이미 국제적으로 중요한 이벤트가 다양하게 열린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지만 필자가 미처 간파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올해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卽位) 60주년이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한 국가의 왕위에 60년동안 재위하였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이러한 국왕이 조선왕조에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본 칼럼에 소개하고자 하는 조선왕조 제21대 국왕이었던 영조대왕이다.

 

영조대왕은 1694913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탄생하여 재위기간 52년간을 거쳐서 177635일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를 하니 당시 향년 83세이었다.

 

이제부터 조선왕조 역대 국왕들중에서 가장 오랜 재위기간을 가졌던 영조대왕의 파란만장한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영조대왕은 1694년 부왕(父王)인 숙종과 모친(母親)인 무수리 출신의 최숙빈 사이에서 탄생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출신이 영조대왕에게 치명적인 컴플렉스로 작용하였던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무수리라는 신분은 궁녀중에서도 가장 미천한 궁녀로 분류가 되었기에 최숙빈의 출신은 영조대왕을 두고두고 괴롭게 하였던 것이다.

 

5세에 연잉군(延仍君)으로 책봉(冊封)이 되며, 1720년 숙종이 승하하고 이어서 이복형이 되는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여기서 부터 갈등의 씨앗은 서서히 잉태되기시작하였다.

 

당시 노론은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연잉군(延仍君)을 지지하였는데, 거기에 반하여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는 형국이었기에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종은 1721년 노론의 압력으로 연잉군(延仍君)을 왕세제(王世第)로 책봉(冊封)하기에 이르렀으며, 더 나아가서 대리청정(代理廳政)까지 요구하게 되는데, 경종은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노론측의 움직임에 소론이 일대반격을 가하여 연잉군(延仍君)의 대리청정(代理廳政)을 일종의 역모로 몰아서 당시 대리청정(代理廳政)을 주장하였던 노론의 4대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게되니 이 사건을 신임사화(辛壬士禍)라 일컫는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연잉군(延仍君)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나 이복동생을 아끼는 경종의 선처로 생명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급박한 상황이 지나고 경종이 재위기간 불과 4년만에 의문의 승하를 하면서 또 다시갈등은 시작되었는데, 사도세자의 그 비극적인 결말도 거슬러 올라가면 경종의 승하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종이 승하하면서 결국은 왕세제(王世第)인 연잉군(延仍君)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니 그가 바로 제21대 임금인 영조대왕이 되는 것이니, 때는 바야흐로 1724년이었다.

 

영조대왕은 즉위하면서 당쟁의 뼈저린 피해를 절실히 느꼈기에 당파에 관계없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였으나, 노론의 지지로 보위(寶位)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노론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영조대왕의 장남은 효장세자이었으나 병으로 일찍 임종하고 이어서 그가 42세가 되는 해인 1735년 왕자가 탄생하니 바로 그가 뒤주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가 된다.

 

사도세자는 영조대왕이 늦은 나이에 보았을 뿐만 아니라 효장세자의 임종으로 장차 보위(寶位)를 이을 왕세자였기에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기대는 남달랐으며, 그러한 부왕(父王)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그도 어릴 때 매우 총명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서서히 균열을 보이게 된 계기가 경종의 승하에 대한 영조대왕과 사도세자의 입장차이로 부터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 영조대왕은 경종을 반대하였던 노론측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반하여 사도세자는 경종을 옹호하였던 소론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부자(父子)간에 비극의 씨앗이 잉태될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사도세자는 경종의 승하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되고 이로 인하여 부왕(父王)과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이러한 부왕(父王)을 발판으로 정권을 장악한 노론을 못마땅하게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위(寶位)에 오르게 되면 노론에 대하여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니 그러한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노론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론은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세자가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며, 결정적으로 1762년에 나경언의 고변사건을 일으키게 되니, 구체적으로 그의 비행(非行)이 적힌 10가지 항목을 영조대왕에게 올린 것인데, 여기에 진노한 영조대왕이 결국은 자결을 명하게 되며, 급기야 당신의 친아들을 뒤주속에 가두어 죽이는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를 역사에서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일컫는데, 이러한 참담한 사건을 목격하게 된정조대왕의 당시 나이가 불과 11세밖에 안되었으니,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충격이 컸겠는가!

 

사실 영조대왕이 아들을 뒤주속에 가둬 죽이는 참담한 일을 하였으나,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들을 위하는 여러가지 치적들을 남긴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와 관련하여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한 것이라든지, 나라에 금주령(禁酒令)을 내렸으며, 압슬형을 폐지하고 신문고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민생안정을 위하여 여러가지 시도를 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학문적인 업적에서도 감란록(勘亂錄)과 숙묘보감(肅廟寶鑑)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헌들을 편찬(編纂)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필자는 특히 당시 동궁인 정조대왕을 정적(政敵)들의 위협속에서 지켜준 점과, 결정적으로 승하하기 전에 정조대왕으로 보위(寶位)를 계승하라는 유교(遺敎)를 남긴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엄밀히 말하여 영조대왕이 정조대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 못하였다면 당시 신변의 위협이 항상 엄존(儼存)하는 상황에서 그의 왕위계승은 장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영조대왕이 부왕(父王)으로서 아들을 뒤주속에서 죽게 만든 불행의장본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왕권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하는 여러가지 제도를 실시한 개혁조치를 취함으로써 훗날 정조대왕이 성군(聖君)으로서 개혁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필자/박관우. 국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