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김재규 진술서 全文 - 박정희를 쏜 이유

풍월 사선암 2010. 1. 5. 12:34

 

김재규 진술서 全文 - 박정희를 쏜 이유

 

여자가 본인의 얼굴을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후두부를 향하여 약 50센치 거리를 두고...   육본검찰부   

..................................................................................................................................................................... 

 

피의자신문조서(제1회)

 

피의자: 김재규

위의 사람에 대한 내란목적살인 등

피의 사건에 관하여 1979년 11월17일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검찰부에서

검찰관 중령 전창열은

검찰서기 4갑 서윤석을

참여하게 하고 피의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문한다.

 

"불교를 믿습니다"

 

문: 피의자의 성명, 연령, 계급 군번, 소속, 본적, 주소를 말하시오.

답: 성명은 김재규

연령은 당53세 생년월일은 1926년 3월6일생

계급은 군번은

소속은

본적은: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읍 이문동 78번지

주소는: 서울 성북구 보문동 7가 134의 10

 

조사관은 피의사건의 요지를 설명하고 군법회의법 제231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알려준 즉 피의자는 신문에 따라 진술하겠다고 대답하다.

 

문: 피의자는 형벌을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답: 없습니다.

문: 훈장이나 기장을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답: 군사법 경찰관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습니다.

문: 학력과 경력을 말하시오.

답: 군사법 경찰관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습니다.

문: 가족사항을 말하시오.

답: 군사법 경찰관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습니다.

문: 종교를 말하시오.

답: 불교를 신봉합니다.

문: 생활정도를 말하시오.

답: 군사법 경찰관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습니다.

 

문: 입대 후 병력관계를 말하시오.

답: 군사법 경찰관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습니다.

문: 범행당시 직책을 말하시오.

답: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문: 중앙정보부장의 구체적 임무를 진술하시오.

답: 국내외 정보의 수집, 평가, 분석, 국내정보수사기관의 조정 통제 및 업무감사, 국내정보수사기관의 정보비 예산의 편성 조정 및 결산, 해외공관에 대한 정기적인 보안감사 및 정보비 사용 관계 확인 부수적으로 국내정치공작 등을 通하여 大統領을 直接補佐하는 任務입니다.

문: 피의자는 大統領 閣下 등을 시해한 사실이 있나요.

답: 예.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문: 그 일시 및 장소를 말하시오.

답: 1979. 10.26. 19:40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50번지 소재 중앙정보부 식당(신관) 거실입니다.

 

"대통령 각하 시해경위를 말한다면"

 

문: 대통령 시해경위를 상술하시오.

답: 사건 당일인 1979. 10.26. 16:10경 서울 중구 필동 소재 중앙정보부 남산분청 본인 집무실에서


집무 중, 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위 중정식당에서 각하를 모시고 만찬이 있을 것이라는 전화 연락을 받고 오늘이야말로 대통령을 제거할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하고 犯行을 결의한 후 비서실장을 시켜서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에게 전화를 걸도록 하여 본인이 직접 오늘 저녁 본인 집무실에서 같이 식사나 하자고 전화하고 18:30까지 위 집무실로 오도록 유인하여 놓고, 또한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에게도 위 시간에 오도록 지시하였으나 없다고 하며 추후 연락드린다고 보고하므로 본인은 위 궁정동 소재 본인 집무실로 출발 동일 16:30경 동소에 도착하여, 곧바로 2층 본인 집무실 겸 침실로 들어가서 동소금고에 거사용으로 보관 중이던 독일제 웰터 7연발 32구경 권총을 꺼내어 탄창에 7발을 넣고 한 발 한 발씩을 약실에 넣고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켜 보아 고장이 없음을 확인한 후 다시 실탄을 주워 모아서 7발을 모두 탄창에 다시 넣은 다음 1발은 장진한 채로 꺼내기 쉬운 !! ! 가 상부 2단 국제정보자료책 뒤! 편에 숨겨 두고 동소 침대에 들어누워 한참 동안 거사 후의 벌어질 일을 공상하고 있던 중,

