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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트레즈 교도소에 울려 퍼진 첼로소리

풍월 사선암 2010. 6. 18. 23:05

 


 알카트레즈 교도소에 울려 퍼진 첼로소리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였던 악명 높았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부근 알카트레즈 교도소는 지금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 교도소에 한국의 음악가 안익태 선생이 감금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1933년 음악가 안익태는 첼로를 안고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미국 이민국에서는 그가 진짜 첼로연주자인지 의심하며 첼로를 검사하여야겠다고 했습니다.

안익태는 과도한 검사가 모욕적이라 생각하여 첼로 검사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장 안익태는 알카트레즈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날 밤 안익태는 오랫동안 첼로연주를 하였습니다.

온 감옥에 울려 퍼진 아름다운 첼로소리에 그가 첼로연주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소문은 곧 퍼져나갔고 한인교회의 황사선 목사까지도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황목사의 항의와 탄원에 힘입어 첼로연주자 안익태는 그 무서운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가치를 무엇으로 증명하고 있습니까?

 

 

 

안익태선생은 1906년 12월 5일 여관을 경영하는 중류가정의 셋째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으며, 6세 때에는 동네의 예배당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리어 집안 몰래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교회에서 풍금을 만져 볼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되면서 음악인으로서의 인생을 꿈꾸게 되었고, 7세 되던 해에 큰형이 동경에서 사다 준 바이올린이 있었는데,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더욱 음악에 매혹되어 6개월을 연습한 후에는 찬송가까지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예회 때마다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연주하며 마음껏 재능을 뽐냈다.

 

그 무렵 평양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신식 학교가 많았다. 안익태가 들어간 숭실중학교도 그랬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거의 모두 선교사였다. 소년 안익태는 교장 마오리 선교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또 방학 때는 서울까지 가서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첼로를 배웠다.

 

3ㆍ1 운동에도 앞장 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안익태는 마오리 교장의 도움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 도착한 안선생은 형과 함께 기거하면서 중학교에 편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주의 인물이란 딱지가 붙은 안선생을 받아주는 곳이 없어 결국 사설강습소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1년에야 동경 세이소꾸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이 되었다.

 

음악학교 예과1학년 여름방학에는 고국에 돌아와 평양을 비롯한 전국 가지에서 독주회를 개최했고, 이 독주회를 통해 그는 당시 서울과 평양에서 YMCA 총무로 활약하던 이상재, 조만식 선생과 알게 되면서 이들의 뜨거운 애국심은 일생을 두고 안선생의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1928년 본과 2학년이 될 무렵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가세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학비를 마련할 수 없게 되자 밤이면 동경회관이라는 양식집에 나가 '첼로'를 연주하여 돈을 버는 생활을 1년 동안 계속했다.

 

1930년 다시 국내로 귀국한 그는 평양 경찰들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게 되자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위해 미국행을 하게 된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신시내티 음악 대학에 입학하였고, 1932년 1월 음악대학 2학년 재학 중에는 신시내티 시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제1첼로 주자로 발탁되기도 했다.

 

1934년에는 헝가리로 건너가 리스트 음악원에 특별연구생으로 입교하여 '졸탄 코다이' 로부터 작곡을 배우고, 당시 유명한 '에르네스트 도나니' 음악교수로부터는 지휘법을 배우기에 이르렀다. 특히 '코다이' 의 민족음악에 대한 열정은 안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그후 안선생의 작품 속에서 풍겨 나오는 한국적 분위기도 바로 '코다이'의 민족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처음 들은 것은 3ㆍ1 운동 때였다. 애국가 가사에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을 붙여 노래하는 것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감동은 뒷날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했다.

 

애국가는 안익태가 1932년 미국에 있을 때 떠오른 악상을 그로부터 4 년 뒤에 완성한 것이다. 이 애국가는 안익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 안팎에서 널리 불려졌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나라의 상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1945년부터 안익태는 에스파냐 국적을 얻어, 마드리드 마욜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온 세계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1946년 스페인 백작의 딸 ‘로리타 탈라벨라’와 결혼한 안익태는 1955년 ‘이승만 대통령 탄생 80주년 기념 음악회’에 지휘자로 초청돼 25년 만에 그리운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안익태는 고국에서의 첫 연주회를 앞둔 1954년 12월 19일 쓴 편지에서 “내년(1955년) 정월에 일본, 마닐라 등에서 지휘여행을 마치고 3월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면서 한국에서 연주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박태연에게 당부했다.

 

1957년 고국에 돌아와 자신이 작곡한 '한국 환상곡' '강천성악' 등을 지휘했으며, 1961년에는 국제 음악제를 개최했다.

 

1965년 제4회 국제 음악제가 취소되면서 안익태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해 9월 1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병원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스페인의 마요르카에는 음악가 안익태를 길이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안익태의 거리'라는 이름을 붙인 길이 있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을 기리려는 국민들의 바람에 따라, 그의 유해는 1977년 고국으로 모셔 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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