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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相英 부산시장은 왜 목을 매서 자살했나

풍월 사선암 2009. 6. 19. 07:55

安相英 부산시장은 왜 목을 매서 자살했나


安相英(안상영·66) 부산시장은 지난 2월4일 새벽 1시15분 부산구치소에서 목을 매 生을 마감했다. 2003년 10월16일 1억원의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지 석달 보름 만의 일이었다.

 

400만 시민의 살림을 책임졌던 그가 왜 자신의 속옷으로 끈을 만들어 목을 맸을까? 그는 왜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 빠졌을까? 도대체 석 달 보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安시장은 구속 기간 내내 일기를 썼다.

 

그가 남긴 두 권의 일기장 가운데 한 권은 다 쓴 것이었고, 나머지 한 권은 3분의 1쯤 기록을 했다. 구치소에서 제공한 60쪽짜리 노트였다.

 

구속 첫날 부산 구치소에서 밤을 보내면서 安시장은 이렇게 다짐한다.

 

<1.5평 협소한 공간에서 인생을 관조할 기회를 주셨다. 직원들이 안정을 찾게 하고, 시장을 믿게 해야 한다. 변호사가 역할 다하도록 독려해야 한다>(2003년 10월16일)

 

安시장은 지난해 10월23일 기소됐다.

 

기소되자 변호인을 늘리고, 보석신청을 준비했다. 일기장에는 부산시 업무가 신경이 쓰였는지 市政(시정) 관련 내용이 많다.

 

安시장은 10월24일자 부산일보의 칼럼에 고무됐다. 安시장이 목청을 높여 검사에게 하고 싶었을 얘기들을 담은 칼럼(논설위원 정서환)이었다.

 

부산일보의 문제 제기, 「100억은 출퇴근 조사, 1억은 구속」

 

<安시장은 수뢰혐의를 극구 부인한다. 「400만 시민의 대표라는 시장이 사나이답지 못하다」는 여론이 있지만, 「검찰의 주장에 무리는 없는가」 하는 목소리가 만만찮다. 검찰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마당에 굳이 구속 수사를 강행해야 하는가 하는 의견도 있다. 참여정부의 검찰이 의욕이 너무 앞서거나 아직도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시중에는 「~카더라」식 뒷얘기가 무성하다. 「왜 최도술과 安시장은 같은 날 구속되었을까」, 「왜 100억은 출퇴근 수사를 하고 1억은 구속수사를 하는가」?>

 

그래선지 10월25일 일기에는 「65세에 투쟁의 의지가 되살아난다. 이 사회의 모순 부조리 人心, 인간성」이라는 글이 등장한다. 그는 「건강을 잃으면 무엇하나 할 수 없다. 나의 주변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위해야. 내가 있다」고 다짐한다.


安시장이 구속된 혐의는 「1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2000년 4월경 서울 자신의 집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길에서 진흥기업 朴英俊(박영준·73) 회장으로부터 1억원을 받았다」는 것이 검찰의 起訴(기소) 이유다. 뇌물을 받은 지 3년6개월 만에 구속된 것이다.

 

朴회장은 검찰에서 「진흥기업 소유인 부산 도심의 부산 고속버스터미널을 부산 외곽 그린벨트로 이전하고, 터미널 부지에 대한 용도 변경을 신속하게 처리해 달라고 뇌물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朴회장의 진술이 검찰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였다.

 

安시장의 변호인단은 『고속버스터미널을 옮기는 계획은 이미 1995년에 계획되어 安시장이 부산시장에 취임하기 전에 관계 법령이 고쳐졌다』고 주장했다.

 

柳秀烈(유수열·48) 변호사는 『칠십을 넘긴 노인네(박영준 회장)가 1억원이 든 13kg짜리 가방을 들고 가 길거리에서 부산시장에게 주었다는 검찰의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뇌물을 주었다」는 진술만 있는 사건입니다. 검찰 공소장에 뇌물을 주었다는 날짜와 시간이 빠져 있습니다. 朴회장은 택시에 돈가방을 싣고 와서 전달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걸 安시장이 길거리에서 받아서 자기 아파트로 가방을 끌고 갔다는 얘기입니다. 기업체 회장과 부산시장이 이런 방법으로 길거리에서 돈을 주고 받았다는 게 납득이 갑니까? 검찰은 安시장이 받았다는 1억원을 어디 썼는지 돈 1만원도 증거로 내놓지 못했어요』

 

柳변호사는 『이건 야만적인 검찰권의 행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했다.