 

위 김정섭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본인은 재차 사유를 말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18:30까지 위 본인 집무실로 오도록 지시하고 또 공상을 계속하다가 집무실 비서 윤병서로부터 17:40경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이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1층으로 내려 와서 응접실로 들어가니 위 김실장이 첫 마디가 “중정은 고생만하고 공화당 친구들이 다 망쳐 놓았소” 하기에 본인은 “할 수 없지요. 이제부터는 정대행이 출범하게 되면 하나씩 붙여주는 수밖에 없지요” 라고 건성으로 말하고 시간이 다 되었으니 식당으로 갑시다 하고 함께 나와서 옆에 있는 위 식당 정원에 들어서며 본인은 동현관문 우측 앞 정원 경계석에 위 김계원과 쭈그리고 앉아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며 김실장이 먼저

 

“차실장 그 친구 강경해서 야단이야. 야당친구 한 두 사람 말만 듣고 뽀르륵 각하에게 쫓아가서 보고한단 말이야”라는 말을 듣고 본인은 이미 대통령과 차지철을 제거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으므로 반말로 강경한 어조로 “그 친구 해치워 버릴까”하며 김실장의 표정을 살펴보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므로 찬동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하였으며 본인은 동의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때 18:05경 대통령과 차지철이가 도착하고 대문이 열리자 함께 영접 안내하여 위 식당 거실로 들어가 4인이 함께 배석해서 만찬이 시작되었는데 시작 직전 위 거실에서 대통령께서

 

“오늘 삽교천 준공식 광경 같은 것을 왜 KBS에서는 TV 방영하지 않느냐”고 하자 누군지 모르지만 “할 겁니다” 하고 대답한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는 본인에게 “신민당 공작은 어떻소” 하기에 본인은 “공화당 발표 때문에 다 틀렸습니다. 사표를 내겠다고 한 친구들도 다 강경으로 돌아 섰습니다. 암만해도 당분간 鄭대행 체재의 출범이 어렵겠습니다. 주류들이 강경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습니다” 하니 각하께서는 공화당 간부들이 약간 못 마땅 한 듯한 말을 하자 옆에서 차지철이가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 뭉게버리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본인은 마음속으로

 

“자-식 여전히 지랄이구나”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이어 각하께서는 “오늘 가보니 삽교천 공기는 좋고 공해도 없는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이요” 하시기에 본인은 “주류가 구축이 되어서 신민당이 초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국민들은 비주류를 사꾸라시하고 정운갑이는 친비주류이기 때문에 주류의 협조없이는 사태수습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던 당직자 백지화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하자 차실장이 또 옆에서

 

“그까짓 자식들 국회의원 그만둘 놈 하나도 없습니다. 언론을 타고 반체제 인사들을 의식해서 그럽니다. 까불면 싹 쓸어 버리겠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오가다가 차실장이 밖에 나가 여자 둘을 데리고 들어와 인사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서 순번으로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너희들 각오는 되어 있겠지"

 

그때 본인은 자리를 떠서 본관 집무실로 가서 위 육군참모총장과 中情 제2차장보가 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두 분이 저녁이나 하고 계시오. 저쪽 행사 끝나고 오겠소” 라고 말하고 곧바로 2층에 올라가서 미리 준비해 둔 독일제 웰터 32구경 권총을 본인의 下衣 시계주머니(본인이 일부러 보통보다 크게 만들었음)에 넣고 만찬식당으로 가다가 본관집무실과 위 식당사이에 있는 구관 정원에서 의전과장 박선호와 수행비서관 박흥주를 불러 세운 후 본인은 “오늘 저녁에 해치울 테니 너희들은 방안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나를 도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고 하면서 “자네들 각오는 돼 있겠지”하니 위 박선호가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고 답변하고 박흥주는 “네”라고만 응낙하였습니다.

