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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13)] 조선사람으로 처음 베트남을 방문한 조완벽

풍월 사선암 2012. 1. 8. 13:07

[이한우의 朝鮮이야기(13)] 조선사람으로 처음 베트남을 방문한 조완벽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의 포로로 잡혀가 무역상 직원으로 베트남 3회 왕래

베트남 3모작이 신기1607년 귀국 후 다시 가족과 함께 평범한 선비로 살아

 

조선시대는 일본에 통신사로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배를 타고서 다른 나라에 갈 일이 없었다. 명나라의 경우도 늘 육로를 이용했다. 고려 때 해로를 이용해 사신들이 오가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따라서 풍랑을 만나 일본이나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으로 표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밖의 다른 나라에, 그것도 배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 개인은 역사의 풍랑을 만나면 하루 아침에 조각배 신세를 면치 못한다. 불행했던 우리의 역사 속에 이처럼 조각배 신세가 되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야 했던 비운의 인물을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임진왜란 때 그런 인물이 많았다.

 

그 중 조완벽(趙完璧)이라는 인물은 특이하게도 안남(安南·베트남)을 세 번이나 다녀오게 된다. 진주 사람인 조완벽에 관한 정보는 대단히 간략하다. 선조 때 인물인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특이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이문(異聞)’편에서 조완벽의 안남 방문 스토리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사신의 문집 매창집에는 조완벽이 사헌부 장령을 지낸 하진보(河晉寶)라는 사람의 조카손녀사위라고 되어 있다. 하진보는 명종과 선조 때 세자시강원 사서, 사간원 정원, 병조 좌랑, 사헌부 지평, 예조 정랑, 사헌부 장령 등을 지낸 것으로 실록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이후 일찍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관직에서 물러났는지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따라서 조완벽은 양반 집안의 평범한 젊은이로 생원시에 합격하고서 향후 문과 급제를 꿈꾸다가 전란을 당하여 기구한 운명을 온몸으로 겪게 된 것으로 보인다. 스무 살 무렵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완벽은 포로의 신세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처음에는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문자를 이해할 줄 안다는 이유로 교토의 무역상에게 고용되었다. 당시 이미 일본은 동남아 일대를 상대로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다.

 

조완벽을 고용한 무역상은 주로 안남을 상대로 상거래를 펼치고 있었다. 당시 뱃길에 대해 이수광은 조완벽으로부터 전해 들은 증언을 바탕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안남은 일본과의 거리가 바닷길로 37000리나 되는 곳으로서 일본 사쓰마로부터 바다로 나가는데 바닷물이 서쪽으로 높고 동쪽은 낮아 주야로 50~60일은 가야 안남에 도착한다.”

 

조완벽 일행이 한번 안남에 가면 석 달 정도 머물렀다. 이때 조완벽의 눈에 신기했던 것은 불과 석 달 사이에 한쪽에서는 논을 갈고, 다른 쪽에서는 곡식이 무르익고, 또 다른 쪽에서는 곡식을 거두는 것이었다.

 

아마도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만 본다면 조완벽은 조선인으로서는 안남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인물이 된다. 고려 때 안남 리()왕조의 왕족이 간혹 고려로 귀화해온 적은 있었다. 반면 고려사람으로서 안남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조완벽의 안남 도착은 한국·베트남 관계사에서 새 장을 연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앞서 조선과 안남의 간접적인 접촉은 있었다. 두 나라 모두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기 때문에 북경(北京·베이징)에서 양국 사신들 간의 만남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이 바로 그런 경우다. 실학사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수광(李光·명종 18~인조 6, 1563~ 1628)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590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뽑혀 처음 북경을 다녀왔다. 그리고 조완벽이 일본으로 피랍되던 1597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진위사로 두 번째 북경을 방문했다.