 

『최근에 검찰이 김해시장에 대해 뇌물 수수혐의로 10년 刑을 구형했으나,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울산시의 모 국장도 뇌물수수사건으로 구속됐지만, 돈 준 사람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고 무죄가 났습니다. 진술만 있는 사건으로 400만 시민의 살림을 책임진 사람을 구속 수사하는 건 검찰의 횡포입니다』

 

安시장은 일기장에서 자신의 무죄를 끊임없이 抗辯(항변)하고 있다. 朴英俊 회장에게 저주를 퍼붓는 모습도 보인다.

 

<당신이 나에게 건네 주었나. 나는 받지 않은 사람이다. 똑똑히 날 보라. 인간적으로 환자이고 인격으로 존중했는데 자기보호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10월19일)

 

<죽일 ×, 저 살기 위해서 거짓으로 남을 죽인 ×>(10월21일)

 

<자기 이익을 위해, 자기 보호를 위해 남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 나에게 돈을 주었는지를 다그쳤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한 번 입을 열고는 계속 대답했다. 서울에서 다섯 번, 부산에서 네 번 조사받았다, (검찰이) 피라미드식으로 조여 왔다고 했다. 「나에게 주었느냐, 다른 사람에게 준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지금까지 압력받고 시달렸으니 그렇게 대답한 것일 것이다>(10월21일)

 

보석에 한 가닥 희망

 

10월29일 安시장의 변호인은 보석을 신청했다.

 

『뇌물을 주었다는 朴英俊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安시장이 현직 시장으로 도주 우려가 없고,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불구속 상태에서 변론에 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보석신청 이유였다. 재판부는 安시장의 보석 결정을 미뤘다.

 

열흘이 지나도 보석이 결정되지 않자 安시장은 심란해졌다. 11월12일 일기는 이런 安시장의 마음을 대변하듯 글씨가 휘갈겨져 있다.

 

<재판부가 결정 못 했단다. 묶어 놓으려고 하는지, 법원장 영향 있다고 한다. 재판부와 인간적인 것도 중요하단다. 어제 저녁 의무실에서 주사를 맞고 잤다. 밤에는 추웠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생활해야 한다>

 

구속 후 安시장은 공판 승리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거의 매일 변호사를 접견하고 사건을 협의했다. 10월28일에는 11월3일 열릴 첫 공판에 대비해 2700페이지 짜리 관련 기록을 읽었다. 20~30분 떨어진 부산지검까지 호송되어 검찰 조사도 받아야 했다. 安시장이 자살한 후 발견된 메모에서는 하루 13~15시간씩 수사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安시장 재판은 집중심리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기소 후 일주일에 한 번씩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진행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安시장은 보석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자 조금씩 지쳐 간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얼어붙어…

 

11월18일은 安시장의 생일이었다.

 

아침 운동과 아침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安시장은 「모든 幸과 不幸은 하늘의 뜻」이라고 적었다.

 

11월20일 安시장은 보석허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부처님 도와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이라는 표현이 일기에 등장한다. 그의 보석 신청은 그가 자살하는 날까지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석으로 풀려나리라는 희망이 멀어지고, 날씨는 추워지기 시작했다. 「춥다」는 얘기가 일기에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추위는 安시장의 몸과 마음을 극도로 얼어붙게 만들었고, 安시장은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추운 밤을 지냈다. 하루 하루가 힘겹다. 그러나 이겨내야만 한다. 체력도 한계에 다다른다. 부처님 하느님 이 시련에서 벗어나도록 힘을 주십시오>(11월13일)

 

12월에 접어들자 安시장은 약해지는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오늘 하루 좋은 소식(보석 결정) 있기를 기대한다. 여보 당신이 나의 힘이오. 우리는 남보다 훨씬 많은 인생을 살았소.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합시다. 부처님 간절한 가피를 기원합니다>(12월8일)

 

<나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견뎌야 하지만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지. 부처님 도와 주십시오>(12월10일)


구속된 지 두 달이 가까워진 12월11일 安시장의 일기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하루하루 기가 꺾여 가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는 한계에 이른 것 같다. 나머지 인생에 영광과 희망이 없다면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의무, 사회적인 의무를 어떻게 지탱해야 하느냐>(12월11일)

 

<약을 먹지 않고는 잘 수가 없다>(12월 14일)

 

<이회창, 후세인, 박지원, 이광재 등 많은 사람이 살려고 한다. 후세인 그 불편한 환경 속에서 8개월을 버텼다니. 그래도 살아야 한다>(12월16일)

 

安시장은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그가 수감됐던 의료병동 독방에는 위장약, 변비약, 혈압약, 안정제, 위산 억제제, 한약 등이 널려 있었다. 약을 수거하니 종이 쇼핑백 하나에 가득차는 부피였다. 그는 수감된 지 한 달쯤부터 감기·몸살·고혈압·배탈·치질·요통·고열·피부병·어지러움 등을 호소했고, 12월에 들어서는 수면제 없이 잠을 잘 수 없었다.