 

그때 박선호가 “각하도 포함됩니까” 라고 물어보므로 본인은 “물론이다”라고 하자 박선호는 “오늘 저녁은 좋지 않습니다. 경호원이 7명이나 됩니다. 다음 기회로 미루시지요” 하므로 본인은 “안 된다. 오늘 저녁에 꼭 해야 되지 연기하면 보안이 누설될 염려가 있다. 나는 지금 모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하의 시계주머니에 꽂은 총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저쪽에는 육군총장과 김정섭 차장보도 와있다고 하니 박선호가 결심을 하였는지 “그러면 알았습니다. 저희 심복이 서너 명 있으니 그 애들을 배치할 때까지 30분간만 시간 여유를 주십시오. "라고 하므로 본인은 “알았다”고 답하고 만찬석으로 갔습니다.

 

그때 만찬석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전환되어 상의를 모두 벗고 있었으므로 본인도 마루에서 상의를 벗고 들어갔습니다. 그동안 노래를 부르고 술잔이 오가던 중 19:35경 식당종업원 남효주가 와서 본인에게 “부장님 과장님이 찾습니다” 하므로 다시 이석하여 부속실에 들어갔더니 박선호가 기다리고 있다가 “부장님 준비 다 되었습니다”라는 보고를 하므로 이를 듣고 다시 만찬석상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 노래가 잠간 중단되고 어쩐지 다시 정치이야기가 잠간 계속되어 김영삼 당수 이야기가 잠깐 계속되었는데 본인은 각하에게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시오” 하면서 오른쪽 옆자리에 앉은 김계원 실장의 왼쪽 팔을 본인의 오른 손등으로 치면서 “각하를 똑바로 모시시오”함과 동시에 하의 시계주머니에 감추어 두었던 권총을 뽑아 왼쪽 차실장을 향해서

 

“이 버러지 같은 새끼” 하면서 1발을 발사하고 연이어 앞자리에 앉아있는 대통령의 흉부를 향하여 1발을 발사하였는데 그때 차실장이 오른손을 들면서 “왜 이래”하므로 완전 명중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하고 다시 권총을 당기려고 하였더니 권총에서 탄피가 빠져 나가지 않으므로 계속 노리쇄를 전진 후퇴시키면서 밖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여자가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정원까지 나오면서도 계속 작동을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아 계속 작동을 하며 뛰어 들어가다가 마루에서 만찬석 문 앞에 서 있는 박선호를 보고 박선호의 총을 빼앗아 본인이 들고 있던 고장난 총은 입구에 던지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데 첫발이 정통으로 맞지 않았는지 차실장이 오른쪽 방구석에 있는 문갑을 잡고 밀고 나오므로 문갑의 중간부분 빈 공간으로 차실장의 복부를 향하여 재차 1발을 발사하고 동인이 넘어지면서 문갑이 넘어지자 식탁을 좌측으로 돌아 대통령 가까이 가자 여자가 본인의 얼굴을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후두부를 향하여 약 50센치 거리를 두고 1발을 다시 발사하여 완전 절명케 하였습니다.

 

"거사 후 이용하려 정승화 유인"

 

문: 육군참모총장과 중정 제2차장보를 사고현장 부근에 부른 이유는

답: 처음부터 거사 후에 이용할 목적으로 유인 하였는 바 거사 후에 곧바로 와서 육군총장을 곁에 두고 데리고 다니면서 딴 생각을 못하게 계속 접촉을 유지하면서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게 되므로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시키고 본인이 직접 사태의 진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미리 불러놓는 것이고 김정섭은 대통령과의 만찬관계로 본인이 직접 육군총장을 대접할 수 없으므로 그 공간을 메꾸기 위하여 본인의 대리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국내사태를 해설해 주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문: 만약에 상대방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답: 거사 후에 설득을 하여 혁명의 동조세력으로 이끌고 말을 듣지 않으면 협박 또는 감금을 해서 본인의 의도한 바대로 쫓아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바짝 붙어 따라다니며 감시를 한 것이고 우선은 사실을 속인 것입니다.

문: 식당정원에서 김계원 실장과의 대화 중 차지철을 제거한다고 제의한데 대하여 김실장이 반대하였다면?

