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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14)] 명나라의 환관 최고위직에 오른 정동

풍월 사선암 2012. 1. 8. 13:13

[이한우의 朝鮮이야기(14)] 명나라의 환관 최고위직에 오른 정동

 

세종 때 뽑혀 가

명의 사신단 일행으로 41년 만에 금의환향해 한양과 고향 신천 방문

한명회와 교류하며 대명외교의 다리 역할폐비 윤씨문제로 명과 갈등 앞장서 해결

 

화자(火者) 금성(金城)사람 김유(金儒), 광주(廣州)사람 염용(廉龍), 신천(信川)사람 정동(鄭同), 보령(保寧)사람 박근(朴根)이 먼저 북경으로 길을 떠났는데, 이들은 사신이 선발한 자이었다.”

 

우리가 태평성대라고 부르는 세종10(1428) 103일자 실록에 담긴 기록이다. 먼저 화자(火者)라는 말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화자란 간단히 말하면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열두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의 남자 아이 중에서 선발한 환관(宦官) 후보자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남성으로서 생식기능을 상실한 아이들이었다.

 

그 중에서 황해도 신천 출신의 정동은 명나라에 들어가 잘 적응한 결과 최고의 권세를 누리는 환관으로 성장했다. 정동이라는 이름이 다시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1469(예종1) 130일자에서다. 명나라 사신으로 최안, 정동, 심회 3인이 곧 한양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보고서였다. 41년 전에 화자로 갔던 바로 그 정동이 이제 명나라 태감(太監)이라는 벼슬을 갖고서 조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태감은 궁실 내부의 각종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의 장으로 내시 중에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자리였다. 그래서 조선을 찾는 환관은 스스로 태감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반면 화자라는 말은 극도로 싫어했다. 화자란 말 그대로 사람()에서 고환을 상징하는 두 개의 점이 떨어져나간 사람을 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이런 사람을 고자(鼓子)라고도 했는데 이는 북처럼 속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예종1(1469) 24일 명 사신 최안, 정동, 심회 등 3명이 황제의 명인 조칙(詔勅)을 받들고 한양에 들어왔다. 이들은 말 그대로 칙사(勅使)’였다. 조칙의 내용은 세조가 죽고 새로이 왕위에 오른 예종의 즉위를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사신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를 띤 사신단이었다.

 

3인의 명 사신 중 최안과 정동 두 사람은 화자 출신이었다. 최안은 온양사람이었고 정동은 황해도 신천 출신이었다. 정동으로서는 무려 41년 만에 대국 사신단의 일행이 되어 고국을 찾은 것이다. 아마도 이때 정동의 나이는 이미 50대 중반에서 후반쯤 됐을 것이다.

 

정동은 한양에 머무는 동안 별도의 집을 마련했고 중간에 고향 신천도 방문하고 왔으며 가까운 친척의 관직 청탁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정동의 청을 빠짐없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46일에는 그의 고향 신천을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다. 어쨌거나 정동의 입장에서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면 3~4개월 정도 머물며 온갖 향응과 유람을 즐기다가 더 이상 싣고 가기 힘들 정도의 각종 선물을 받고서 북경으로 돌아갔다. 정동도 52일 돌아가는 길에 고향 신천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호조판서 노사신이 황해도까지 안내를 맡았다. 화자가 명나라 태감이 되었다는 사실의 신분상승적 의미는 그만큼 컸다.

 

이후 명나라를 방문하는 조선의 사신은 무조건 북경에 있는 태감 정동의 집을 방문해 현안에 관한 입장 조정을 거쳐야 했다. 정동도 가능하면 고국의 문제들이 잘 풀릴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많은 애를 썼다. 어쩌면 세조부터 성종대의 대명외교를 연구하는 데 정동은 가장 중요한 인물인지 모른다.