 

12월15일 의사가 다녀간 후 安시장은 의사가 얘기해 준 자신의 증세를 이렇게 기록했다.

 

<뇌에 이상비대 증세. 혈관 등 혈압은 정밀진단 필요. 머리 아프고, 가슴 울렁거림 답답함. 약 없이 잠 못 이루고, 발이 차고 허리가 아프고, 수면제 습관성 비교적 적다>

 

12월에 들어서면서 安시장의 필체가 확연히 달라졌다. 가족에게 유서를 쓴 12월17일 이후의 일기에는 맞춤법이 틀린 단어가 많이 눈에 띈다.

 

건강했던 安시장은 구치소 수감 2개월 여 만에 자신의 표현대로 몸이 「만신창이」 가 됐다.

 

安시장은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친구야, 추워서 못살겠다』고 호소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엄살 떨지 말고, 마음을 굳게 가지라』고 했다.

 

「그래도 許三守는 그때 안 젊었나」

 

安시장과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朴煐(박영·66)씨는 2004년 1월3일 安시장을 면회했다. 그는 부산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安시장이 하도 춥다고 하기에, 「우리 고등학교 동기 許三守도 겨울에 감옥살이 했잖나. 좀 참아라」고 했어요. 安시장이 「그래도 許三守는 그때 안 젊었나」하고 말하더군요』

 

許三守씨는 1996년 12·12 관련 재판으로 24개월을 복역했다.

 

朴씨는 『安시장 말대로 許三守는 그때 그나마 젊었는데도 면회객이 찾아오면 내복에 체육복을 껴입고 손에는 장갑을 끼고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나왔다고 한다』며 『66세 노인을 냉방에 석 달을 가두어 놓고, 사람을 얼려서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安시장의 고등학교 친구인 鄭銶永 前 검찰 총장은 1월 중순에 면회를 갔다.

 

『면회 갔을 때 이 친구가 목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어서 「왜 그런 옷을 입느냐」고 했더니, 「구치소 규정상 목까지 덮는 옷은 못 입게 돼 있다」고 해요. 나는 「겨울이니 당연히 추운 것 아니겠나. 조금만 참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힘을 써서 기초적인 치료라도 받게 했을 텐데, 너무 후회가 돼요』


崔秉列 대표: 『법만 있고 인권이 없다』

 

2월8일 오전 부산에서 열린 安相英 시장 영결식에서 조사를 낭독한 崔秉烈 한나라당 대표를 이날 밤 압구정동 자택에서 만났다. 50년 知己를 영결하고 온 崔대표는 『제일 친한 친구가 죽으니까 너무 허탈해. 꼭 내가 죽은 것 같아. 인생이 허망해』라며 침통해했다.

 

崔대표는 설 다음날 安시장을 면회했다. 그때도 安시장은 『너무 춥다』고 호소했다. 崔대표의 기억이다.

 

『부인이 솜 바지저고리를 만들어서 가져갔는데 교도소에서 규정 위반이라며 반입을 거부했다고 해요. 옛날에 우리가 입던 두터운 내의는 요즈음 팔지를 않는다고 해요. 安시장이 얇은 내의 두 개를 겹쳐 입고, 양말을 두 개나 껴 신었는데도 춥다는 거야. 창으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와 한데나 마찬가지라고 해요. 「추워서 못살겠다」고 해서, 내가 「야, 그렇게 마음 약한 소리 하지 말고, 마음 독하게 먹어」라고 했어요. 安시장은 유죄 판결도 안 받은 미결수입니다. 그렇게 가혹하게 처우를 할 이유가 뭡니까? 이건 우리가 미개한 나라라는 얘기밖에 안 돼요』

 

崔대표는 『설사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해 줘야 하는 게 마땅하다』며 『대한민국에는 법만 있고 인권이 없다』고 했다.

 

장례식 전날인 2월7일 安相英 시장의 부인 金埰貞(김채정·65)씨는 지친 모습으로 빈소에 찾아온 손님을 맞고 있었다.