답: 본인은 그냥 농담이오 하고 얼버무리고 또한 대통령 시해 현장에서 함께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문: 이 총이 범행에 사용된 권총입니까(차시검찰관은 압수된 증제36호 및 제26호를 제시하다)

답: 예 증제36호는 본인이 1차로 사용했던 권총이고 증제26호는 2차로 빼앗아서 본인이 체포시까지 지참시키고 있던 것입니다.

 

문: 이 옷과 구두 등은 무엇인가요.(검찰관은 증제6호 증제44호 및 제45호를 제시한다)

답: 단화는 범행 직후 궁정동 식당에 벗어놓고 온 본인의 구두이고 신사복 상하는 당시 본인이 입고 있었던 양복이며 손수건은 제 것이 아니고 만찬 시 사용하던 냅킨인 것 같고 또한 와이셔츠는 범행 당시 본인이 입고 있던 것으로 가위로 잘려진 부분은 손가락에서 다쳐서 난 피가 묻은 부분입니다.

 

"나는 한다면 합니다"

 

문: 범행당일 위 식당 만찬석에서 술은 어느 정도 드셨나요.

답: 평소에는 건강 때문에 술을 통하지 않았으나 그날은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소주잔으로 한 잔 정도 하였으므로 혈액순환이 왕성할 정도의 주기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문: 범행직전 김계원 실장을 툭 치면서 “각하 잘 모시시오”라고 한 뜻은.

답: 별 뜻은 없고 일을 결행하기 직전의 기합의 일종입니다.

문: 대통령을 시해한 직후 피의자가 행동한 경위를 상술하시오.

답: 그 직후 마루로 나오다가 거기에 서있는 김계원 실장과 마주치게 되었는 바 본인은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안유지를 철저히 하십시오” 라고 하니 위 김실장이 “뭐라고 하지”하고 반문하므로 본인은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던지 적당히 하십시오” 라고 말하니 김 실장이 “하여튼 알았소” 라고 대답하므로 본인은 김 실장도 완전히 납득이 되었구나 라고 행각하며 와이셔츠 차림에 맨발로 본관 쪽으로 뛰어갔습니다.(박선호로부터 빼앗은 38구경 리벌버권총은 범행 직후에 본인의 하의 오른쪽 주머니에 넣은 채로 소지하고 있다가 본인이 체포 시에 함께 압수되었습니다)

 

본관 1층의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비서에게 물을 달라고 하여 마시고 육군참모 총장에게 대통령 시해 사실은 숨기고, 급히 제2차장보와 함께 내 차에 타라고 독촉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인 차에 운전수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총장, 김정섭 등을 탑승시키고 部를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문: 그런데 남산정보부로 출발하였는데 어떻게 육본으로 들어왔습니까.

답: 그 후의 경위를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산중정으로 향하던 중 차안에서 육군총장이 “무슨 일입니까”라고 묻자 본인은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대통령임을 표시하면서 바른손인지로 ×자를 그리면서 서거하셨다고 표시하자 총장은 “각하께서 돌아 가셨습니까”라고 반문하므로 본인 대답을 회피하고 “보안유지를 해야 합니다. 적이 알면 큰일 입니다” 하니 총장이 “외부의 침입입니까. 내부의 일입니까” 라고 재차 반문하므로 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본인 당신의 양어깨에 국가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잘해 주셔야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던 중 차는 어느덧 퇴계로 근방에 이르렀는 바 본인은 그때 총장에게 “어디로 가지요”라고 하니 총장이 본인에게

 

“육본으로 가시지요”하고 앞자리에 앉은 박흥주는 “그게 좋겠습니다”라고 동의하므로 차는 세종호텔 앞에서 남산쪽으로 방향을 돌려 후암동 및 8군 영내를 거쳐서 육본 방카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도중 후암동 근방 차중에서 박흥주로부터 양복 상의를 받아 입고 박흥주의 신발을 빌려 신었습니다. 육본에 도착하여 방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처음에는 못 들어가게 하므로 신분을 밝히어서 문을 열고 방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국방장관 및 각 군 주요 지휘단이 들어 왔습니다.

