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십승지]무주군 무풍면

풍월 사선암 2010. 10. 8. 16:45

[십승지]무주군 무풍면

 

 

북한의 삼수.갑산과 남한의 무주(茂朱) 구천동은 오지(奧地)의 대명사다. 세상 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 구천동에서 왔나" 라고 할 정도로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 무주다.

 

무주 구천동에 인접한 무풍면은 봉황(중앙의 산)이 날개를 펴고 마을에 내려오는 형국이다.

들이 넓고 산세가 좋아 걸출한 인물도 기약한다.

 

97년 동계유니버사드 대회가 열려 세계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보다 앞서 지난 75년 덕유산 일대가 국립공원이 되면서 무주 또한 이름난 휴양지로 바뀌었다. 정감록 등 비결서는 무주군에서 가장 오지로 통하는 구천동을 제쳐두고 무풍면(茂豊面)을 십승지로 꼽았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구천동의 빠른 변화를 예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무풍면으로 가려면 무주읍에서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중간쯤에서 만나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을 통과해야 한다. 나제통문은 이름 그대로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대에 설치된 관문을 뜻한다. 무주읍에서 경북 성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가 개설될 때, 이 작은 터널도 뚫렸다. 자칫 그 이름으로 인해 고대에 개설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수 있지만, 통문의 역사는 70여 년밖에 안된다.

 

나제통문을 지나면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10리 계곡을 만나고 그 끝에 광활한 대지가 펼쳐진다.

 

대덕산(大德山)을 가운데 두고 남쪽에서 흘러오는 남대천과 동쪽에서 오는 무풍천이 만나는 사이가 들판이다. "쌀독에서 인심난다" 고 너른 들판은 한눈에 이곳의 인심을 대변해 준다. "살기 좋으니 인심이 온후할 수밖에 없지요. 여기에다 예부터 학문을 숭상해 예절 또한 군내에서는 으뜸이지요." 유한철(58) 부면장의 자랑이다.

 

무풍면으로 들어가는 30번 국도의 나제통문. 터널 위의 산이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한때 만명에 육박하던 인구가 지금은 3천명이 채 안된다고 하니, 이곳 역시 이농현상의 바람을 피하지는 못한 셈이다. 들이 넓어 쌀은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지금은 주로 담배와 고랭지 채소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무풍면의 중심은 옛 무풍현의 관청이 있던 현리다.

 

이곳은 삼도봉에서 뻗어온 삿갓봉이 마을의 주산이다. 티없이 맑은 산이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앞산인 무봉산(舞鳳山)은 무풍(茂豊 혹은 舞豊)이란 현 이름을 만들어준 산이다.

 

현리 새터에서 무봉산을 바라보면 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한 마리 큰 새가 날개를 펴고 훨훨 나는 형세를 볼 수 있다. 정말 아름다운 산이다.

 

무봉산을 낳은 산이 대덕산이다. 대덕산의 청룡 줄기가 무봉산을 낳고 백호 줄기가 시루봉을 만들었다. 그 사이가 증산리 석항동네다. 이곳에서 황인성 전총리와 김광수 자민련부총재가 태어났다. 한 마을에서 비슷한 때에 두 인물을 배출하니 동넷사람들은 지기(地氣)의 덕이라고 돌린다.

 

무풍은 단순한 피란지로서 십승지가 아니다. '삼풍에서 인재를 구하라' 고 했듯이 인물의 고장이다. 또 이곳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서부 경남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다. 그런 까닭에 여느 곳과 달리 비결파들이 즐겨 찾아 들지는 않았다.

 

 

● 무주는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과 함께 남한 오지(奧地)의 대명사다.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인식돼 왔기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 구천동에서 왔나?"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 무주의 무풍은 그야말로 심심산골. 백두대간의 한 자락이 덕유산과 삼도봉 사이에서 활 모양으로 휘어 돌며 싸안은 면(面) 단위의 산골이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당당히 사또(현감)가 다스렸던 하나의 행정 지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무산현으로 불렸던 이곳은 삼국 통일 후인 신라 경덕왕 때에 이르러선 무풍현으로 바뀐다. 두 지명에서 '무'는 같은 글자이므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문제는 '산'과 '풍'인데 이 두 글자가 어떻게 대역이 될까?

