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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寸鐵로 뚫는 남자' 송호근 사장_절삭공구 '엔드밀'로 세계시장 1위…

풍월 사선암 2011. 10. 8. 11:53

[Why]이 남자의 寸鐵<촌철: 작고 날카로운 쇠붙이>, 기계의 나라 독일도 뚫었다

 

'寸鐵로 뚫는 남자' 송호근 사장_절삭공구 '엔드밀'로 세계시장 1

强小기업 YG-1 일군 송호근 사장의 '집념 30'

 

YG-1 본사는 인천 부평(富平) 변두리에 있었다. 지도를 꼼꼼히 읽지 않으면 찾기 힘든 외진 자리였다. '제품을 만드는 곳', 공장은 이런 정의(定義)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세계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 기업답지 않게 허식 없는 공간을 기계음이 채우고 있었다.

 

YG-1은 엔드밀 세계시장점유율 1위다. 탭은 2, 드릴은 6위다. 엔드밀링커터, 약칭 엔드밀(End mill)은 산업의 필수 공구(工具). 연필 없는 학생 없듯 엔드밀 없는 제조업체를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다.

 

드릴은 구멍만 뚫는다. 엔드밀은 직선과 곡선가공을 한다. 밑면, 옆면에 날이 달려있어 작은 휴대폰부터 대형 항공기 금형(金型)을 다 만든다. 몇 시간 작업하면 날이 닳는데 이는 엔드밀의 수요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송호근 사장이 갓 만들어진 엔드밀을 검사하고 있다.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에 붕대를 감은 그는 치열한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시대의마지막 기업가.

 

한우물 파서 최고가 된 송호근(宋鎬根·59)을 만나기가 만만치않았다. 9월에만 중국 두 번, 독일과 미국에 한번 출장을 다녀왔다. 1982년 회사를 세워 내년이면 창업 30년을 맞는데 그간 쌓인 항공기 마일리지가 400만을 넘는다.

 

'최고'에 이른 변()은 간명하면서도 단호했다. "마음먹으면 누구나 다 1등 될 수 있어요. 문제는 편한 길만 찾게 만드는 우리 교육에 있죠. 제 서울고 동창 중 의사·교수·법조인이 100명씩입니다. 기업인은 저 하나뿐이고요."

 

촌철(寸鐵)은 고단한 삶을 자양분삼는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란 팔자를 배신했다. 지금도 뭔가 대들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렇다. 그는 정주영, 김우중류()의 마지막 후예인지 모른다. '산업의 광인일기(狂人日記)'를 공개한다.

 

농부에서 기계공학도로

 

소년의 꿈은 농부(農夫)였다. 그 희망이 기계공학에서 기업인으로 바뀌었다. 고대 상과(商科) 나와 금융통화위원,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에 대기업 임원을 두루 지낸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있어 '거름'같은 존재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버지가 공직이나 기업 일은 잘하셨어요. 그런데 꼭 자기 사업만은 실패하셨습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며 전 이렇게 결론 내렸어요. '오너가 기술력이 없으면 결국 망하는구나'."

 

무슨 사업을 하셨길래요.

"처음엔 비누 만들다 망했습니다. 두 번째는 영사기 사업에 손댔다 망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였는데 지금 보면 시대를 너무 앞서간 측면도 있었지요."

 

기업에서 일 잘하는 이들이 왜 자기 사업은 못할까요.

"아버지는 대한전선 상무시절 그룹을 키웠어요. 예전의 고려화재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셨고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중소기업 사장은 밑바닥부터 뚫고 올라오면서 모든 걸 알게 되잖아요. 대기업은 그렇지 않거든요. 윗사람이 할 일 있고 아랫사람이 할 일이 따로 있으니까요."

 

아버지 때문에 삶이 바뀐 겁니까.