 

"이리로 오시오"

 

조금 있다 박흥주 대령이 국방장관에게 “김계원 실장을 찾으니 청와대에 국무총리께서 같이 계신다”고 하며 “그리로 오시랍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을 듣고 본인은 “그쪽 사정도 모르고 어떻게 국방장관과 각 군 총장이 갈 수 있나”하며 김정섭 차장보에게 “김계원 실장을 이리 오라고 하시오” 라고 하니 국방장관께서도 동의 하였습니다.

 

그때 2차장보가 김계원 실장에 걸은 전화를 바꿔받고 김 실장에게 본인은 “접니다” “이리 오시오”하니 김 실장이 “큰 영애가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고 묻기에 자기는 다른 데 계신다고 얼버무렸는데 또 물으면 뭐라고 하지"라고 말하므로 본인이 “잘했소”하고 대답하는 순간 그때 직감적으로 김 실장이 “보안유지를 철저히 지키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안심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박흥주를 시켜 다시 김 실장과 통화 하게 되었는 바. 본인은 여기 국방장관과 각군 총장이 다 모여 있으니 이리로 오십시오 라고 하니 김 실장이 “총리께서도 여기 계시니 이리로 오시오”라고 하므로 본인은 “안 됩니다 지금은 못 갑니다. 국무총리를 모시고 실장께서 이리 오시오!(평소에는 김 실장에게 존칭을 사용하였으나 존칭을 생각하고 강경하게 명령조로 말하였음)"라고 하니 김 실장이 전화에서 잠깐 멈칫 하는 것 같더니 알겠소. 내가 그곳으로 가겠소(본인은 그때 느낌이 김 실장이 내가 육군총장을 인질로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응락 하는 것 같았음)하며 전화를 끊었었습니다. 그때 육군총장은 상황실 방으로 나가서 무슨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습니다.

 

체포된 경위

 

본인이 방카 안 총장실에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던 중 동일 21:00경 김계원 비서실장. 국무총리 내무 및 법무장관과 유혁인 수석비서 등이 방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후 확실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기억나는 것은 국무총리께서 비상계엄선포를 위해서는 국무회의 의결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유병현 대장과 외부장관에게 한미연합사 및 대사관에 연락하라고 지시하고 국방장관실에서 23:00경에 국무회의를 소집하니 연락하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때 법무장관이 “비상계엄의 사유를 명백히 해야 한다”고 하므로 본인은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1주일간이나 그 행적을 보안유지 하였는데 우리는 왜 며칠간 보안유지를 못합니까. 그 이유는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계엄선포하면 되지 사유를 자세히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강조했습니다.

 

그 후 동일 22:40경 국무위원 일행이 국방부로 자리를 옮기고 총장 집무실에는 본인 김 실장, 김정섭 차장보만 남게 되었는바 본인은 김 실장만을 옆의 총장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김 실장이 먼저 “이 사람아 어떻게 할라고 각하까지 그렇게 했어” 하므로 본인은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시오. 사태 수습이 더 급선무입니다. 보안유지를 해야 됩니다. 최단 시일 내에 계엄사령부 간판을 내리고 혁명위원회로 간판을 바꾸어 달아야 합니다”라고 하니 김 실장이 “알겠소”하므로 본인은 안심하였습니다. 그 직후 나도 김실장과 같이 국방부 장관실로 올라갔습니다.

 

문: 國防部로 올라가서 어떻게 하였나요.