 

'무풍(茂豊)'에서의 '풍'을 '풍성함'의 뜻으로 보면 '무산(茂山)'과의 대역이 어려워지고 만다. 학자들은 여기서의 '산'과 '풍'을 똑같은 뜻으로 풀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연구'(신태현 저)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무산(茂山). 무(茂)의 훈은 '성 '. 산(山)의 훈은 '뫼'. 무산(茂山)을 '무풍(茂豊)'으로 개명한 것은 '풍(豊)'이 '풍(酉豊)'의 약자로 그 훈이 '술'이므로 '풍(豊)'으로써 '수리(봉우리)'에 훈차한 것이다. 따라서 '무산'이나 '무풍'은 '성한뫼'가 그 원이름이다."

 

즉, '풍'을 '풍성함'의 뜻으로 보지 말고, '산(봉우리)'이란 뜻의 '수리'로 보라는 뜻이다. '성한뫼'에서 '성한'은 '성하다(많다)'의 뜻임은 말할 것도 없다. 즉, '높고 많은'의 의미일 것인데, 지금의 무풍 지역으로 보면 그 지형상 딱 어울리는 땅이름이 아닐 수 없다.

 

 

▶현령 [縣令] - 현(縣)에 둔 지방장관.

신라 때에는 대·소현의 구별 없이 현령이라 하여 201명을 두었고, 그 위계는 선저지(先沮知)로부터 사찬(沙飡)까지였다. 고려 때에는 대현(大縣)에만 현령을 두고 소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현령의 품계는 7품 이상이었고 그 수는 모두 30명이었으며, 나머지 현은 속현(屬縣)으로 지방관을 두지 않다가 뒤에 차차 감무를 두었다. 공민왕 때에는 현령과 감무를 모두 안집별감(安集別監)이라 칭하고 5, 6품의 관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창왕 때 다시 둘로 환원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대현에 현령, 소현에 현감을 두었는데, 현령의 정원은 26명, 품계는 종5품이었다.

 

 

▶현감 [縣監] - 지방행정관서인 현(縣)에 둔 우두머리.

수령(守令)으로 총칭된 지방관의 하나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현의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현령(縣令)이라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큰 현에는 영(令), 작은 현에는 7품의 감무(監務)를 두었다. 이는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다가 현감으로 고쳐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으로 정하였다. 조선시대의 현감은 현령(종5품)이 관할하는 현보다 작은 고을의 원님이었다. 당시 지방의 말단기관장인 역(驛)의 찰방(察訪:종6품)과 동격인, 지방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는데, 조선시대의 현감은 138명에 이르렀다.

 

   

☞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무풍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

 

▶풍해도와 전라도의 일부 군현을 통폐합하다

사사(使司)에서 각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의 보고에 의하여 임금의 비준을 받은 다음, 풍해도(豊海道)의 연풍(連豊)·장명진(長命鎭)을 합하여 연풍 감무(連豊監務)로 하고, 문화(文化)·백령(白翎)을 합하여 문화현(文化縣)으로 하고, 재령(載寧) 삼지강(三枝江)을 합하여 재령현(載寧縣)으로 하고, 협계(俠溪)·신은(新恩)을 합하여 신은현(新恩縣)으로 하고, 가화(嘉禾)·영녕(永寧)을 합하여 가화 감무(嘉禾監務)로 하고, 영강(永康)·철화(鐵和)·은률(殷栗)을 각각 감무(監務)로 하였으며, 전라도의 동복(同福)·화순(和順)을 합하여 동복 감무(同福監務)로 하고, 무풍(茂豊)·주계(朱溪)를 합하여 무풍 감무(茂豊監務)로 하였다.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9월 28일(계미) 2번째기사 -태백산사고본-

 

▶ 경상도 남해현(南海縣), 전라도 금주(錦州)·무풍(茂?)·곡성현(谷城縣)에 지진이 있었다.

