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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전대통령 서거]청문회 스타서 ‘서민대통령’으로

풍월 사선암 2009. 5. 23. 15:34

[盧전대통령 서거]청문회 스타서 ‘서민대통령’으로

 

"마을 주변에 작은 비석을 세워달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23일 자신을 키운 '봉하산', 바로 그곳으로 돌아갔다. 평지 위에 우뚝 말머리 처럼 솟은 그 산 바위에서 해질 때까지 친구들과 뛰어 놀았고, 소년 노무현이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던 그곳이다. 그가 평생 삶의 항로로 삼아온 '도덕'과 '원칙'을 기루고 자란 그곳에서 스스로 다시 묻었다. 육체의 소멸보다 고통스런 마지막 삶의 편린들이, 정신의 죽음이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가난'이 키운 산골 소년의 꿈

 

"지난 일은 언제나 아름답게만 보인다지요". 노 전 대통령이 1975년 고시계 7월호에 쓴 사법고시 합격기 첫 줄이다. 30세 만학도의 기억을 되감으면 수마에 할퀸 낙동강변의 초가에서 시작된다. 그처럼 '가난'은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 열쇠였다. 어머니의 치맛자락 속 돈을 훔쳐 하모니카를 사고, 물려받은 누님의 찌그러진 필통이 부끄러워 숨기던 두메 산골 소년은 눈물을 훔치며 '가난'을 일기로 썼다. 어찌해볼 길 없는 가난을 원망하면서도,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썼다. 소년은 독학으로 판사가 됐고, 먼훗날 어릴 적 꿈에 없던 대권을 쥐었다. '노천재'(유년기)가 '돌콩'(어린시절)으로 바뀌고, '노변'(청년기)이 '노짱'(정치인)이 된 63년의 삶이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세우며 자신을 던질 줄 았았던 승부사 노 전대통령은 '오뚝이 신화'를 창조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9월1일(음력 8월6일) 봉화산에 안겨 있는 경남 진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노판석(1976년 작고), 어머니 이순례(1998년 작고)씨의 3남2녀 중 막내였다. 아버지가 43세에 본 늦둥이였다.


노 전 대통령이 태어난 봉하마을은 어머니가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게 없다"고 탄식하던 깡촌이었다. 한학을 한 아버지는 "배고파 죽어도 방법을 몰랐고"(형 건평씨), 고구마순과 딸기를 이고 30∼40리 길 마산까지 내다 판 어머니의 생활력이 일곱 식구를 지탱했다. 어려서부터 키가 작았던 노무현은 머리가 좋았다. 6살 때 천자문을 다 외우고 반듯하게 써 읍내까지 유명해졌다. 남이 먹던 밥을 안먹고, 숟가락도 자기 것만 쓰던 응석받이 때다. 노무현은 초등학교 1학년 2등, 2학년 1등, 절대평가로 바뀐 3∼5학년은 우등상, 졸업식날엔 교육감상을 탔다.


성격은 당차고 맹랑했다. 5학년때 교내 붓글씨 대회에선 2등상을 반납했다. 교사였던 아버지 도움으로 시험지를 한 장 더 쓴 학생이 1등을 차지한 것을 거부한 것이다. 6학년때 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된 구호는 "작은 고추가 더 맵심더"였다. 학적부에 '성인답다'는 표현이 나오고, "사고가 깊고 주관이 강했다"(6학년 담임 신종생씨)는 술회다.


중학교 입학금이 없던 노무현은 "농사나 시키라"는 교감의 비아냥에 입학원서를 찢었다. 자존심 강한 소년이 몸살을 앓은 가난이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부산대 법대)을 나온 큰형 영현씨(1973년 작고)의 담판으로 중학에 들어간 노무현은 1학년 말 다시 학교를 발칵 뒤집었다. 3·15 부정선거를 얼마 앞두고 '우리 이승만 대통령' 작문을 시키자 '백지(白紙) 동맹'을 주동, 교무실에 끌려가 반성문 쓰기를 거부하다 1주일 정학을 받은 사건이다.


