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박정희와 구상의 우정 이야기

풍월 사선암 2011. 12. 2. 11:27

박정희와 구상의 우정 이야기

 

구상(具常) 시인의 문학 외적인 부분에 대통령 박정희가 있습니다. 구상 시인이 문단에서 유일하게 박정희 대통령과 개인적 우정을 나눈 친구임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두 사람의 신체에 사는 하나의 영혼>과 같이 진실하였던 두 분 친구의 우정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우정을 상징하는 꽃, 라일락을 두 분의 영전에 바칩니다.

 

대통령 박정희의 카리스마와 시인은 걸맞지 않은 느낌을 주지만, 두 사람의 인연과 우정의 세월은 반세기를 헤아립니다. 시인 구상과 대통령 박정희는 격동의 근대사 한복판에 함께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연은 박정희가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 50년대부터 시작됩니다. 구상은 서울에서 태어나 원산 근처 덕원으로 이주, 해방 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작품 성향 때문에 반체제분자로 몰려 월남해야 했습니다.

 

가난과 전쟁으로 국가적 고난이 극심했던 시절, 국방부 신문 승리일보 주간이며 종군기자단장이었던 구상은 피란지 대구에서 두 살 위의 청년 장교 박정희를 만납니다. 육군본부 작전국장 이용문(李龍文) 준장이 그에게 작전국 차장 박정희 대령을 처음 대면시키며 의리의 남아라는 한마디 말로 소개를 했습니다. 이용문은 박정희가 드물게 존경했던 군 선배입니다. 구상의 눈에 비친 박정희, 이 날카롭고 고독한 눈매의 조그맣고 새까만 남자는 플라톤의 <국가론>, <월남 흥망사>를 탐독하는 등 지적 탐구심이 강했으며 민족주의 성향의 투철한 국가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구상과 박정희는 자주 만나 조국과 인생을 담론하며 의기투합으로 친분을 쌓아갑니다. 둘은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역사의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 지를 뜨겁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먼발치에서 서로를 존경하는 반면, 강한 역사의식과 현실참여의 행동주의로 밀착되어 있었고, 고난과 모험에 과감히 자신을 던지게 됩니다.

 

구상에게 닥친 고난은 정치적 사건입니다. 자유당 정권 시절 그는 정치적 사건으로 15년 구형을 받고는 <사형 아니면 무죄를 달라>고 요구, 재판부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아냅니다. 사생관(死生觀)이 투철한 면에서 군인 박정희에 못지않은 행동주의 시인의 강골(强骨)입니다. 시인과 군인은 서로 다르고 먼 길을 가게 마련이지만, 4.19혁명과 5.16군사혁명의 격변이 그들의 재회(再會)의 중력(重力)으로 작용을 했습니다.

 

박정희의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구상은 친구의 거사가 성공했음을 알고 주저 없이 이를 구국운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4.19 후의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어. 학생들은 몽둥이를 들고 의정단상(議政壇上)을 점령하고, 맨손 맨발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을 해방하겠다고 난리고 난장판이었지.> 시인은 말했습니다.

 

혁명의 돌개바람 속에서 4.19혁명의 주체인 학생세력은 5.16혁명의 군인으로 국가의 주체가 교체되었습니다.

 

-이해인 수녀와 시인 구상- 훗날 시인은 친구를 위해 시 한편을 선물합니다.

<당신의 영광에는 푸르름이 있다. 밤안개를 헤친 결단의 그날이 땅에 또하나 새벽 동을 트게 하고 우리의 가슴 속에 새 삶을 불러일으킨 저 5월의 푸르름이 있다.>

 

구상은 대통령 박정희에게 비판적이었던 지식인과 문단 인사들의 곱지 않은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친구 박정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주저함이 없었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혁명 거사 며칠 뒤, 둘은 재회를 합니다.<어떤 분야라도 한몫 해주셔야죠!> 박정희가 국정에 참여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냥 남산골샌님으로 놔두세요.> 사양을 하고 며칠 뒤 구상은 서둘러 일본으로 가버렸습니다. 경향신문 도쿄지국장을 자청해서 국내를 떠난 것은 친구 박정희의 청을 물리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내 앞방에다 사무실을 마련해 놓았는데 끝내 가시기요. 이 판국에 일본 낭자들과 재미나 볼 작정인가요?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 박정희는 목 메인 소리로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의 맑은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두번 꺼내지 않았습니다. 딱 한번으로 끝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집권 기간 내내 구상은 멀리 친구로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구상에게 만만한 너나들이 친구였으며, 남들처럼 고개 조아리고 대통령 각하를 존칭하는 일도 없었고, 박정희도 그걸 원치 않았습니다.

