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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따로 붙어 사는 '근거리 가족' 현대판 씨족사회 만든다

풍월 사선암 2011. 5. 2. 21:42

따로따로 붙어 사는 '근거리 가족' 현대판 씨족사회 만든다

 

저출산·고령화 시대, 딴지붕 한가족 늘어같이 살면 불편, 가까이 살면 든든

고향에 혼자 남은 부모들 자녀들 있는 도시로 옮겨와

30~40분 이내 거리에 살며 쇼핑·외식·레저 등 일상 공유맞벌이 자녀는 육아부담 덜어

'2가구 동거형' 아파트 늘고 지방 공동화 현상 심해질수도

 

대구에 사는 주부 김모(64)씨는 올 초 아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를 왔다. 정든 고향을 등지고 늘그막에 상경(上京)을 결심한 것이다. 김씨의 새 보금자리는 아들이 사는 곳에서 차로 8분 거리에 떨어진 작은 아파트다. 김씨는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대신해서 한 살배기 손자를 돌봐 주면서 생활할 계획이다. 김씨는 "아들은 한집에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그러면 사소한 일로도 자주 부딪치고 갈등을 겪을 것 같아 거절했다""대구의 살던 집을 판 돈으로 아들집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구했는데 마음이 훨씬 편하다"고 말했다.

 

핵가족화와 산업화·고령화가 빠르게 동시 진행되면서 '근거리 가족'이란 신개념 공동체가 늘어나고 있다. '근거리 가족'이란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진 않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소비·문화 생활을 함께 공유하는 느슨한 형태의 새로운 가족 관계다. 일종의 '딴지붕 한가족'인 셈이다. 고도(高度) 성장기를 거치면서 자산을 차곡차곡 불려왔고, 은퇴 후에도 일정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50~70대 고령층이 이 같은 가족 제도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노후 생활을 자녀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력이 있기 때문에 독립된 주거 공간에서 나 홀로 생활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김동엽 미래에셋 은퇴교육센터장은 "나이가 들면 건강 문제나 정신적 소외감 때문에 불안해지는데, 자녀와 가까운 이웃으로 살면 심적으로 의지할 곳이 있다는 생각에 든든해진다""맞벌이를 하는 자녀들도 육아와 가사 부담을 덜 수 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라고 말했다.

 

자녀가 사는 도시로 이주

 

전통적으로 '가족'이라고 하면 한울타리 내에서 얼굴을 맞대며 함께 생활하는 구성원들을 일컫는다. 하지만 고령화·산업화·핵가족화 등 여러 복잡한 변수들이 이 같은 가족 형태를 빠르게 바꿔놓고 있다. 한집에서 생활하지 않더라도 이웃에 살면서 혈육의 정을 돈독히 하는 '근거리 가족'이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근거리 가족'은 편도 30~40분 이내 거리에 살면서 쇼핑, 외식, 레저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일상생활을 공유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부모 세대가 자신들의 정든 터전을 버리고 자녀들이 사는 곳으로 이주해서 뭉쳐 사는 형태가 많다는 것도 전통적인 가족 형태와의 차이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예전처럼 형제·자매 수가 많지 않다 보니, 자녀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 고향에는 노부모만 남게 된다. 이런 경우 자녀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부모가 고향 집과 땅을 처분하고 자녀가 있는 도시로 옮겨가는 쪽이 훨씬 쉽다. 이미 우리보다 앞서 저출산·고령화를 경험한 일본에선 이 같은 가족 형태가 일반화되어 있다. 노무라종합연구소(NRI)는 이 같은 가족 형태를 '보이지 않는 가족(invisible family)'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노부모는 은퇴 후에 자유시간이 많으니 자녀 세대의 육아나 가사 부담을 덜어주고, 자녀들은 정신적인 고독이나 건강 악화 등으로 불안한 노부모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으니 '보이지 않는 가족'이야말로 서로에게 윈윈(win-win)이 되는 관계라는 설명이다. 

 

맞벌이 부부에겐 '단비'

 

세계에서 가장 긴 근로시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맞벌이 부부들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가족 간의 유대감을 돈독히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고용 불안정·사교육비 증가 등의 요인들은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가족의 고유 기능은 계속해서 약해지고, 가족에 대한 인식 범위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

 

지난 1월에 나온 여성가족부의 조사 결과에서도 '배우자의 부모', 즉 시부모나 장인, 장모를 가족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절반에 그쳤다. 부모들 역시 며느리와 사위를 가족이라고 답한 비율이 5년 전엔 50%를 웃돌았지만, 이번 조사에선 20%대로 뚝 떨어졌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우리 가족'이라고 답한 비율도 각각 23.4%, 20.6%에 그쳤다.