"집이 꽤 부자였습니다. 60년대에 일제 승용차가 있었을 정도니까요. 초등학교 때 농부가 되려 한 것은 당시 선생님께서 농촌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이고 부모님은 의사 되길 원했죠. 전 아버지가 사업에서 고전하는 걸 보고 상경계 아니면 공학을 전공하려 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공학이 좋을 것 같더라고요."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는데 졸업을 앞둔 1977년 묘한 인연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부산 태화의 부사장으로 경영책임을 맡고 계셨어요. 그 회사가 운동화, 고무장갑 같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미 고무산업이 사양(斜陽)길로 접어들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해 설날 세배 드리러 갔는데 회장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막 절삭공구를 생산하려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자네가 와줬으면 좋겠다'."

 

서울대 나오면 대기업을 택하는 게 상식인데요.

"잠시 고민했지만 학자될 거 아니면 일찍 직장생활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깃한 조건도 있었어요."

 

뭔데요?

"미국의 한 회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있었는데 1년 정도 보내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해 3월 입사해 공장설계, 자재감독을 맡다가 이듬해 1월 미국으로 갔지요."

 

33년 전 미국생활은 어땠습니까.

"영어 독해(讀解)는 자신 있는데 회화는 역시 안되더군요. 말 한마디 못하는데 어떻게 기술을 도입하고 차관을 얻겠어요. 은행하고 거래도 해야 하는데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고민 끝에 밤마다 영업하는 드럭스토어(Drug store)를 기웃거렸지요. 남들은 TV로 배운다지만 그건 대화가 안 되잖아요. 밤늦은 시간엔 손님이 없으니 점원들이 쉽게 얘기 상대가 돼줬거든요. 그러다 보니 회화뿐 아니라 다른 소득도 있었어요."

 

다른 소득?

"전 미국인이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인 줄만 알았어요. 알고 보니 그게 편견이더라고요. 서류에 오류가 생각보다 많았어요. 은행원이 계산도 못 했고요.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번번이 잡아내니 나중엔 기술제휴 맺고 있던 미국 회사의 부사장이 절 찾아왔어요. 그 사람 눈엔 제가 천재로 보인 모양인데 웬만한 한국인이면 다 할 수 있는 정도였어요. 미국에 머문 19개월간 제가 진짜 얻은 것은 영어가 아니라 자신감이었죠."

 

실력을 키우고 왔지만 정작 발휘할 데가 없었습니다.

"저는 의욕이 넘쳤지만 회사의 다른 분들은 회의적이었거든요. 1년간 회사로 날아온 수출관련 편지가 전부 무시되고 있었습니다. 전 그걸 다 뒤져 일일이 답장을 보냈어요. 원가를 낮추려 관련서류도 재검토했고요. 당시 제 밑에 직원이 2명뿐이었는데 셋이 회사 매출의 80%를 냈어요. 2계급 특진도 했고요. 그런데도 주위에선 '송호근이가 회사를 말아먹을 것'이라고 수군댔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둔 겁니까.

"그런 건 견딜 수 있었어요. 문제는 엔드밀이었습니다."

 

엔드밀이 준 창업

 

◀ 엔드밀은 규격에 따라 종류가 8만가지나 된다. 그 정교한 부속이 산업을 먹여 살리는과 같은 존재다.

 

송호근은 절삭공구 가운데 엔드밀에 주목하고 있었다. 다른 공구와 달리 원자재가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밖에 안 되는 고부가가치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날 외국에서 엔드밀 25만달러어치를 보내 달라는 주문이 왔다.

 

당시로선 '대박'이었겠네요.

"그걸 회사가 2년 넘게 우물대다 포기하고 만 겁니다. 분통이 터졌어요. 충분히 만들 실력이 있었는데 '근성(Spirit)'이 부족했던 거죠. 회의가 밀려오던 참에 우연한 사고도 일어났어요."

 

어떤 사곱니까.

"남이섬에서 열린 회사 야유회에서 족구를 하다 발이 부러졌어요. 전치 8개월의 중상이었습니다.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생각해보니 '이렇게 월급쟁이 하느니 차라리 회사를 차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엔드밀을 꼭 제 손으로 만들어 수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사직서를 냈지요."

 

처음 차린 회사 이름이 '양지원(養志園)공구'였습니다.