답: 본인은 국방장관실에 들어가 있었는데 장관실 회의용 탁자의 제일 상석에는 국무총리가 앉고 왼쪽 첫 번째로 본인 다음 서종철 특보, 그 다음 유혁인 정무 제1수석 반대편 맞은 편 즉 국무총리의 오른편에는 김계원 실장 두 번째로 부총리 그 다음 문화공보부 장관 등이 배석하고 있었고 국무위원들은 국방부 회의실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장관실에서의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말하면 유혁인 수석비서가 “제가 오다보니 중앙청 부근에 기자들이 웅성거리고 있는데 뭔가 눈치를 챈 것 같다"고 하므로 본인은 김정섭 차장보에게 국내보도를 철저히 통제하고 혹시 외신기자들이 눈치 채고 전파를 날리지 못하도록 전재덕 차장에게 통제하라고 전할 것을 지시하고,

 

문화공보부장관이 “계엄선포의 이유를 국민에게 알려야 할 텐데 뭐라고 발표 합니까” 라고 묻자 본인은 “국내에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선포한다고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니 국무총리께서 “국무위원들에게는 비상계엄 선포의 제안 설명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하지요” 라고 하며 당혹한 표정을 지으니 부총리가 한 참 생각하다가 “전국에 긴급사태가 발생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자 다시 국무총리께서 “국무위원들에게는 사실대로 알려야 될 게 아닙니까” 라고 설왕설래 하다가 결론을 얻지 못하고 23:30경 국방부 회의실로 국무총리가 자리를 옮기면서 “김실장께서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설명을 좀 해 주십시오” 라고 하자 김실장은 “총리께서 하십시오. 각하께서 유고라고 계엄선포 이유를 설명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며 자기는 국무위원이 아니므로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본인 서특보 유혁인 수석 金실장만이 남아있는데 익일 27일 00:25경 국무총리께서 국무회의 도중에 나와 비상계엄을 27일 04:00부로 선포한다고 결정되었단 이야기를 듣고 앉아 있다가 문득 비서실장 자리를 보니 비어 있어 궁금히 여기던 중 동일 00:03경 국방장관 부속실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비서실장이 본인을 찾는다고 하여 장관실 입구 부속실로 들어서니 동소에 있던 헌병 2명이 본인을 체포하였습니다.

 

"뒷설거지를 내가 해야"

 

문: 왜 대통령을 시해하였나요.

답: 본인은 중앙정보부장직에 있으면서 현 유신체재와 이를 방호하기 위한 긴급조치의 맹점과 부작용에 관하여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철폐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순리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하여야 하는데 현 체재는 강한 체재이므로 권력의 핵인 대통령을 살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거행하였습니다.

 

문: 그렇다면 왜 차실장까지 살해하였나요.

답: 본인이 거사를 하기 위하여는 장해자인 차지철과 수행경호관들과 함께 처리하여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또한 항상 차지철이 강경한 발언과 월권적 행동으로 농간을 부리어 본인이 각하에게 드린 건의가 좌절로 돌아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함께 제거하였습니다.

문: 그런 순수한 목적이라면 대통령만을 제거하고 현장에서 자살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지 않나요.

답: 물론 본인의 목적을 문서로 남겨 놓고 위와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본인이 살아남아야만 대통령 제거 이후의 혼란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뒷설거지를 하고 본인의 구상대로 통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 각하로부터 야단을 맞은 사실이 있나요.

답: 근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사태 수습에 있어서 중앙정보부장의 직책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수습책을 건의하였지만 최근에 들어 자주 받아 들여지지 않아 대통령 각하로부터 질책을 당한 것은 사실이나 본인이 무능력하다고 각하께서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형제간의 이권개입 문제에 개입 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금년 4월경 각하의 개인 서신으로 “계씨인 김항규가 사업상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는데 주의하라는” 내용의 경고를 받은 바 있기는 합니다만 당시 중정 감찰실장인 김학호 소장으로 하여금 김항규의 비위사실 및 경위를 재조사하여 각하에게 보고 해명한 사실이 있으나 별것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또한 요직 개편설 문제는 사실 무근입니다.

 

문: 전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답: 차지철이 본연의 업무인 경호업무 외에 월권을 하여 정치문제 등 광범한 업무에 관여하고 의견 및 주장에 있어서 본인과는 정반대로 강경일변도였으므로 못마땅하게 늘 생각한 것은 사실이고 차지철이 군 후배이고 연하자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또는 연장자에게 오만불손하고 방자한 행동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으나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문: 범행의 구체적인 계획은 언제부터 어떻게 세웠나요.