 

성종10(1479) 14일 성종과 한명회가 나누는 대화의 한 대목을 보면 이미 정동은 명나라 조정 내에서 핵심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동이 병사(兵事)를 맡은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조정(朝廷)의 일을 많이 장악하고 있으니, 명의 대신이 모두 삼가고 반드시 그를 꺼릴 것이다. 내가 만약 정동에게 뇌물을 내렸다가 중국 조정에서 안다면 반드시 나를 비루하다고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정동에게 뇌물을 줘야 한다고 했던 인물이 바로 한명회였다. 따라서 한명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답한다. 이 무렵 이미 한명회는 동시통역사인 장유화를 매개로 해서 정동과 깊은 유착관계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그것이 조선 조정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 환관을 소재로 한 MBC 베스트극장 '통정'의 한 장면.

이듬해 327일 정동이 칙사가 되어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평안도 관찰사 현석규가 보고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둘러 신천 근처에 흩어져 살던 정동의 형제와 조카들에게 곡식을 내려 주었다. 4월 초에는 서울에 있는 정동의 집과 신천에 있는 생가까지 모두 깨끗하게 수리하도록 명했다. 그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51일 정동은 같은 화자 출신인 강옥과 함께 한양에 들어왔다. 당시 사신이 들어오면 일단 홍제원(서울 홍제동)에서 숙식을 취하고 관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지금의 독립문 자리에 있던 모화관에서 조선의 임금과 명나라 사신이 격식을 갖춘 인사를 나눈다. 그 후 일단 임금은 경복궁으로 돌아가고 얼마 후 사신은 경복궁으로 다시 임금을 방문하여 의식을 치른다.

 

예법에 따르면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는 남면(南面)을 하도록 되어 있고 신하는 당연히 북면(北面)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명 사신의 경우 우리가 조공을 바치는 나라의 신하이기 때문에 거꾸로 조선 국왕이 북면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이때 정동과 강옥은 둘 다 조선 출신이었기 때문에 굳이 성종으로 하여금 남면을 권했으나 성종은 끝까지 사양했다.

 

오랜 실랑이 끝에 일종의 타협책으로 동서로 나누어 재배례(再拜禮)를 행했다. 이때의 방문에서도 정동은 다시 한번 자기 친척과 통역사 장유화의 승진을 청탁했다. 이 또한 조정에서는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사신으로서 두 번째 고국 방문은 85일 한양을 출발함으로써 끝난다.

 

실록에는 성종 때 모두 네 차례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동 자신의 말에 따르면 사신으로서 본국을 찾은 것이 모두 여섯 번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별로 높은 지위가 아닐 때 따라온 것이 두 차례여서 실록에서는 별도로 그의 이름을 기록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 무렵 성종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를 폐비시키는 바람에 명나라와도 외교적 갈등을 일으켰다. 바로 이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준 인물도 바로 정동이었다. 사실 명나라 입장에서는 폐비를 시킨다거나 적장자가 살아있는데 둘째나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줄 경우 정치적 분쟁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승인을 해 주지 않으려 했다. 윤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종의 밀명을 받은 한명회가 손을 쓰고 정동이 황제에게 윤씨에게는 몹쓸 병이 있어 폐비했다고 한다며 거짓보고를 해서 별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성종14770세를 넘긴 정동은 사신으로서 마지막으로 조국을 찾았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위급한 상황을 맞기도 했던 정동은 결국 10월경 명나라로 돌아가던 길에 황주의 생양관에서 숨을 거둔다. 조선에서 화자로 살다가 명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는 권력자에까지 올랐던 정동은 객사(客死)로 최후를 마친 것이다.

 

약간의 횡포가 없지 않았지만 정동은 자신이 조선사람임을 잊지 않았다. 연산군9년 또 다른 화자 출신 김보가 거들먹거리며 횡포를 부리자 당시 연산군과 신하들은 정동을 그리워하고 있다. “정동은 창덕궁의 돈화문 밖에서 말에서 내렸으며 혹은 전하를 높여 북면하여 앉았고 자리를 옮길 때면 손수 의자를 들어서 옮겨 놓고 감히 (성종을)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물론 그렇지 못한 화자 출신 사신이 훨씬 많았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