"양지원은 원래 아버지가 경기도 이천에서 하시던 목장 이름이었어요. 그 이름을 우리 형제가 지었는데 사업자 등록할 때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게 나중에 YG-1이 된 겁니다. 1은 최고라는 뜻도 되고요."

 

회사 차리려면 돈이 필요하지요.

"월급은 얼마 안 됐고 어머니가 제 앞으로 대치동 은마아파트 31평짜리를 사주신 게 있었어요. 1982년이었는데 그걸 2000만원에 팔고 지금의 본사 부근 부평에 공장을 세웠지요."

 

그 아파트 지금 10억 가까이 하는데 2000만원에.

"하하. 그거 팔고 어머니께 싫은 소리 많이 들었어요. 회사 하다 잘 안되면 마지막에 집이라도 한 채 있어야 하는데 왜 상의도 없이 덜컥 팔았느냐며 아쉬워하셨지만 제 눈엔 공장 만드는 거밖엔 아무것도 안 보였거든요."

 

회사를 차리고 나니 엔드밀을 곧 만들 수 있었습니까.

"사업자등록 마친 후 직원 12명으로 시작했습니다. 원래 경험 많은 사람들을 모았어야 했는데 전 공고(工高) 갓 졸업한 신입사원들을 채용했어요."

 

모험 아닌가요.

"거긴 장단점이 있어요. 처음엔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그것만 이겨내면 더 단결되거든요. 6개월 동안은 24시간 일했어요. 밥도 공장에서 먹고 잠도 공장 바닥에 깐 슬리핑백 속에서 잤습니다. 그렇게 여러 고비를 이겨내니 마침내 제대로 된 엔드밀이 나오더군요."

 

그다음은 바이어를 끌어오는 건데.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포기한 주문을 낸 사람에게 연락을 취했어요. '아직도 엔드밀 수입을 원하느냐'. 그랬더니 얼마 뒤 똑같은 25만달러어치 주문이 오더군요. 그쪽도 마땅한 구입처를 못 찾았던 거지요."

 

그건 우연히 굴러온 행운 같은 건데요.

"하루종일 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릴 들으며 제 머릿속에 의문이 끊이지 않았어요. '미국 바이어들이 비행기 1등석 타고 와 최고급 호텔에 머물다 가는 걸 보면 그만큼 남는 장사를 하는 것 아니냐'. 결론은 제가 미국에 가서 주문받아 오면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곧장 미국으로 날아갔지요."

 

무슨 비책(秘策)이라도 마련해놓고 떠났습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대한무역진흥공사(지금의 코트라)에서 얻은 공구상 리스트 5000개뿐이었지요. 현장에 가 부닥쳐보자는 마음뿐이었어요. ! 또 하나 있었다. 당시 동생이 시카고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가방에 샘플 잔뜩 넣고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 송호근 사장을 만난 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날도 공장은 돌아가고 있었다.‘ 품질, 혁신!’이란 구호가 걸린 공장에서 그가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종횡사해(縱橫四海)

 

송호근이 구한 비행기표는 노스웨스트에서 판 것 가운데 가장 쌌다. 350달러만 내면 정해진 기간 안에 이 항공사가 취항하는 도시를 1번에 한해 어디든 갈 수 있는 조건이 붙었다. 43일간 23개 도시를 도는 살인적인 일정이 시작됐다.

 

스케줄 짜는 데만도 머리에 쥐가 났겠습니다.

"예를 들면 뉴욕은 라과디아로 갔다가 다음엔 뉴어크공항을 이용하고 중부 쪽은 시카고, 밀워키, 매디슨을 한 번씩 이용하는 식이었어요. 숙박은 10달러짜리 모텔을 이용하거나 동생 집에서 신세졌어요. 밥은 굶거나 저녁 늦게 디스카운트되는 닭다리 몇개로 해결하는 식이었고요. 젊었고 무엇보다 '해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있을 때여서 별로 힘든 줄 몰랐습니다."