 

부인 金씨는 『시장님은 가을에 파카를 입고 이불을 덮어도 춥다고 하신 분이에요. 면회 갔다 올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어요』라며 『너무 춥다고 하셔서 시신을 선산에 안 모시고 절에 모시기로 했다』며 울먹였다.

 

『구치소에 가보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후진국인지 알겠어요. 너무나 열악해요. 사람을 소·돼지처럼 대접해야 되겠어요? 1년 동안 면회 한 번 없는 수감자가 100명이 넘는다고 해요』

 

부인 金씨가 『추위만 안 왔어도, 추위만 안 왔어도』라는 말을 되뇌자, 동석한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1998년부터 6년간 安시장을 보좌했던 朴相憲(박상헌·42) 정책특보는 安시장이 자살한 구치소 현장에 다녀왔다.

 

『시장님이 계시던 독방에 들어갔어요. 창문에 바람막이 비닐을 하나 했는데 바깥 온도나 방 안 온도나 똑같아요. 刑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은 무죄입니다. 대명천지에 무죄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드는 권능을 누가 검찰에게 주었습니까』

 

부산교도소의 한 관계자는 『구치소 창문은 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로 막아 놓았고, 바닥은 마룻바닥이며, 난방은 복도 한 가운데 있는 연탄난로로 한다. 예산이 없어 방마다 난방을 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여기는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安시장이 수감된 방은 복도의 맨 끝에 있었다. 복도의 온기가 방으로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수감 석 달이 지나면서 安시장은 추위를 더욱 호소하고 있다. 이때는 이미 安시장이 유서를 쓰는 등 삶과 죽음의 번민을 넘나들던 시기였다.



<찬 발이 녹는 데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 온수통이 크게 도움된다. 심한 추위와 고독과 많은 잡생각이 난다>(1월14일)

 

<딸 혜원이가 보내준 캐시미어 스웨터와 양말이 따뜻하다>(1월15일)

 

<여기 생활은 인간이 겪지 않으면 모른다. 극악의 상황이다. 이를 국민이 알아야 정직한 국민이 된다. 준법해야 한다>(1월27일)

 

安시장은 평생 쌓아 온 명예가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가장 괴로워한 듯하다.

 

安시장은 1월4일 일기에 재판정에 보낼 탄원서 초본인 듯한 글을 남겼다.

 

<단 한 번이라도 부정한 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어려운 부산 시정이 (나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도시 부산의 기틀이 마련 중이었었습니다. 처음 구속 시 쌓아 올린 명예가 무너지는 중압감에 혀를 깨물려고 했습니다>

 

安시장은 1월14일 자신의 인생을 「小貪大失」이라고 표현했다. 앞뒤 안 보고 살아오는 사이 인생의 명분인 「명예」를 잃었다는 자조와 한탄이었다.

 

<작은 것을 노력해서 이루고, 큰 인생의 명분 보람을 잃어버린 실패한 인생. 죽음을 간절히 바라지만 되지 않는 현실. 지옥 문에 서 있다. 너무나 잘못 살았다>

 

<명예도 잃고, 결국 생명도 잃고, 모든 것을 잃으니 살아도 산다고 할 수 없다>(1월23일).

 

12월17일 安시장은 허물어졌다.

 

이날 安시장은 아들 正薰(정훈·30)과 딸 혜원(37)씨, 부인에게 유서를 썼다. 12월23일에는 가족 전체에게 쓰는 유서를 남겼고, 12월31에는 부인과 부산시청 직원, 부산시민에게 남기는 유서를 썼다.

 

<혜원아 그리고 김정 희원 아범. 어머니 잘 모시고 정훈이 잘 돌봐 주어라. 아버지는 당당하게 살았는데, 많은 일도 했는데.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족을 사랑하고 아들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아버지다. 김정이는 사위라 생각지 않고 큰 자식이라 생각했었고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安시장은 이 무렵 면회 간 朴相憲 정책특보에게 『한 번에 끝을 내자』며 약을 구해 달라고 했다. 朴특보의 얘기다.

 

『하루는 安시장이 제 손을 잡고 귓속말로 「네가 마지막으로 도와줄 것이 있다」고 해요. 「내가 다 안고 가야 하지 않겠나. 한 번에 끝을 내자」고 했어요. 청산가리 같은 극약을 달라는 뜻이었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저는 「도대체 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아무 일도 아닙니다. 곧 끝납니다」라고 했어요』

 

죽마고우인 朴煐씨는 朴특보의 얘기를 듣고 불길한 생각이 들어 1월3일 安시장을 면회하러 갔다.

