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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립니다

풍월 사선암 2011. 3. 1. 13:31

3·1절에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립니다.

 

독립선언서 발표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

 

3·1절은 191931,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1910822'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일제강점기). 일제는 식민지의 최고통치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으며, 한국사회를 식민지 지배구조로 재편하기 위하여 1910년대에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했다. 학교에서는 민족교육이 억압받고, 종교계에서는 민족적 신앙이 탄압 당했다.

 

정치·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수탈당했다. 1910년에 '회사령'(會社令)이 실시되어 민족자본가의 성장이 가로막혔다.

 

1910~18년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의 결과 한말 이래 불법적으로 토지를 침탈해온 일본인의 토지소유가 법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광대한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이때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하에 토지에 대한 지주의 권리만 인정했으며 경작권 등 농민의 여러 권리는 완전히 부정했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몰락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도시로 흘러들어 도시빈민·노동자가 되었다. 당시 노동자가 된 조선인들은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 등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했다.

 

이처럼 한일합병 후 극소수의 친일파·친일지주·예속자본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계급·계층이 정치·경제·사회 면에서 일제로부터 피해를 당했다. 그결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전민족적으로 고조되었다.

 

이러한 전민족적인 민족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1910년대에는 국외에서의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국내에서의 비밀결사운동, 교육문화운동 및 생존권수호투쟁 등을 통해 운동역량이 강화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1910년대말에 국제정세가 크게 변하게 되었다. 1918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가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했다.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민족해방운동을 고양시켰다.

 

민족자결주의가 대두하자 이를 민족해방의 기회로 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국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191811월 여운형·김규식·장덕수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중국에 온 미국 특사에게 전하는 한편, 1919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국내외 민족운동가들과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했다.

 

191812월 미국지역의 대한인국민회 총회는 이승만 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했으나, 미국 당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미국 대통령에게 3개항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도쿄[東京]에서는 19192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청원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소집 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2·8독립선언).

 

이러한 해외의 움직임을 알게 된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측 인사들과 이승훈 등 평안도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을 계획했다. 여기에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참여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 3개 교단이 국내 독립선언의 주축이 되었다.

 

이들이 준비한 운동계획은 독립선언과 일본에 대한 독립청원을 병행하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원칙에 따라 운동을 진행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언서, 파리 강화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일본정부에 보내는 독립의견서 등이 작성되었고, 2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그후 고종의 장례일인 3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운동을 계획·준비한 종교계의 '민족대표 33'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의 취지를 밝힌 다음 바로 일제 경찰에 자수했다. 원래 33인은 독립선언식을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학생들과 합의했었다.

 

그러나 33인은 공원에 모인 학생·시민 들이 전면적인 시위에 들어가 그들이 세운 비폭력 원칙을 깨뜨릴 경우, 일본·미국 등 열강의 호의를 얻어내지 못할까 우려하여 장소를 바꾸었던 것이다.

 

결국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시위대열을 이루었다. 독립선언식은 대중의 반일감정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는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31일 시위운동의 후속조치로 35일 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했다. 3월 상순 이후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던 만세시위는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운동은 5월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는 데는 지식인·청년·학생층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서울 등 도시지역에서 유포된 선언서,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하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각종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었다. 경기도 부천의 혈성단, 대구의 혜성단, 조치원청년단 등이 그 예이다. 이들과 함께 광범한 민중이 비타협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서울에서는 322일 노동자대회가 열렸으며 전차종업원, 경성 철도노동자 등은 파업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했다. 서울·평양·선천 등지에서는 상인들이 철시(撤市) 투쟁을 벌였다. 농촌에서는 횃불시위와 산 위에서의 봉화시위가 벌어졌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시위를 확산하는 만세꾼이 등장했다.

 

31일 이후 전국을 휩 쓸었던 시위운동 상황을 살펴보면 집회 횟수 1,542, 참가인원 2023,089, 사망자수 7,509, 부상자수 15,961, 피검자수 52,770,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

 

국내에서의 시위운동에 호응하여 간도·연해주·미국 등지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북간도에서는 313일 용정(龍井)에서의 독립선언식이 최초였으며, 서간도에서는 312일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에서의 독립선언 경축대회로부터 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연해주에서는 317일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독립선언과 시위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등지에서 주로 모금활동을 통해 임시정부의 재정이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선전활동을 지원했다.

 

이 운동은 극소수 친일파·친일지주·예속자본가를 제외한 전민족적 항일독립운동이자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투쟁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운동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결과 일제의 무단통치가 끝나게 되어 민족해방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으며, 운동이념상에서 복벽주의가 청산되었고 민주공화제 이념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었다.

 

그결과 공화제 형태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될 수 있었다. 또한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는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의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민족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하여 독립쟁취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전국적으로 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 운동을 처음 준비했던 33인이 일본·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가 독립을 선사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타협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이끌어가지 못했던 점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 내적 원인이었다.