 

무작정 공구상에 들어가면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가지고 있던 리스트뿐 아니라 차 타고 가다가 간판이 보이면 무조건 들어가는 식이었지요. 물론 10곳 중 9곳은 대꾸 한마디 없이 박대하죠."

 

몇번 그런 꼴을 당하면 포기하는 게 사람 심리인데요.

"그런데 꼭 한군데씩은 오라는 곳이 있었어요. 그렇게 찾아간 공구상 가운데 한곳에서 샘플을 보내달라며 500달러짜리 수표를 받았을 때는 정말. 돌이켜보면 좌충우돌했던 그 시절이 제 사업인생 중 가장 흥미진진한 시간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얻었을 때는 안 먹어도 배가 불렀지요."

 

말씀을 듣다 보니 성공만 한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큰 위기가 있었어요. 수출용 엔드밀을 선적(船積)까지 마쳤는데 바이어가 저희가 보낸 샘플에 문제를 제기한 겁니다. 며칠간 잠을 못 잤어요. 사실 사소한 결함이어서 가격을 조금 깎아주면 합의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거든요. 선적을 마친 물량을 도로 국내에 들여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세계최고의 엔드밀을 만들겠다'는 원칙을 처음부터 쉽게 타협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량 회수했습니까.

"전부 들여오고 다시 만들었지요. 그러느라 자금이 달렸는데 아버지께서 당신 집을 담보로 해 대출을 받아주셨어요.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었는데 다행히 직원들이 묵묵히 제 몫을 다해줬습니다. 저도 힘들었지만 뿌듯했고요. 무엇보다 원칙을 지킬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문제의 그 수출물량이 두고두고 말썽을 부렸죠.

"6개월쯤 지나 다른 바이어에게 그 얘길 한 적이 있어요. 그가 그러더군요. '품질에 크게 문제가 안 되면 지금이라도 싸게 팔아주겠다'. 그래서 무심코 넘겼는데 얼마 뒤 다른 바이어에게 모골이 송연한 얘길 들었습니다. '훨씬 값싸고 품질 좋은 한국산 물건이 있다'며 우리 회사 제품가격에 불만을 제기한 겁니다. '아차' 싶었어요. 하자가 있는 제품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폐기한다는 원칙을 세운 게 그때부터였습니다."

 

'새옹지마'란 말이 생각납니다.

"정말 그래요. 독일이 원래 기계공업의 본산 같은 곳인데 제가 그 나라를 뚫은 것도 사실은 우연한 계기 때문입니다. 사업 초기 한국공작기계전시회가 열릴 때였어요. 한 독일인이 의사소통을 못 해 애먹는 걸 보고 가서 도와줬거든요. 그랬더니 고마웠는지 제 회사 샘플 2개를 달라고 하더군요."

 

그가 나중에 귀인(貴人)이 된 겁니까.

"별 기대도 안 했는데 얼마 뒤 우리 회사에 와 30마르크어치 물건을 사가더군요. 두 번째 와선 500마르크어치를 사갔고요. 2년 뒤에 그가 사간 물량이 얼만 줄 아세요? 무려 4~5만 마르크나 됐어요. 그렇다고 독일인들이 절대 허술하진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요.

"한번은 제품 15000개를 사가더니 하자의 경계선쯤에 있는 물건 3개를 도로 가지고 온 거예요. 15000개를 전부 조사한 것에 놀랐고 역으로 우리 회사 제품의 품질이 그만큼 높았다는 뜻도 됐지만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우리 회사가 유럽에서 독일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겁니다."

 

독일 못지않게 까다로운 나라가 일본이죠.

"일본은 독일보다 훨씬 외국에 대해 배타적입니다. 심지어 '한국이 절삭공구를 만드느냐'며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일본 공구유통업체를 찾아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자고 했어요. 회사 마크가 달리지 않은 상태에서 겨뤄보자는 거였죠."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다.

"최고 일제 제품과 품질이 동등한 것으로 나왔어요. 그런데도 그들은 이러더군요. '아직은 깎이는 맛이 틀리다'. 그게 무슨 소리겠어요, 한국을 인정하기 싫다는 거겠죠."