중학내내 우등상을 탄 노무현은 3학년 1학기 휴학계를 던졌다. "학교엔 몸이 안좋다고 말했으나, 돈 문제가 더 컸다"(고향친구 조용상씨)고 했다. 복싱도 맛들이고, 법률책도 만지작거렸던 그는 전국에서 35명을 뽑는 '김지태(당시 부산일보 사장) 장학금'에 응시, 스스로 복학의 길을 뚫었다.


3년 장학금을 받고 유학길에 오른 부산상고는 노무현의 표현대로 "촌놈의 방황기"였다. 1학년때 상위권에 있던 성적은 2학년때 취업반에 들어가며 뒷걸음쳤다. 담배도 배우고, 기말고사때 머리를 자르러 다닌 훈육주임을 피해 도망친 일도 있었다.


인권 변호사의 길


1968년 3월 노무현은 공부를 접고 군에 입대, 원주 1군사령부와 원통의 최전방 을지부대(12사단)에서 근무했다. 당시 대대장 노무식씨(예비역 소장)는 "철야 정보상황병도 하고 대대장 당번병도 했다. 까막눈 동료들과 잘 어울리며 먹물티를 안냈다"고 했다.


제대한 노무현은 다시 고시에 매달렸다. 할아버지 간병차 고향에 내려온 권양숙씨에게 청혼하고, 유명한 '담요데이트' 놀림도 받았다. 공부방으로 가져갈 새 담요를 들고 권씨와 둑길을 걸었는데, 누군가 그걸 보고 "쟤들은 담요들고 데이트한다"고 소문낸 것이다.


'부역 혐의로 옥사한 장인'과 '불투명한 고시생' 문제로 얽혀 양가가 티격태격한 결혼도 "판사 안하면 어떠냐"는 노무현의 '엄포'로 풀렸다. 권씨의 뱃속에 아들이 자라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는 고시에 3차례 낙방했다. 9년간 벗삼던 책상을 물리고 60명의 고시합격자 명단에 실린 날(1975년 3월27일), 집안은 울음바다가 됐다.


77년 첫 부임지는 대전지법이었다. 형사합의부 배석판사로 일하며 호기로운 술자리도 익숙해진 시절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노무현은 8개월 만에 법복을 벗었다. 김학만 변호사(당시 부장판사)는 "'부산가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겝니다'라며 사표를 고집했다"고 말했다. 평생 그와 함께한 측근이자 동료 변호사인 문재인 전비서실장은 "노변은 처음부터 변호사 뜻이 컸고, 가족들도 바랐지만 혹시 아내가 장인 문제로 상처받을까봐 임관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부산에서 개업한 노무현은 한때 1백억원대 소송도 연달아 수임하며 잘나간 조세 전문 변호사였다. 동아대 동아리 학생들과 광안리에서 요트를 배울 당시다.


그러나 1981년 10월 '대타'로 맡은 부림사건(대학생 독서서클 검거)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처음 시국사건을 접한 그는 교도소에서 57일간 고문을 당한 한 학생의 시퍼런 몸과 겁에 질린 눈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끔찍하다. 우리 아들도 멀지않아 대학가는 데 이런 사회는 안된다". 부인 권씨가 전한 그날 밤 남편의 흥분된 목소리다. 사회과학책을 탐독하며 벌인 6개월의 긴 항전 끝에 그는 다음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에 참여하며 투사로 탈바꿈했다. 부림사건이 '비주류 노무현'의 출발선이 된 것이다.