즉 태종13년인 1413년 무풍에도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1월 10일(경인) 1번째기사 -태백산 사고본-

 

▶전라도 무풍현·주계현을 무주현으로 병합하다.

전라도 무풍현(茂?縣)·주계현(朱溪縣) 두 현을 아울러서 무주현(茂朱縣)으로 하였다.

태종 28권, 14년(1414 갑오 / 명 영락(永樂) 12년) 12월 25일(갑오) 2번째기사 -태백산사고본-

  

▶무주현(茂朱縣) 세종때

무풍현(茂豊縣)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무풍(戊豊)으로 고쳐서 개령군(開寧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진례현(進禮縣)(금산)의 임내(任內)로 하였으며, 주계현(朱溪縣)은 본래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단천현(丹川縣)으로 고쳐서 진례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주계현으로 고쳐서 진례현의 임내로 하였다가, 명종(明宗) 7년 정유【송나라 효종(孝宗) 순희(淳熙) 4년.】에 무풍(茂豊)과 주계(朱溪)의 겸 감무(兼監務)를 두었고, 공양왕(恭讓王) 3년 신미에 두 현(縣)을 합하여 무풍 감무(茂豊監務)라 하였고, 본조 태종(太宗) 14년 갑오에 무주현으로 고쳤다. 명산(名山)은 상산(裳山)이다.【주계현 남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경상도 지례(知禮)에 이르기 57리, 서·남쪽으로 금산(錦山)에 이르는데, 서쪽이 10리, 남쪽이 28리요, 북쪽으로 충청도 옥천(沃川)에 이르기 8리이다. 호수가 1백 72호요, 인구가 7백 15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4명이요, 진군이 6명이요, 선군이 9명이다.

 

무풍(茂豊)의 성이 6이니, 심(沈)·박(朴)·하(河)·전(田)·주(朱)·황(黃)이요, 주계(朱溪)의 성이 6이니, 양(梁)·박(朴)·하(河)·주(朱)·최(崔)·호(扈)이다.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일찍 춥다. 간전(墾田)은 1천 5백 1결이요,【논이 9분의 2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감·호도·왕골이다. 토공(土貢)이 족제비털[黃毛]·칠·꿀·밀[黃蠟]·지초·배[梨]·가뢰[斑猫]·삵괭이가죽이요, 약재(藥材)는 백복령(白茯?)·녹각교(鹿角膠)·모과(木瓜)·당귀·작약(芍藥)·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인삼이다. 철장(鐵場)이 1이요,【현의 동쪽 10리 봉촌(蓬村)에 있는데, 연철(煉鐵) 2천 2백 근을 선공감(繕工監)에 바치고, 9백 14근을 전주(全州)에 바친다. 】자기소가 1이다.【현의 동쪽 가까운 산에 있는데, 하품이다. 】

 

상산 석성(裳山石城)【둘레가 2천 8백 20보(步)이며, 성안에 샘이 8, 큰 내가 2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작은 내가 3인데, 가물면 혹 마른다. 군창(軍倉)이 있으나 저장(儲藏)은 없다. 】역(驛)이 1이니, 소천(所川)이다.【본래 무풍(茂豊) 지경에 있었는데, 중간에 금산(錦山)에 이속(移屬시켰다가, 본조 태종(太宗) 14년 갑오에 도로 본현에 환속(還屬)시켰다. 】

 

월경(越境)은 금산의 옛 임내(任內) 안성(安城)의 땅이 현(縣)의 서촌(西村) 소이진(召?津)을 넘어서 우현(牛峴)에 들어와 있다. -태백산사고-

 

 

볼거리

 

▶백산제 : 현리.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 하연 부부의 초상화 (영정) 를 봉안.

▶삼도봉 등산 : 충청.경상.전라 삼도의 경계에 위치. 인근의 민주지산과 함께 등산객이 즐겨 찾는 산.

▶무주 구천동 : 덕유산 국립공원 내. 무주리조트 등 휴양시설 다수.

 

* 숙박시설 : 무풍면내에는 여관시설이 없음. 인근 무주 구천동에서 숙박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