 

세계최고의 비밀

 

YG-1은 국내 7개 공장뿐 아니라 중국·인도·독일·캐나다·미국에도 공장이 있다. 제품은 70개국이 넘는 나라에 수출한다. IMF 때도 40% 가깝게 성장했다. 매출이 준건 글로벌 금융사태가 난 2009년뿐이다.

 

출근시간이 오전 750분이라고 들었는데 직원들이 불평하지 않습니까.

"저는 오전 650분까지 회사에 오는데요? 지금은 집에서 회사까지 20분 정도 걸리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10분 거리에 있었어요."

 

돈도 벌었겠다, 예전에 판 강남아파트 다시 살 생각이 들진 않던가요.

"전 회사와 집이 떨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스피디하게 경영할 수가 있어요. 우리 회사는 기안(起案)에서 결재까지 평균 0.7일 걸립니다. 제가 외국에 있을 때는 전자결재를 하고 외국공장과는 전화번호 4자리로 연결하지요."

 

노조도 없지요.

"열심히 일하고 제대로 대우해주면 노조 생각할 겨를이 없을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일할 시간도 부족하잖아요."

 

IMF 같은 때 정리해고를 안 했기 때문인가요.

"인적 구조조정이 꼭 나쁜 건 아닙니다.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고 비용을 아낄 수 있거든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직원들의 마음일 거예요. 한번 잘라내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회사를 불신할 것 아니겠어요? 우리 회사가 IMF 때도, 2001년 뉴욕테러 때도 괜찮았는데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해외매출이 30% 감소했어요. 중역들이 구조조정 이야길 꺼내길래 막아버렸어요. 급여를 10% 반납하겠다는 것도 '전 그런 것 원하지 않는다'고 했고요."

 

혹시 접대 같은 건 하십니까.

"제가 한때는 양주 2병까지 비울 정도였지만 우리 회사엔 접대문화란 게 없습니다. 정치권과도 거리를 두고요. 처음엔 섭섭해하지만 원칙을 세우면 다음이 편합니다. 바이어가 오면 밥은 사줘도 술은 절대 안 사줘요."

 

그럼 무슨 재미로 삽니까.

"제 항공사 마일리지가 400만 마일이 넘습니다. 지금은 1년에 200일 남짓이지만 한때는 300일 가까이 머문 적도 있어요. 전 김우중(金宇中) 전 대우그룹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에 동감해요. 돈 쓸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일하기 바쁜데요."

 

꼭 그렇게 말하다 나중에 정치판 기웃거리는 분도 있습니다.

"안철수 교수? 저도 그분이 왜 그리 됐는지 모르지만 실망했어요. 그가 말한 '기업가 정신'에는 동의하지만. 제가 기업을 떠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 무미건조하게 살면 가정에도 소홀하시겠네요. 나중에 더 나이 들면 부인이나 자식들에게 괄시당할 텐데.

"전 아이들 졸업식에도 한번 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아이들은 별 불평 없던데요."

 

본인은 기계공학을 전공하셨는데 자제들은?

"큰아들(송시한·31)은 인천과고 나와서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나왔고 둘째(송지한·28)도 인천과고 나와서 카이스트 산업공학 전공하다가 수학으로 바꿨어요. 조기졸업하려면 수학과 가야 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요."

 

70년대만 해도 기계공학이 한국의 미래라고 했는데 요즘은 천대받습니다.

"정말 그래요.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교수가 80명인데 학생은 20명뿐이라니. 우리 교육이 잘못된 거지요. 무조건 안전한 길로만 가라고 하니."

 

그래도 안전한 삶이 좋은 거 아닌가요.

"제가 서울고 23회 졸업인데 동창 중 의사가 제일 많아요. 기업하는 사람은 저뿐이고요. 그 인재들이 더 많이 기업에 뛰어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우리 회사 목표가 2014년에 수출 10억달러하는 거거든요. 물론 좋은 점도 있어요. 어디 아프면 찾아갈 사람 많으니까, 하하." 

 

< 조선일보 문갑식  2011.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