 

운동과정에서 드러난 이러한 한계는 이후 민족해방운동에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3·1운동의 과정에서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 민중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민족이 해방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도 촉진되었다.

 

나아가 민중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그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점차 공감을 얻어갔다.

 


3.1 독립운동

 

1. 3.1독립운동의 배경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도 한다. 1910년 이래 한국은 일본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통치하에 놓여 있었는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항일독립투쟁은 각지에 의병(義兵)을 낳고 널리 민족계몽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일본은 이와 같은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항일독립운동 투사들을 학살 ·투옥하고, 일체의 결사(結社)와 언론활동을 금지하였다. 교육정책에 있어서도, 우민정책을 실시하여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누르고, 고도의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박탈하였다.

 

이러한 무단정치는 한국의 고유문화를 말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 ·광산 ·철도 ·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을 독점 경영하였으며, 한민족의 경제발전마저 극도로 제한하였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고, 특히 무력투쟁으로 혹은 외교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선두에 섰다. 한편 국내의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小作農) ·화전민(火田民)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생활난으로 인하여 만주(滿洲) 등지로 유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폭압(暴壓)은 지식인 ·학생 ·종교인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의 반일감정(反日感情)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일본의 무단정치를 겪고 있을 무렵,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고, 19181월 미국대통령 윌슨은 14개조로 된 전후(戰後) 처리원칙을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에 제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고 하는,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세계의 피압박민족에 대한 자극제가 되었다. 이 민족자결주의의 새로운 원칙은 항일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던 독립운동가 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류 속에서 1919121일 고종황제(高宗皇帝)가 갑자기 승하(昇遐)하게 되자 일본인들에 의한 독살설(毒殺說)이 유포되어 한민족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극도에 달하였다.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활동해왔으나 1917년 스톡홀름의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와 뉴욕의 세계약소민족회의 등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였다.

 

2. 3.1독립운동의 전개과정과 의의

 

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이고 대중적으로 확산 ·파급시키기 위해서는 이 운동의 필요성 ·성격 ·방향 ·이념 등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선언서, 독립선언서가 요청되었다. 원로 정객 및 지도자와의 수차에 걸친 교섭에 실패한 천도교측 중진들은 민중운동 3대 원칙에 따라 우선 그리스도교와의 연합을 모색하였다.

 

천도교와 그리스도교를 연결하는 데 공로가 있는 사람은 최남선(崔南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신민회(新民會) 때의 동지이기도 했던 언론인 출신의 이종일(李鍾一)의 숨은 공로가 이승훈과의 원만한 연락을 취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종일의 전보를 받고 상경한 이승훈에 의하여 조직 ·자금 등을 통해 관서지방 그리스도교도들과의 연합모색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12일 늦게 선천에서 상경한 이승훈은 그리스도교측과의 대동합류를 권고받고, 13일 귀향하여 교계 대표급 인사와 상의하고 합의를 보았다. 이승훈은 217일 다시 상경하여 서울 ·경기지역의 그리스도교계 중진을 만나 천도교측과의 합류교섭을 대찬성하고 봉기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스도교측은 222일까지 천도교측으로부터의 자금조달을 통해 대동연합전선을 펼 것에 찬성하고, 3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만세시위운등을 일으키려 하였다.

 

타교와의 연합은 210일경 최린이 한용운을 만나 그로부터 민중운동에의 참여와 민족대표로서의 참가를 쾌락받았다. 남은 문제는 천도교측이 그리스도교측과의 합의에서 결정을 본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인쇄, 그리고 배포 ·전달의 진행과정이었다.

 

최남선은 자원하여 온건한 내용의 독립선언서를 집필하였다. 그는 211일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완료하고 220일부터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227일밤까지 보성사에서 35000매를 인쇄완료하여 배포단계에 들어갔다.

 

독립선언서는 이미 제1차 인쇄가 완료(225)된 다음날인 26일부터 천도교 ·그리스도교 ·불교측과 남녀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천도교측은 인종익(印宗益) ·안상덕(安商德) ·김홍렬(金洪烈) ·이경섭(李景燮) 등에게 전달하여 각 교구로 배포되고, 그리스도교측에서는 이갑성(李甲成) ·오화영(吳華英) ·김창준(金昌俊) ·함태영(咸台永) 등에게 주어 각기 8도를 분담, 배포한 지 3일 만에 거의 전국적으로 배달되었다.

 

이것은 천도교의 각 교구와 그리스도교의 각 교회, 불교의 각 사찰로 배포 전달되었다. 학생측은 박희도 ·김문진 등에게 차례로 연결되어 김성국(金成國)과 강기덕 ·김원벽 등에게 넘겨졌으며 서울시내 그리스도교계 여학교에도 배포되어 31일에 여학생을 다수 동원할 수 있었다. 한편 민족대표로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 등이 동지 15명을 선정하고, 그리스도교측은 이승훈 등이 동지 16명을 선정하였으며, 불교측에서는 한용운이 백용성(白龍城)을 넣어 모두 33명이 되었다.