 

安시장은 친구 朴씨에게 『나 죽을 거야』라고 했다. 朴씨는 이 말을 듣고 이틀 동안 고민한 끝에 변호인단과 『老患(노환)으로는 도저히 병보석이 안 될 것 같으니 정신질환으로라도 병보석을 한번 신청해 보자』고 상의했다.


유서 쓰기 시작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安시장은 왜 12월17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서를 썼을까?

 

하루 전날인 12월16일 서울지검에 부산 동성여객 대표 이광태(47)씨가 구속됐다. 김운용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였다. 검찰은 한 달 뒤인 2004년 1월27일 『安相英 부산시장 및 부산시 政·官系 인사들에게 금품을 주고 로비를 했다는 이광태의 진술을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安시장은 이광태씨가 구속되는 순간 恐慌(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일치된 이야기다. 2002년 6월 부산시장 선거기간 중 安시장이 이광태씨로부터 수표로 3억원을 받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安시장 측은 『이광태씨로부터 받은 수표 3억원을 「朴英俊 회장 사건」이 나면서 곧바로 돌려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安시장은 12월31일 부인에게 남긴 글에서 「이광태 사건」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부정스런 마음으로 부정적인 반대급부를 받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호의를 쉽게 받아들인 것이 일생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비록 우리 사회에서 본인 또는 총선, 대선 등과 관계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했었고, 시정을 위한 주변 관리도 철저하게 했어야 했습니다>

 

이날 安시장은 부인에게 남기는 유서를 썼다. 12월17일 유서를 쓴 데 이어 두 번째의 유서 작성이다. 「이광태 사건」이 가져온 죽음의 그림자가 安시장 주변을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가정을 잘 부탁합니다. 애들과 어머님 잘 부탁합니다. 이제부터는 당신 혼자입니다. 추스리는 데는 좀 시간이 갈 것입니다. 혼자 꿋꿋하게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번민의 시간이 길다는 것은 우리 둘 다 파멸입니다. 우리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 못다한 것을 합시다>

 

「우리 다시 만납시다」

 

1월1일 安시장은 「이광태 사건」을 직접 언급했다.

 

<이광태 건도 그렇다. 그때는 판단이 무뎌졌다. 안일한 소치였다. 무엇을 어쩌자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보관… 여보 우리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安시장의 50년지기인 崔秉烈 한나라당 대표는 「安시장 수뢰사건」의 개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安相英이를 그렇게 고생시킨 「1억 사건」은 완전히 엉터리예요. 칠십 넘긴 노인네가 여행용 가방에 현금을 넣어 와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에서 安시장에게 주고, 安시장이 돈 가방을 아파트로 가져갔다는 얘긴데, 그게 말이 됩니까. 수뢰 얘기가 언론에 보도될 때 내가 부산에 내려가서 安相英이한테 직접 물었어요. 「사실을 얘기해라. 그래야 내가 너를 도울 수 있을 것 아니냐」 安相英이가 「절대로 안 받았다」고 펄펄 뛰어요. 그 친구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거짓말 못 해요. 安시장이 재판에서 이 부분을 논쟁해서 거의 무죄로 만들고 있었던 상황이에요. 그런데 「3억 사건」이 터진 겁니다』

 

崔대표가 安相英씨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다는 「3억 사건」의 전모다.

 

『한나라당 부산시장 경선을 할 때 이광태씨 부인이 찾아와서 1000만원 수표 10장을 봉투에 넣어 줬답니다. 그리고 시장 선거할 때 이광태씨가 1억원짜리 수표 두 장을 각각 봉투에 넣어서 줬다고 해요. 1000만원짜리, 1억원짜리를 어떻게 쓸 수 있겠어요. 돈세탁도 어렵고. 이 돈을 그대로 장롱 안에 보관하고 있다고 돌려줬어요. 검찰이 이광태씨 계좌를 추적하면서 3억원이 安相英씨한테 갔다 온 걸 확인한 겁니다. 安相英이로서는 받지도 않은 1억원을 가지고 이렇게 수모를 당했는데, 진짜 받은 3억원을 가지고는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 할까 더럭 겁이 났던 거예요. 완전히 희망을 잃은 거예요』


1월2일 安시장은 부인에게 遺書(유서)로 보이는 메모를 썼다.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이랍니다. 제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들이 남았습니다. 열심히 강하게 자식들과 함께 사시오. 다시 보람을 만드십시오. 사랑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2004. 1. 2. 당신의 사람 상영>

 

1월5일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安시장에게 10년을 구형했다.