 

집권 말기, 정치적 저항과 혼란이 심해지자 구상은 친구의 외로운 처지를 근심하다 청와대로 찾아갔습니다. 19799월이었습니다. <이제 임자가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소.> 은퇴를 권유했습니다. 박정희의 대답은 고뇌어린 침묵뿐이었습니다. 묵묵히 현관까지 배웅을 하던 박정희의 쓸쓸해 보이던 그 모습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한달 뒤 그가 세상을 하직하고, 구상은 5년 동안 그의 안식을 기원하는 가톨릭 미사를 올렸습니다. 제사를 지내준 것입니다.

 

그 후 그는 거주지인 여의도 아파트에서 친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을 내려다보며 우정을 홀로 새김질하다 2004년 봄과 여름이 갈마드는 5, 저만치 다가올 채비를 마친 여름은 이제 자기 몫이 아니라는 듯, 가는 봄을 따라 훌훌 먼 길을 떠났습니다.

 

우국의 충정으로 의기투합했던 시인과 대통령은 슬픈 가족사(家族史)를 지녔다는 점에서도 비슷했습니다. 박정희가 부인 육영수를 먼저 잃었듯이, 구상도 부인을 먼저 잃고 외로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상은 두 아들마저 병으로 잃은 데다 그 자신도 투병 생활을 하는 남다른 불행을 한 몸에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남의 불행을 더 챙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전란기에는 갈 곳 없는 상이군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정이 많아 주변의 가난한 시인들을 힘닿는 대로 도왔으며, 나라의 벼슬은 사양했지만 시단(詩壇)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얼굴 내밀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평생 따라다닌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폐결핵, 가난의 병이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투병하던 그가, 17평짜리 구형 아파트에서만 30년을 살아온 그가 장애인 문학지(文學誌)를 돕기 위해 2억원을 보내주어 주위를 숙연케 했으며, 그렇게 훌훌 털어주고 그 자신은 가난의 병을 가지고 떠난 것입니다.박정희가 눈에 띄는 대로 서민들의 아픔을 챙기고 거기에 자신의 권력을 대입하여 그들을 손잡아 일으키며 눈물을 지었듯이, 시인과 대통령은 고난의 친구들이었다는 점에서도 같았습니다.

 

재물에 관심이 없는 청렴한 삶도 그들은 같이 살았습니다.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중에서)

 

구상은 기교를 배제한 간결한 시어(詩語)에 풍부한 의미와 암시를 담아냈습니다. 박정희는 일체의 정치적 수사(修辭)가 없이 요점을 딱딱 집어 말하는 어법을 구사했습니다.

 

구상은 친구 박정희를 이렇게 말합니다.

< 의협심과 인정이 강하고 시심(詩心)이 있는 사람이었다. 난세에 파격적인 인물들을 모아서 혁명을 일으킨 뒤에 정상적인 사람들로 주변을 교체해가는 과정에서 갈등도 많았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람을 죽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그리고 먼저 간 친구를 위해 다음과 같은 진혼축(鎭魂祝)을 썼습니다.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나 받든 지도자요. 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 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하느님 앞에 친구를 보내는 그의 우정이, 사랑과 용서의 기원이 지금도 절절히 가슴에 메아리칩니다.

 

시인과 대통령의 우정은 둘이 나눈 30, 홀로 남아 새긴 20년을 합해서 반세기의 세월이었습니다. 대통령 박정희가 먼저 떠나고 시인 구상이 뒤따라 먼 길을 떠났습니다.

 


표현의 자유 찾아 월남, 남쪽서도 자유못 찾아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31>세 번의 필화 박정희 친구, 구상

 

1975년 구상 시인은 그때까지 써 온 시·평론·희곡·시나리오 가운데서 주요 작품을 추려 구상 문학선을 상재했다. 600쪽이 넘는 두터운 이 책 케이스의 앞뒤 면에는 화가 이중섭(1916~56)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림 두 점이 표지화로 실려 있었다. 구상과 이중섭의 오랜 우정은 널리 알려진 일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 그림에 얽힌 뒷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구상은 이 그림들이 52년께 제주도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했다. 그 무렵 6·25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정국은 이른바 1차 정치파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당시 영남일보 주필이던 구상은 기명 칼럼으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고 항거하는 글을 계속해서 쓰고 있었다.

 

그해 가을 구상은 그 글들을 모아 민주고발이라는 제목의 사회평론집을 펴냈다. 당시 제주도에서 머물고 있던 이중섭은 친구 구상이 책을 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상과 연락이 닿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고발이라는 제자(題字)와 표지화 두 점을 그렸다. 하지만 구상에게 전달할 방법을 찾고 있던 중 책은 변종하 화백의 그림을 장정으로 이미 출간됐고, 이중섭의 그림들은 어느 수장가의 수중에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어쨌거나 민주고발은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 조치됐고, 구상은 특무부대에 쫓겨 피신을 다니다가 마침내 체포되고 만다. 이 책을 빌미로 구상은 이른바 레이다 사건에 연루되면서 투옥돼 고초를 겪기에 이르렀다. 구상이 당한 두 번째 필화사건이었다.

