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하룻밤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풍월 사선암 2012. 1. 31. 11:19

 

하룻밤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흔히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은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 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어원은 전혀 다른 뜻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기술자와 인부들을 모은 후에 대역사를 시작했을 때입니다.

 

어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신혼생활 한 달 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징용이 되면 그 성 쌓는 일이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안부 정도는 인편을 통해서 알 수야 있었겠지만, 부역장에 한 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신혼부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 터이라 혼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보낸 여인이 외롭게 살고 있는 외딴 집에 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 들었습니다. 남편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한사람이 싸릿문을 들어서며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했습니다.

 

여인네가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주변에는 산세가 험하고 인가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사내가 말을 걸었습니다.

 

"보아하니 외딴 집에 혼자 살고 있는듯 한데 사연이 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어서, 남편이 부역을 가게 된 사정을 말해 주었습니다. 밤이 깊어가자 사내는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고,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여인과 실랑이가 거듭되자 더욱 안달이 났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그대가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삽시다."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셨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냉랭했습니다. 사내는 그럴수록 저돌적으로 달려들었고, 여인의 판단은 깊은 야밤에 인적이 없는 외딴 집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한대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겠다고 말한 뒤,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조건을 걸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 테니 날이 밝는 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 장만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기분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면 당신을 따라 나선다고 해도 마음이 좀 홀가분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을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그 약속을 먼저 해 주신다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씨 또한 가상 한지라 좋은 여인을 얻게 되었노라 쾌재를 부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어 자신의 욕정을 채운 후 골아 떨어졌습니다.

 

아침이 되어 흔드는 기척에 사내는 단잠을 깨었습니다. 밝은 아침 햇살에 여인을 보니, 양귀비와 같이 절세의 미색이었습니다. 사내는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서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차비를 했습니다.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의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괴나리봇짐에 챙겨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내는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한 그는 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였습니다. 사정을 들은 감독관은 인원을 채워야 하는 규정 때문에 사내에게 작업복을 갈아 입혀 대신 들어가게 하고 남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었습니다. 남편은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다가 옷 속에서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당신의 아내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룻밤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입는 즉시 집으로 돌아오시고 그럴 마음이 없거나 허물을 탓하시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십시오."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랍니다.

 

이거야말로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쌓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많은 인간사에서 이처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만리장성을 쌓아준다면야 한 번의 허물쯤이야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그 사내처럼 잠시의 정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만리장성을 쌓아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만리장성 [萬里長城, Great Wall of China]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峪關]에 이르며,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5,000km에 이를 것이다.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의 제()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연() ·() ·() ·()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BC 221년 진()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BC 214년에 그때까지 연 ·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 ·개축하여,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黃河]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陰山]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한 방어선을 이룩하였다. 다시 한대(漢代)에 이르러 무제(武帝)BC 2세기 말에 영토의 서쪽 끝인 둔황[敦煌] 바깥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장성을 연장하였다.

 

·한 시대의 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거란(契丹) ·돌궐(突厥)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 북위(北魏)5세기 초에 장성을 보강하고, 중엽에는 수도 평성(平城) 부근에 또다른 성벽을 구축하였다. , 북제(北齊)6세기 중엽에 오늘날의 다퉁[大同] 북서쪽에서 쥐융관[居庸關] ·산하이관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고 다시 뒤이어 현재의 네이창청[內長城]에 해당하는 곳에 중성(重城)을 구축하였다. 한편,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산시성[山西省] 경계 북부를 타이항 산맥[太行山脈]을 따라 남하하는 장성도 북주(北周) 방어대책으로 그 무렵에 축조된 것인 듯하다. 그 후 수()나라는 오르도스[鄂爾多斯] 남변에 장성을 구축했고,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장성의 훨씬 북쪽까지 그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또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대(明代)에 들어와서였다. 영락연간(永樂年間:14031424)부터 보강이 시작되어, 정통연간(正統年間:14361449)에 내장성이, 성화연간(成化年間:14651487)에 오르도스 남변의 장성이 수축(修築)되고, 다시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는 동쪽 일대의 장성이, 15세기 중엽16세기 초엽에는 오르도스 서쪽 끝에서 란저우[蘭州]를 거쳐 자위관에 이르는 장성이 완성되었다. ()나라는 이 장성지대를 9개의 군관구(軍管區)로 나누어 구변진(九邊鎭)을 두고, 장성을 통과하는 교통요지, 즉 옌먼관[雁門關] ·쥐융관 ·구베이커우[古北口] ·장자커우[張家口] 등지에는 견고한 관성(關城)을 설치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의를 상실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둥베이[東北:만주] ·몽골 지역을 나누는 정치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편, 축성의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전() ·돌 등이며, 성벽은 높이 69m, 폭은 상부 4.5m, 기부(基部) 9m이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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