답: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대통령 각하를 시해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각하께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 ‘가동’에서 만찬을 하시는 기회를 이용 시해하려고 마음을 먹고 이번 거사와 같이 3군 참모총장을 이용하려고 각하께서 도착하는 시간과 약30분 간격으로 본관집무실에서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고 불러놓았는데 당시에는 대통령 각하의 주변경호가 삼엄하다고 판단되어 거사에 성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각 총장들을 김학호 실장으로 하여금 대신 저녁 대접케 하였는 바 본인이 각하와 만찬을 끝내고 돌아오니 그때까지도 각 군 총장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본인이 연희동 소재 명불상 음식점에서 술을 대접하고 끝낸 일이 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최근 일련의 정치사태가 경화된 정국으로 발전하여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또한 10월19일 본인이 대통령 각하의 명에 따라 ‘부산지역의 소요사태’를 관찰하려고 다녀왔던 바, 소요사태의 성격이 일반인 숫자가 월등한 것으로 보아 이는 서민의 조세정책에 대한 저항 및 정부불신임에 기인한 민란이라고 판단되었고 이것은 조속한 시일 내에 진정되지 않을 것이고 5대도시(서울 대구 등)로 확산되어 현 정권이 국내적으로 한계점에 이른 것이라고 판단되었고

 

국외적으로는 미국을 위시한 우방 국가들이 유신체재를 非민주적이라고 평가하므로 대외의존적인 한국경제가 여러 가지로 난관에 봉착할 것으로 판단, 지금이 거사의 적기로서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는 식당밖에도 경호차가 2대 정도 대기하고 경호관 숫자도 7~8명 정도여서 경비가 삼엄하였으나 최근에는 밖에 경호차도 대기치 않고 경호관도 4~5명 정도여서 경비가 허술하므로 더욱 용이하였고 궁정도 소재 위 식당은 전부 본인의 심복인 경비원들이 경계를 담당하는 중정자체 시설이므로 거사에 용이한 점 등을 감안, 범행 장소로 선택하였고 대통령과 차지철은 본인이 직접 시해하기로 하고 수행경호관들은 중앙정보부 비서실 직원인 본인의 심복으로 처치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대통령과 차지철을 본인이 직접 하지 않으면 실패할 염려가 있고(심정변화로) 또한 다른 직원들은 접근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권계획이 있었다"

 

문: 大統領 弑害후의 범행구상 내용은 언제부터 어떻게 구상하였나요.

답: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보안유지를 위하여 단독으로 구상하여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조시대 이래 2人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골똘히 구상했습니다. 그 내용은 대통령 각하를 시해한 후 우선 늘 참석하는 김계원 실장에게는 보안을 유지시키고 현장목격자로서 동조자로 확보하고 현장부근에 군 실력자를 유인 대기시켜 놓고 거사 직후 본인의 거사 목적과 의도를 설득 또는 협박하여 끌어들이고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계엄사령관을 조종하여 사태를 장악하고 계엄사령부를 서서히 군사혁명 위원회로 전화시키어 국민혁명으로 이끌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단시일내에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기존 정당을 해체시키고 집행기관인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은 본인이, 부위원장은 육군참모총장으로 하여 군인들로만 구성하고 이를 감독하기 위하여 혁명회의를 설치 구성함에 있어서는 본인이 의장이 되고 국무총리는 부의장으로 하고 혁명위원은 관구사령관급 이상의 육군주요지휘관, 함대사령관급 이상의 해군주요지휘관 작전사령관급 이상의 공군주요지휘관 도지사급 이상의 각료전원으로 하고 다시 在京지구에 재직하는 사람은 상임의원으로 지방에 재직하는 사람은 비상임 의원으로 구성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혁명회의는 입법과 행정을 관장하고 부설기구로서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그 산하에 설치하되 혁명검찰부는 군민합동으로 참신한 검사와 군검찰관으로 구성하고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관급으로 구성하여 유신헌법 기초에 참여한 자. 5·16혁명 주체로 권력 주변에서 치부한 자 및 악덕기업 및 특혜 재벌 등 비 동조 세력을 처단하고 재산을 국고에 환수한 후 본인의 거사목적과 의도를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여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헌법기초위원회를 설치하여 국민이 원하는 헌법만을 연구 작성케 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하므로서 확정시킨 후에 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대통령 시해 후의 정국혼란을 수습하고 주도권을 장악할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였습니까?