 

검찰이 10년을 구형하자 安시장은 변호사에게 『최악의 경우 몇 년 刑이 떨어질 것 같으냐』고 물었다. 『재판부가 유죄로 판단하면 최소 5년의 실형이 선고되고, 3년은 감옥에서 살아야 보석으로 나갈 수 있다』는 대답에, 安시장은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겠냐』며 크게 낙담했다 한다.

 

1월12일 安시장은 『피를 토하고 싶다. 아무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암담하다는 생각밖에 없다』며 절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1월13일과 14일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삶을 돌아보는 長文의 일기를 썼다.

 

1월15일이 되면서 安시장은 갑자기 힘을 내어 재판에 의욕을 보였다. 安시장은 「자신 있게 대처해야 한다」며 재판 관련 대책을 일기에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건강해야 한다, 잘못하면 건강 놓친다. 약하게 보여 동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자신을 다그쳤다. 『항소심에 보석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변호인단에게 주문했다.

 

환자용 침대에 누워서 재판받아

 

安시장은 1월16일 부인에게 자살을 예감케 하는 편지를 남겼다.

 

<미안하오. 당신과 함께 해로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어려울 것 같아서 아타깝고 또 미안하오. 열심히 살았습니다. 홍제동 대현동 사직동 인현 상가 대림아파트 동부이촌동 현대. 그러나 잘못 살았던 것이 많았습니다. 잘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자꾸 나를 짓누릅니다. 이렇게 가면 언제쯤 스스로 판단이 흐려질지 모르겠소>

 

2003년 12월 말에 유서를 작성했던 安시장은 다시 죽음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安시장은 다음날인 1월17일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安시장은 구치소에서 5분 거리인 병원으로 후송됐다. 가벼운 뇌졸중이었다. 당시 교도관의 접견록에는 「安시장의 의식이 명확하지 못하여 妻가 여러 차례 말을 건네 보았지만 대답하지 못하고, 접견인도 알아보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월19일 선고 공판이 열렸다.

 

安시장은 구급차에 실려 법원까지 갔고, 환자용 침대에 누워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 내내 그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날 재판에 참석했던 부산시청 간부 직원의 얘기다.


『安시장이 법정에 들어오지 않자 재판부가 「피고인 안 나오느냐」고 물었어요. 그때 시장님이 침대에 실려 들어오자 시장님 여동생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나중에 安시장이 「눈을 뜨니 병원이더라. 그때 내가 숨을 쉬더냐」고 묻더군요』

 

변호인단은 다음날 구속집행 정지 신청을 냈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또 다시 뇌혈관이 막히는 현상이 재발할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첨부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安시장의 변호인인 姜賢安(강현안) 변호사의 이야기다.

 

『구속의 목적은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를 막기 위한 겁니다. 하지만 일단 기소가 되면 검찰의 수사는 끝난 거예요. 감옥에 가둬 둘 이유가 없습니다. 피고인이 재판 과정에서 방어권을 확실히 행사하려면 불구속 상태로 풀어 주어야 합니다. 이게 法정신인데도 우리 검찰과 법원은 이걸 받아들이는 데 너무 인색해요』

 

1월19일 재판부는 『몇 명의 증인으로부터 확인할 사항이 더 있다』며 선고를 다음 재판으로 미루었다. 변호인들은 유리해 졌다며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이광태 사건」이라는 더 큰 장애물이 安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安시장의 일기는 1월27일로 끝난다.

 

마지막 일기에서 安시장은 「이광태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려 애썼다. 安시장은 李씨로부터 받은 수표는 책상서랍에 넣어 놓았다가 돌려 주었다고 말했다.

 

<이광태 일이 신문에 나다. 뇌물이 아니라 선거일로 어려움이 많겠다 하고 봉투를 내놓았습니다. 평소에 같이 200~300 정도로 알고 소파 서랍에 넣었다가 박영준 사건이 쉽게 해결되지 않고, 출국정지 해결을 못 해 걱정이었으며 서랍을 정리하면서 봉투를 발견했습니다. 李회장 내외와 저희 내외는 친형제같이 지냅니다. 발견하여 즉시 돌려 주었습니다. 그 큰돈이 뇌물이라면 수표는 가당치 않습니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기이며 마지막에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李회장이) 지원한 것 같습니다. 李회장은 체육회 부회장으로 저를 위해 봉사하고 계십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식으로 5000만원 그리고 수시로 지원하고 계신 고마운 분입니다>