 

바로 이때 이수광은 안남에서 온 사신들과 필담으로 교분을 나눴다. 이때 만난 안남 사신의 이름은 풍극관(馮克寬)이라고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밝히고 있다. 이때 이수광과 풍극관이 주고받은 시 문답은 이랬다. 먼저 이수광이 귀국은 겨울도 봄처럼 따뜻하고/얼음과 눈을 볼 수가 없다고 하더이다라고 하면 풍극관은 남국은 겨울이 적고 봄이 하도 많아서라고 화답했다. 또 이수광이 귀국에는 두 번 익는 벼와/여덟 번 치는 누에가 있다고 하더이다라고 노래하면 풍극관은 두 번 익는 보리와 여덟 번 치는 삼도 있소이다라고 맞받았다. 북경의 옥하관에서 400여년 전에 이뤄진 외교관들의 풍류와 낭만이다.

 

이후 1611년에도 이수광은 세자의 관복을 명나라에 요청하는 주청사로 북경을 다녀오게 된다. 이때도 이수광은 안남의 사신들과 시문(詩文)을 주고받는 등 교류를 가졌다.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저술하면서 안남을 다녀온 조완벽 이야기에 별도의 항목을 할애한 것도 북경에서 나눈 안남 사신들과의 교분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조완벽이 일본 상인 일행을 따라 안남에 처음으로 간 해는 1604년이다. 이미 이수광이 두 차례 안남 사신들과 교류를 가진 이후였다. ‘매창집에는 안남에 간 조완벽의 경험담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그곳 사람들은 조완벽이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환대를 했다. 그러면서 어떤 이는 이수광의 시를 암송하면서 그가 어떤 인물이냐고 물었다. 진주의 젊은 선비로 서울생활을 한 적이 없던 조완벽이 이수광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을 리가 없다. 안남 사람들은 오히려 너희 나라의 문인(文人)을 어찌 모르느냐며 면박을 주기까지 했다. 이에 조완벽은 안남인들이 즐겨 암송하던 이수광의 시를 베껴 가지고 왔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는 이수광이 풍극관에게 화답한 시였을 것이다. 이후 두 차례 더 안남을 오가는 과정에서 조완벽은 여송(呂宋·필리핀)과 유구국 등도 두루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30도 되지 않은 조선의 선비 조완벽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애썼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귀국의 기회는 1606년 찾아왔다. 일본은 전쟁이 끝나자 계속 통상요청을 해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굴욕적이라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으나 결국은 회답사라 하여 통상을 재개하기 위한 사신단을 파견한다. 정사는 여우길, 부사는 경섬, 서장관은 정호관으로 결정되었다. 선조는 회답사의 과제 중에 일본에 붙잡혀간 포로들을 쇄환하는 문제를 반드시 포함시킬 것을 명했다. “군주에게는 백성에게 부모의 도리가 있다. 백성이 오랑캐에게 잡혀가 예의지국의 백성에서 장차 오랑캐 나라의 백성이 되게 생겼으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회답사는 명칭을 회답쇄환사로 바꾸지는 못했지만 100여명의 조선인 남녀를 데리고 1607719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훗날 호조 참판까지 오르게 되는 회답사의 부사 경섬(慶暹)해사록(海錄)’이라는 일본 기행문을 남겼는데 거기에 조완벽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포로 조완벽은 진주 선비로서 영리하여 믿을 만한 사람으로 함께 귀환케 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조완벽이 이수광을 직접 찾아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수광은 일본이나 큰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수시로 조완벽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또 안남에서 애송되고 있는 자신의 시와 관련된 이야기도 언급하고 있다. 문맥을 봤을 때 두 사람이 만났을 가능성은 높다.

 

귀국 이후 조완벽은 출사(出仕)의 길을 도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무나 하기 힘든 특이한 체험을 한 때문이었을까? 대신 귀국 이후 조완벽의 행적에 대해 이수광은 아주 담담하게 십여 년 만에 조완벽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탈없이 사니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고만 적고 있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