정치인 '바보 노무현'


6년이 흐른 1987년 9월 부산의 반독재시위를 이끌던 노무현은 거제 대우조선 파업에 뛰어들었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석규씨의 사체부검에 나섰다가 근로자들의 임금협상을 지원, 3자개입 혐의가 적용됐다. "잘못했다고 하면 불구속시킬 수 있다"는 검사에게 "정치적 억압"이라고 버티다 구속됐다. 변호사 노무현은 23일 만에 풀려났으나, 그해 11월 검찰의 재차 불구속 기소로 변호사 업무가 정지됐다. 무료 상담을 하며 겉돌던 그는 통일민주당 공천(13대)에 응했다. 그를 추천했던 김광일 변호사는 "재야 몫으로 처음 남구를 제의받은 노무현이 '기왕이면 허삼수와 붙겠다'며 동구를 역제의해왔다"고 말했다.

 

 

퇴임 1년만에 도덕성 상처 '비극'


국회에 입성한 노무현은 노동위원회에서 성가를 올렸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으로 시작된 '격한' 현대중공업 파업 연설도 현장을 즐겨 찾던 그 당시다. 그는 1989년 봄 답답한 의원 생활에 회의를 품고 사직서를 냈다가 잠적 17일만에 '결론없이' 돌아오기도 했다.


'정치인 노무현'이 여론의 집중조명을 받은 것은 1989년말 5공 청문회였다. 정주영 현대 회장을 몰아붙이고, 전두환 전대통령의 '5월 광주 자위권 발동' 연설때 명패를 팽개치며 세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것이다. 말그대로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된 '청문회 스타'의 탄생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하고, 1991년 통합민주당 대변인 시절 당지도부 만류를 뿌리치고 그의 재산을 '과대 보도'한 주간조선에 맞서 이긴 송사도 파장이 컸다. 강자와 대세에 주눅들지 않는 그의 성정이었다. 그때부터 긴 암흑기였다. '거리의 투사'로, '노변'으로 돌아간 노무현은 부산에서 3차례의 총선과 시장선거에 나섰으나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늘 막판에 'DJ 깃발'을 들고 맞은 지역바람의 역풍이었다. 그러나 서울 종로(보선)의 금배지를 버리고 4번째 나선 2000년 4·13 총선은 그가 '전국적 인물'로 부상한 분기점이 됐다. 낙마후 정치를 떠나려 했던 그에게 찾아온 예상 못했던 반전이다. '바보 노무현'이란 애칭과 팬클럽 '노사모'가 생긴 것이다. 가슴을 쓰다듬으며 우연히 다시 읽은 '링컨 대통령'은 다시 그의 빛이 됐다. 고학으로 변호사가 돼 남북의 반목을 풀어낸 링컨의 길을 한국에서 가겠다는 욕구였다.


'새 시대의 맏형'이고 싶었던 대통령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친 뒤 2002년 3월 이인제 고문과 맞선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그는 국민참여 정치의 새 길을 열며 대세론을 깬 주역이 됐다.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을 거치며 바닥까지 꺼진 노풍은 7개월의 긴 '당내 도전'을 딛고 11월25일 정몽준 대표와의 후보단일화로 부활했다. "갈 사람은 가라"며 버틴 승부사의 역전극이었다. 그의 우직스런 원칙 정치에 '바보 노무현'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어린 아들과 딸의 손을 잡은 민초들의 '희망 돼지'가 손에서 손으로 감동을 전하면서다. 그는 원칙의 정치인, 도덕성의 정치인, 그리고 정치를 바꿀 정치인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결국 그는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의 깃발을 들고 대선전을 내달린 끝에 2002년 12월19일 16대 대통령선거 가도의 최후의 승자가 됐다. "국민들에게 진 빚을 꼭 갚겠다. 나는 당신들의 소망을 안다"는 약속을 실현할 기회가 '노무현'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후는 환희 보다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참여정부 시절 곧잘 "새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에 양 어깨에 걸린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자, 좌·우로 갈린 한국 정치현실속에서 '비주류 정치인'으로서 그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었다.