답: 기존의 정치인 중 여당권에서는 대통령감이라고 생각되었던 인사는 전부 부정부패에 관련되어 있어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었고 야당권에서는 김대중이는 사상적인 하자가 있어서 곤란하고 김영삼 의원은 일응 출마는 할 수 있지만. 그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고 이철승 의원은 당 자체에서 사꾸라시 하므로 국민의 지지기반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통령 시해 후의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적임자는 우선 본인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과도기적 단계를 일정기간 지나 사태를 수습한 후에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려고 한 바 대통령 출마후보자는 일응 최규하 국무총리나 태완선 유정회 의장 등을 꼽을 수 있고 본인도 상황에 따라서 출마여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습니다.

 

"정보부와 군을 조종하면 된다"

 

문: 이번 거사를 위한 동조세력 규합은 어떤 방식으로 하려고 하였나요.

답: 별도의 조직을 활용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기존체재의 조직을 설득 내지는 협박을 통하여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중앙정보부 조직은 본인이 약 3년간 정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부하들이 본인의 의도를 잘 받들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무력은 없지만 전국적인 광범위한 조직이고 군 조직은 본인이 오랫동안 몸 바쳐 왔기 때문에 본인이 의도한 바의 혁명목적을 제일 먼저 동조할 것으로 생각하였고 평상시에도 본인은 군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주 접촉과 노력은 하였으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안문제가 있어서 의도를 노출시키거나 거사에 가담하라고 권유한 사실은 없습니다.

 

"김계원, 차실장에 불만 터뜨려"

 

문: 대통령을 시해한 후 어떠한 방법으로 범행을 은폐하려고 하였나요.

답: 궁정동 소재 중정식당은 중정자체의 시설임을 주장하여 비상 국무회의의 결의 하에 따라 그날 밤으로 본인이 평소부터 신임하던 안전국장 김근수 등 안전국요원으로 하여금 궁정동 현장에 보내어 궁정동 소재 보안을 유지시키고 사건현장은 안전국 요원이 조사 중이라는 구실로 일체 비밀로 하고 본인이 의도하는 혁명이 성공단계로 접어든다고 판단될 때 국민 앞에 진상을 발표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이번 범행이 실패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답: 결국은 보안이 유지되지 않고 가장 믿었던 김계원 실장이 너무 빨리 변심을 하였기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 목적이 채 관철될 시간여유가 없어 중도에서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문: 김 실장과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평소의 관계를 아는 대로 진술하시오.

답: 김계원 실장이 부임하고 2~3주일 후에 실장실에 찾아갔더니 차 실장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면서 “저 친구하고 담판을 내던지 무슨 수를 써야겠다”고 벼르는 말을 들은 바 있고 그 후에도 자세한 날자는 기억할 후 없으나 차실장과의 의견충돌 및 사소한 시비로 큰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수차에 걸쳐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간의 관계는 성격상으로 보아서도 근본적으로 좋은 관계는 아니라는 것은 단정할 수 있습니다.

문: 참고로 더 할 말은 없나요.

답: 모든 일련의 행위는 저는 저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했습니다. 후회를 한다던지 하는 것은 없습니다.

문: 지금까지의 진술에 허위 사실은 없는가요.

답: 예 사실대로 진술하였습니다.

 

조서말미용지

위의 조서를 진술자에게 열람하게 하였던 바 자기가 진술한 대로 틀림없으며 오기나 증감 변경할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므로 간인한 후 서명 무인하게 하다.

 

서기 1979년 11월17일

진술인 성명 김재규 인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검찰부

검찰관 중령 전창열

검찰서기 4갑 서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