 

'근거리 가족'은 이처럼 점점 소원해지는 가족을 다시 끈끈하게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접착제가 될 수 있다. 이미 맞벌이를 이유로 장인·장모나 시부모가 함께 모여 사는 모습은 낯설지가 않다. '뒷간과 처가는 멀수록 좋다'는 옛 속담과는 달리, 최근엔 손자를 중심으로 '한동네 사돈'으로 뭉쳐 살기도 한다.

 

근거리 가족이 바꿔놓는 경제의 신()풍속도

 

느슨한 가족 관계인 근거리 가족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생활 풍속도를 크게 바꿔놓을 수 있다. 자녀를 중심으로 시부모와 장인·장모가 옹기종기 모여 하나의 씨족사회처럼 무리를 이루며 사는 모습도 낯설지 않게 된다.

 

자동차를 구입할 때만 해도 '근거리 가족'인 경우에는 정원이 4~5명인 승용차보다는 여러 명이 탈 수 있는 미니밴이 편리하다. 부모와 함께 쇼핑을 하거나 여가를 즐길 기회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출입문 한 개에 부엌 한 개 등으로 판에 박힌 아파트 평면도도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다. 이른바 '2가구 동거형'을 기본으로 하는 효도(孝道) 아파트의 확산이다. 노부부와 젊은 아들 부부가 서로의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아들 부부는 부모를 직접 모시며 살고 노부부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가까이서 보면서 사는 형태다. 물론 화장실도 따로 있어서 생활하기엔 전혀 불편함이 없다.

 

도시에 살고 있는 자녀 곁으로 이사하는 노인이 많아지면서 도심 집중화 현상은 가속화할 수 있다. 본래 도심 지역의 주택은 교통이나 의료, 쇼핑이 편리해 고령자들이 선호하는 주거지이긴 하다. 하지만 저출산·고령화 시대의 산물인 '근거리 가족'의 확산으로, 도심 유턴은 늘어나고 이에 따라 지방 공동화(空洞化) 현상은 지금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불거질 수도 있다.

 

 

10명 중 9"은퇴 후 자녀와 따로 사는 게 편해"

 

60%"경제 지원도 필요없다"

 

"능력이 되면 따로 살 겁니다. 며느리 있으면 속옷 바람으로 집에서 왔다갔다 하기도 불편하잖아요. 친구들만 봐도 처음엔 같이 살기도 하지만 결국엔 다 분가합디다."

 

용인에 사는 자영업자 박모(54)씨는 현재 어머니(83)와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박씨 자신은 나중에 아들이 결혼을 하더라도 함께 살진 않겠다는 생각이다. 자녀와의 동거(同居) 대신에 독거(獨居)를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박씨는 "부모 자식 간이라도 따로 살아야 각자의 생활이 지켜질 수 있다"면서 "대신 자녀와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 자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노후'라고 하면 '자녀에게 부양받는 생활'을 떠올렸다. 하지만 요즘은 박씨처럼 나이가 들어도 자녀에게 의지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훨씬 많다.

 

본지가 이달 초 포커스컴퍼니와 공동으로 전국 기혼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은퇴 후에 자녀와 함께 살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61.6%의 응답자가 '따로 살고 경제적 도움도 받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응답자 10명 중 6명꼴로 자녀와 동거하고 싶지도 않고,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관계를 희망한 것이다. '경제적 돌봄은 받더라도 따로 살고 싶다'고 응답한 비율도 24.4%에 달했다. 결국 응답자 10명 중 9명은 자녀와 따로 사는 형태를 원한 셈이다.

 

노후에 따로 살아가겠다는 고령자들이 늘면서 주택을 담보로 매달 연금을 받는 '주택연금(종신형 역모기지론)'의 인기도 치솟고 있다. 지난 3월 기준으로 신규가입 건수가 284, 보증공급액이 3718억원에 달해 사상 최대치를 찍었다. 주택금융공사 관계자는 "주택연금은 장기간 가입을 전제로 해서 설계됐기 때문에 만약 3~5년처럼 단기간만 가입하다가 해지하게 되면 상당한 수수료를 물어내야 하는 등 손해가 만만치 않으니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경은 기자 / 2011.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