대선자금 연루 문제와 지지층의 이반 등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2004년 3월 그는 거대 야당들에 의해 헌정사상 국회에서 탄핵당하는 첫 대통령이 됐다. 이는 오히려 야당들에게 역풍으로 작용,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이은 18대 총선에서 과반의 압승을 거두는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우리사회 전 분야에서 이어진 그의 정치 실험은 그의 정치를 점점 힘겹게 만들었다. 여권의 잇단 재·보선 참패에 이은 2006년 지방선거 참패로 그의 정치실험의 동력은 점점 사라져 갔다. 각종 개혁정책속에 민심은 '개혁 피로증'을 호소했고, 그 와중에 부동산 가격 급등과 북한의 핵실험 사태까지 이어지면서 국정은 난맥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잇단 청와대발 충격 발언은 민심 이반과 지지율 급락으로 이어졌고, '레임덕'이 운위됐다. 급기야 2005년 7월엔 "임기를 단축할 수도 있다"는 충격 발언과 함께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거부 당했다.


여당에서 탈당론이 제기되고, '참여정부 실패론'속에 과거 '정치적 동지'들은 등을 돌렸다. 2007년 10월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10·4 남북정상회담이 마지막 업적으로 남았다.


말 많고 시끄러운 5년이었지만, 돈 없는 선거를 만든 정치개혁과 '깨끗한 정부'는 그리도 그의 '상징'으로 남았다. 재임기간 내내 도덕성에 대해선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과 자부심을 보인 결과였다.


2003년 10월 최도술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그룹으로부터 11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자 "내가 모른다고 할 수 없다"면서 '재신임'이란 승부수를 던지고, 정치권을 혼돈속으로 몰아 넣은 대선자금 수사 때도 "불법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친 것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이권 개입이나 인사청탁을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 시키겠다"거나, 친형인 건평씨의 청탁 의혹에는 "힘 없는 시골 노인에게 머리 조아리지 말라"고 일갈했고, 2007년 변양균 전정책실장·정윤재 전비서관의 수뢰 의혹엔 "요즘 깜도 안되는 의혹이 춤추고 있다"고도 했다. 그 연장선에서 임기말 '참여정부 실패론'에 대해선 "부동산 말고는 꿀릴 게 없다", "이 정도면 괜찮은 대통령인데, 국민이 영 눈이 높아 안쳐준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비리의 블랙홀에 빠진 말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대통령 퇴임후 그의 정치인생의 후원자 였던 '박연차 게이트'와 함께 허물어졌다. 그의 모든 것을 삼킨 '비리의 블랙홀'이었다. 지난달 7일 부인 권양숙 여사의 금품 수수를 고백하면서 "구시대 막내"의 회한은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나타났다. 도덕성 하나로 정권을 만들고, 그것이 권력을 지탱한 뼈대였지만, 결국 '검은 돈'이란 한국 정치의 비극적 사슬에 묶인 것이다. 국가 지도자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치명상을 입었다.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가 검찰의 수사를 받았고, 그 자신도 지난달 30일 결국 검찰의 '포토라인'에 섰다.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에 이어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는 세번째 대통령의 오명이다.


또 친형은 검은 돈을 받아 정치에 까지 개입한 혐의로 영어의 몸이 됐다. 안희정·이광재·서갑원 등 그가 "동지"라며 애정을 보였던 386 측근들이나, 박정규 전민정수석 등 참모들도 모두 비리의 덫에 걸렸다. '도덕성'이란 그의 마지막 자존심 마저 무너진 것이다.


결국 그는 검찰 출두에 앞선 지난달 22일 "더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내린 정신적·정치적 사망선고였다. 한때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권력에서 떠난지 불과 1년3개월만에 그는 지상에 그의 거처 한칸을 찾지 못한채 떠났다. "원망 하지 말라"는 마지막 회한이자 당부와 함께 였다.


경향신문 | 입력 2009.05.23 <김광호기자>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 내용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