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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Cleopatra)

풍월 사선암 2011. 4. 8. 00:07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기원 전 50 년경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지난 달 323일 눈을 감았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그 이름을 높인 작품으로 '클레오파트라'의 생애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동생들과 두 번씩이나 결혼해 왕좌에 올랐고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이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했던 여인이었다.

 

 

기원 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사르의 막강한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는 계획을 세웠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몰래 그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연인이 되었음은 말한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왕좌에 앉혔다. 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고 피맺힌 복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기원 전 44315일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음 상대로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점찍었다. 삼두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클레오파트라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혼을 뺏기고 말았다.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행여 안토니우스가 권태를 느낄세라 늘 새로운 쾌락을 개발했고 날마다 산해진미에 악사와 무희를 동원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안토니우스는 이국의 여왕과 혼인식을 올릴 만큼 철저하게 여왕의 노예가 되었다. 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다.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하고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어진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고 안토니우스는 자결했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클레오파트라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졌다. 들라크루아는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파스칼의 유명한 말처럼 클레오파트라는 세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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