 

수갑과 포승에 묶여 서울로 移監

 

1월29일 安相英 시장은 「이광태 사건」을 조사받기 위해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

 

朴相憲 특보는 『서울구치소로 이감한 것이 安시장을 죽게 만든 직접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1월29일 오전 8시에 安시장을 수갑을 채운 뒤 포승줄을 묶고 호송차에 태워 서울로 끌고 갔습니다. 호송차에서 오줌을 누겠다고 하니까, 교도관이 깡통을 가지고 와서 받아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검찰은 安시장을 한 번도 조사하지 않고 2월3일 부산구치소로 다시 보냈습니다. 安시장이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겠습니까?』

 

1월30일 오전 9시30분 서울지검은 安시장을 서울지검 구치감에 데려와 기다리게 했다. 安시장은 이날 오후 4시30분까지 일곱 시간 동안 구치감 독방에서 조사를 기다렸다.

 

朴相憲 특보의 얘기다.

 

『구치감에는 이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허리가 아픈 분이 추운 데서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安시장이 어디 도망갈 사람입니까? 도대체 조사도 안 할 거면서 왜 노인네를 서울지검에 불러 간 겁니까』

 

당시 서울지검은 언론 브리핑을 통해 安시장을 조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安시장이 「부인을 통해 이광태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을 돌려줬다」고 주장해서 부인에 대한 수사를 동시에 할 필요가 있었다. 1월30일 시장 부인 金埰貞씨에게 소환통보를 했고, 이에 따라 安시장은 서울지검의 구치감까지 왔다. 그러나 安시장 부인이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출석하지 않아서 安시장을 서울구치소로 돌려 보낸 것이다』

 

安시장은 2월3일 부산교도소行 죄수 5명과 함께 호송되어 부산구치소에 되돌아 온 후 곧바로 자살했다.

 

1월27일 이후 일기쓰기를 중단한 安시장은 1월29일 「서울구치소」로 옮겨간 이후의 생활에 대해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친구인 崔秉烈 한나라당 대표는 『安相英 시장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인간적인 모멸』이었다고 했다.

 

『부산구치소에서 서울구치소로 호송해 가는데, 손에는 수갑을 채우고 그 위에 포승줄을 꽁꽁 감았다고 해요. 安相英이가 도망갈 흉악범입니까. 화장실도 못 사용해서 교도관이 깡통으로 오줌을 받았답니다. 이게 얼마나 모멸감을 주겠어요. 그렇게 갔으니 얼마나 심신이 지쳤겠어요. 그런데 다음날 조사한다고 서울지검에 불러 다 놓고 앉혀서 오후 4시까지 기다리게 했다고 해요. 계산된 건지는 몰라도 엄청난 모멸감을 안겨 준 거예요』

 

친구 朴煐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安시장은 명예를 제일 소중하게 여겼어요. 그런 사람이 자신이 부산시장 관용차를 타며 자랑스럽게 오르내리던 경부 고속도로를 수갑을 찬 채 올라갔으니 죽고 싶었을 거예요』

 

한나라당의 진상조사단은 安시장의 자살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은 安시장을 무리하게 이감 지휘를 해서 서울로 올려 보냈다. 검찰 구치감에 불러 하루 종일 대기시켰다. 조사도 하지 않고 다시 安시장을 부산구치소에 돌려보냈다. 수갑과 포승을 찬 채 서울-부산을 장시간 오르내리도록 하면서, 용변을 호송차 안에서 처리하도록 했다. 극도의 인간적 모멸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케 만들었다. 이것이 安시장을 자살로 몰아간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人權의 사각지대

 

법원가에는 「6조지」라는 재미있는 속설이 떠돌아다닌다.

 

『형사는 때려 조지고, 검사는 조사한다고 불러 조지고, 판사는 기일 연기해서 조지고, 감옥 간 사람은 먹어 조지고, 가족들은 재판 비용 마련하느라 재산을 팔아 조진다』는 얘기다.

 

모든 피의자는 법원의 판결이 있을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하는 것이 형사소송법의 정신이다. 판결할 때까지 피의자는 무죄라는 얘기다. 하지만 피의자 신분인 安시장은 흉악범들과 똑같은 처우를 받았다. 수갑에 묶이고 그 위에 포승줄까지 묶여 경부고속도로를 오르내렸다.

 

여론은 힘있는 사람들을 구속하고 수모를 주는 검찰에 박수를 보냈다.

