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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회장님 !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곧 잊을지도 모릅니다

풍월 사선암 2011. 12. 17. 10:06

박태준 회장님 !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곧 잊을지도 모릅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추모 특별사설

 

박태준 회장님.

   

며칠간 서울 신촌 빈소에는 이 시대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찾아와 당신께 끊임없이 국화꽃을 바쳤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오늘 우리 곁을 떠나 싸늘한 무덤으로 들어가시는 당신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한송이 꽃을 드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질풍노도와 같았던 경제개발시대는 그렇게 회장님과 함께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한민족이 누천년의 질곡을 딛고 분연히 몸을 일으켰을 때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당신과 정주영 회장과 이병철 회장 같은 분들이 어깨를 부딪히며 내달렸던 그런 시대는 이미 바래가는 역사의 페이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다시 그런 영웅들의 시대가 있을까요.

 

당신이 거친 영일만에 굉음과 함께 모랫바람을 일으키기 전에는 작은 고아원과 쓰러져 가는 어가 몇채만 서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말수가 적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막걸리 잔을 내려놓으며 태준아. 이거 정말 되겠나?”라며 한숨을 내쉴 때 회장님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군용 지프를 타고 공사 현장이라는 작은 입간판만이 서 있는 허허로운 영일만을 돌아본 그날 저녁이었다지요. 지금 그런 이야기도 이미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 역사책 속으로 당신마저 걸어 들어갔습니다. 이제 그 문을 닫아버리셨는지요.

 

미국 차관단이 고개를 돌리고 독일의 유서 깊은 철강사인 크루프사 관계자들이 대꾸도 없이 서울을 떠난 다음에야 이를 더욱 앙다물고 기필코 최고의 철강회사를 만들어 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당신들의 모습이, 그 분노가, 그 치솟는 열망이 지금 우리의 가슴을 때리고 있습니다.

 

갑오경장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근로자 5만명이었다는 그 크루프사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독일 북해 벨트의 조선소들이며 세계적인 쇳물 회사들은 모두 어떻게 되어있나요. 바닷가 모래 벌판에서 처음에는 그 모래알만큼이나 작았던 포철이 세계 유수의 철강사들을 기어이 모두 제압해버렸던 그 터질 것 같은 자부심을 이승에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시던가요.

 

청구권이라는 이상한 이름이 붙어있던 식민지 배상금의 일부를 꺼내 포철을 짓자고 결정한 그날, 당신은 조상의 핏값으로 우리는 이 회사를 만드는 거다. 실패하면 전부 저 시퍼런 바닷물에 빠져죽자!”고 절규하셨다면서요. 포철의 역사책에는 이것을 우향우 정신이라고 표현한다지만 지금 이 시대는 그 정신부터가 흙탕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산업시대 영웅의 한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은 조선소를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고, 다른 공장들도 지어나갔습니다. 그랬기에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깡통만 차고 있던 식민지 중에 팔자를 고친 유일한 국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박정희와 정주영과 이병철과 당신께 진정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영웅들의 신전에 이제 막 들어가신 당신을 오늘 밤 그 분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시겠지요. 그리고 천국에도 막걸리는 있겠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태준아. 그 시절 우리 정말 잘해냈어라고 껄껄 웃을지도 모릅니다. 그 영웅들의 신전에는 필시 조국 근대화라는 초석이 새겨져 있겠으나 지금 한국의 청년들과 정치인들은 그런 말조차 잊고 있습니다.

 

영웅들이 살았던 산업시대는 그렇게 당신과 함께 역사의 커튼 뒤로 돌아들어갔습니다. 철강 조선 자동차 전자 반도체 기계 석유화학 섬유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세계 최강의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데는 영웅들과 그 후예들이 흘린 굵은 땀방울이 배어 있습니다.

 

당신마저 저승길을 떠나셨는데, 조국 근대화는 아직 미완인 채로 남겨져 있습니다. 산업화의 골조는 위용을 자랑하지만 그것을 채울 근대적 세계관, 열린 문명관, 질서정연한 민주주의는 아직 너무도 멀리 있습니다. 아니 신기루인듯 오히려 사라지고 있습니다.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경제의 운동법칙은 달라졌으나 이 새로운 길은 한국인 모두에게 정체도 불분명하게, 말그대로 포스트모던적 얼굴을 한 채 지금 낯설게 문앞을 서성입니다. 정치는 대혼돈이고 영웅들의 자부심은 산산조각났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곧 당신의 이름을 잊을지도 모릅니다.

 

박 회장님, 새로운 과업들은 남겨진 우리들의 책무입니다. 모든 길을 지워버리는 안개인듯 패배감만이 도처에 만연해 있군요. 그렇게 영웅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오늘밤 두 팔 벌려 당신을 맞아줄 박정희와 정주영과 이병철과 그리고 모든 영웅들과 더불어 뒹굴었던 이름 없는 산업 전사들 모두에게 이 조사를 바칩니다. 벌써 그리움이 북받쳐 오르는군요. 편히 쉬소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재촉할 것입니다.

 

한국경제 / 201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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