 

1919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구상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41년 귀국한 구상은 함흥 북선매일신문기자로 일하면서 46원산문학동맹이 펴낸 동인 시집 응향에 시 ’ ‘여명도등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응향이 출간되자마자 북한의 문화예술을 총괄하던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구상의 작품들을 문제 삼고 나선다. 부르주아적이고 퇴폐주의적이며, 반역사적이고 반인민적인 반동 시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첫 필화였다. 구상은 여러 차례 동맹에 끌려가 신문을 받아야 했고, 직장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빠지자 표현의 자유가 없는 북한을 떠날 결심을 한다. 이듬해인 47년 구상은 가족과 친구 이중섭을 남겨둔 채 홀로 월남했다.

 

월남한 구상은 연합신문 문화부장으로 일하면서 백민’ ‘문예등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남한에서의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월남한 지 3년 만에 겪게 되는 6·25전쟁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계기였다. 피란 행렬을 따라 대구로 내려온 그는 국방부가 발행하던 승리일보주간을 맡는 한편 문총구국대의 선봉에 서서 전란의 충격으로 정신병 증세를 보인 서정주 등 어려움에 빠진 동료 문인들을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9·28수복 며칠 전에는 군 지프를 타고 아직 북한군이 남아 있던 서울로 들어와 승리일보를 거리에 살포하는 대담성을 보인 일화도 있다. 1·4 후퇴 때 월남한 소설가 김이석, 시인 양명문, 작곡가 김동진 등에게 승리일보기자증을 마련해 줘 남쪽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한 것도 구상이었다.

 

박정희를 처음 만난 것이 그 무렵 대구에서였다. ‘승리일보를 주관하던 육군본부 작전국장이 이용문 준장이었고 차장이 박정희 대령이었다. 이용문의 소개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자주 만나면서 우정을 키워나갔다. 박정희가 34, 구상이 32세 때였다. 5·16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후 박정희가 구상을 불러 국정에 참여해줄 것을 간곡하게 청했으나 구상은 마음으로만 돕겠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유신 시절에는 거의 만나지 못하다가 10·26 사태를 한 달여 앞둔 799월 구상이 마지막으로 박정희를 찾아가 간곡하게 은퇴를 권유했으나 박정희는 끝내 묵묵부답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반공을 국시로 삼던 군사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다정한 친구였는데도 구상이 겪은 세 번째 필화가 관계당국으로부터 이적(利敵) 혐의를 받으면서 시작됐으니 아이로니컬한 일이었다. 65년 여름의 일이다. 그는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기 위해 수치라는 제목의 희곡 한 편을 완성했다. ‘지리산 빨치산의 여대원 한 명이 능욕이 자행되는 산속에서의 짐승 같은 생활에 지쳐 정말 인간적인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귀순하지만 거기서도 전투경찰의 비열한 유혹과 가혹한 행패가 자행되고 있음을 보고 그에 저항하다 죽음을 택한다는 줄거리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무대에 올려지기도 전에 사전심의에 걸려 공연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구상은 관계기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렀다. 부분적인 묘사들이 국립 경찰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구상은 또 다른 필화사건을 겪을 뻔한 일이 있었다. 5공 말기의 일이다. 구상은 60대에 접어든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생애를 통틀어 가장 왕성한 작품활동을 펴고 있었다. 매년 한 권꼴로 시집을 내놓았고 86년에는 구상 시 전집을 펴냈다.

 

873월에 발표한 까마귀라는 시가 그 무렵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어른은 젊은이를 물 먹여 죽이고, / 이 독사의 무리들아, 회개하라등의 대목이 그해 1월의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읽는 이마다 그 작품이 몰고 올 파장을 우려했으나 뒤이은 민주화 열기에 파묻혀 정권의 눈총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구상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늘 앞장섰다. 하지만 두 아들을 병으로 잃는가 하면 여의도의 작은 구형 아파트에서 30여 년을 사는 등 그 자신의 삶은 그리 유복하지 못했다. 젊었을 때 폐결핵을 앓아 폐 한쪽을 절제하고도 비교적 건강을 유지하던 그는 폐결핵이 다시 악화하면서 20045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구상은 죽음을 앞두고 장애인 문예지 발간을 지원하기 위해 2억원을 쾌척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정규웅 | 239| 2011,10,09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