 

거사일자는 31일로 최종결정되었다. 228일 가회동 손병희 자택에서 최종 모임을 통해 서로 인사도 나누고 결의도 다짐하였다. 23명이 모인 그 회합에서 손병희는 이번의 의거는 민족적 지상과업임을 전제한 뒤 총의에 의하여 성취될 것을 굳게 믿는다고 격려 고무하였다. 그 모임에서 박희도의 긴급제의로 만세장소에 대해 폭동의 우려가 있다고 하자, 손병희가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할 것을 제의하여 31일 오후 230여 명이 동시에 모일 수 있는 방을 예약해 두기로 하고, 검찰에 자원피착(自願被捉)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3. 3.1독립운동 이후 일본의 식민정책과 독립운동

 

1). 을사조약 체결 전의 국내외 사정

 

- ·일 전쟁(1895) :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청과 일본의 이해가 대립되었다.

동학농민 운동의 진압을 위해 청군 파견을 요청하자 일본도 자국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들어 일본도 군대를 파견하였다.

·일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이 승리하였다.

 

- ·일 전쟁(1904):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다.

조선에서의 일본의 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2). 을사조약에 대한 대항 활동

 

- 을사조약의 체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다른 나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배할 권리를 인정하였다.

1905,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

 

- 을사조약에 대한 항거

헤이그 특사 사건 : 고종 황제는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구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렸다. 일본은 이를 구실 삼아 고종 황제를 물러나게 하였다.

신문 사설을 통하여 부당성을 알림 :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에 알렸다.

상소와 순국 자결 :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등은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통해 투쟁해 나갔으며 민영환은 목숨을 끊어가며 침략의 부당성을 알렸다.

의병 운동 전개 :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대항하였다.

 

3). 을사조약 이후 의병 운동

 

- 원인

1890년대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조약의 체결로 의병활동이 더욱 거세졌다.

 

- 활동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대항하였다.

1907년 일본이 군대를 해산시키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세하여 대항하였다.

의병의 무기는 보잘것없었으나 그 지역의 지형을 잘 이용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의병활동이 어렵게 되자 간도, 연해주,북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이 되었다.

 

- 의병장

처음에는 덕망이 높은 선비들이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점차로 전술이 뛰어난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크게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의병장 : 신돌석, 최익현, 민종식

 

4.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해 전개한 계몽 운동

 

1). 역사 연구

-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를 이어 가고 자주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우리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 대표적인 학자 : 박은식, 신채호, 황현

 

2). 학교 설립

- 교육 내용 : 우리의 말과 글을 가르쳐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 주었다.

- 대표적인 인물 : 안창호, 이승훈

- 대표적인 학교 : 대성학교, 오산학교

 

3). 나라 빚 갚기 운동

- 운동의 의미 : 나라에서 빚을 갚을 능력이 없자 국민의 힘으로 빚을 갚아 우리나라의 주권을 지키자는 운동이다.

- 대표적인 인물 : 서상돈, 양기탁

- 황성신문과 매일 신보 등의 후원으로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다.

 

 

 

4). 우리말 연구

- 우리말을 연구하여 우리의 얼과 혼을 지키려고 하였다.

- 주시경 선생은 국어의 문법과 맞춤법을 정리하였고 조선어 학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운동

 

3·1독립운동 직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하여 선포한 임시정부.

구분 : 임시정부

설립연도 : 1919413

소재지 : 중국 상하이

설립목적 : 독립운동

주요활동 : 내정·군사·외교·교육·문화 등의 광복정책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194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 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 임명되었다.

 

6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하였다. 96일에는 노령정부와 통합하고 제1차개헌을 거쳐 대통령중심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269월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부형태의 주류를 이루었다.

 

19458·15광복까지 상하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1939]·충칭[重慶,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외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하였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연통제에 따라 서울에 총판을 두고 각 도··면에 독판·군감·면감을 두었는데, 국내에는 9개도 145개군에 조직을 두고 만주에는 3개 총판부가 있었다.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 금 갹출운동 등 다양하였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북서지방에 집중되었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 임무를 대행하였다.

 

재정기반을 위해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하였으나 이 중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하였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으며, 뒤에는 장제스蔣介石의 원조금으로 충당되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신대한보(新大韓報)·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공보(公報)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La Coree Libre를 발행하였다.

 

초기의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94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조소앙(趙素昻)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은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010월에는 신규식(申圭植)을 광둥[廣東]의 쑨원[孫文]이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하였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되었다.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이다. 19321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東京義擧는 실패하였으나, 429일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충칭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을 맞이하자 11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三均主義)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라고 하여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하였다.

 

<자료출처: 구름과 불기둥>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아 이 나라를 보소서 /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