 

검사는 서울로 安시장을 불러 올려놓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법무부는 2월14일 「수사 관련자들은 구속 피의자를 소환해 구치감에 장기 대기토록 하였다가 조사 없이 돌려보내는 경우, 조사하지 못한 사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서울지검에 주의를 줬다.

 

한국의 사법부는 이 피의자가 자살할 때까지 보석 신청을 허용하지 않았다. 40년 가까이 공직자로 근무한 그의 경력, 400만 시민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安시장의 한 친구는 『安시장의 죽음은 야만적인 검찰권의 행사가 초래한 것』이라며 『누가 검찰에게 피의자를 무조건 감옥에 가두고 시들어 죽게 하는 권한을 주었느냐』고 흥분했다.


우리는 安시장이 닦은 사직터널을 지나며, 목동 新시가지를 지나며, 올림픽대로를 달리며 그를 기억할지 모른다. 『나는 코피 난다고 쉴 만큼 한가한 팔자가 아니다』며 밤낮 없이 일한 개발연대의 神話 安相英은 그렇게 갔다. 그는 무죄인으로 죽었고, 그런 점에서 검찰은 패배했다


[출처] 安相英 부산시장은 왜 목을 매서 자살했나|작성자 투명인간

 


 

노무현이가 죽게한 안상영 부산시장의 유서


安相英 부산시장은 2003년 10월16일「진흥기업 朴英俊 회장으로부터 1억원을 받고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安시장은 朴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며 재판을 진행 중, 2004년 2월4일 새벽 1시에 부산 구치소에서 목을 매 숨졌다.


이효진 제공 -----------------------------


국민여러분!


저 안상영이는 감옥속 추운 방에서 盧武鉉의 말을 듣지를 않았다는 그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모함을 당하여

치욕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아내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 두툼한 솜옷도 감방속으로 차입이 되지를 못 하였습니다.

모든 명예를 다 버리고 용기도 없이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용기있다거나 비겁하다는 것도 사실 상황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부터 사대부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부모, 처자를 걱정하는 것은 人之常情 입니다


저는 절대로 돈을 받지를 않았습니다! 억울 합니다!

제가 盧武鉉의 요구대로 열린 우리당으로 입당을 하였다면 저는 이 추운 감옥 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나라당에서 추천을 받아 선거를 해서 부산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한나라당을 떠나서 열린우리당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저를 믿고 따르는 부산 시민들을 절대로 실망을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저들은 그런 고집을 부리는 저를 서울로 데리고 다니면서 주리를 틀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사마천의 글 속에서 저 거대한 나라의 형법도 당상관은 감옥 속에서도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저 안상영은 서울 구치소에 잡범들 방으로 들어가서 잡범들에게 무수하게 몰매를 맞았습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잡범들 방에 저를 몰아넣고 잡범들에게 몰매를 맞는 그 순간에

저 안상영이는 모든 것이 무너저 버렸습니다.


저 안상영은 생명을 아까워하는 비겁한 자에 불과하지만 거취만은 분명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어찌 치욕을 모르고 죄인 노룻만 하고 있겠습니까?


盧武鉉이는 그렇게 악독한 人間 입니다.

국민들은 절대로 저 위장된 盧武鉉에게 속아서는 안됩니다!


盧武鉉은 강금실을 시켜서 서울 구치소 잡범들 방에서 저를 잡범들을 시켜서 무수하게 구타를 하게 하면서

미지막가지 열린 우리당 입당하라고 몰아부쳤습니다


盧武鉉이 盧武鉉 당인 열린우리당을 창당 한 것 자체가 경남과 부산에서 열린 우리당을 한 석 이라도 더 당선시키려는

부정한 기획으로 민든 당 이기에 저를 부정한 부산시장으로 몰아부쳐 저를 감옥속에 처 넣어야 했던 것 입니다.


그 이유는 盧武鉉이 끝까지 저 안상영이를 죄를 물었고 자백을 하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열린 우리당으로

입당하라고 몰아부쳤던 것입니다.


저는 죽음의 길로 걸어가면서 저 부정한 盧武鉉 정권에 죽음으로 항거합니다.

저는 어둠속의 감방속에서 또 하나의 진실된 조국 대한민국 역사의 장래를 진심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盧武鉉은 나 안상영이를 죽음으로 몰아 갔지만 저 부정한 정권은 그리 길게 가지는 못할 것 입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무수하게 몰매를 맞고 부산 구치소로 돌아오니 부산은 나의 집 이었습니다.


국민여러분 평안 하십시오!


안상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