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이만번 형제 충효각

풍월 사선암 2009. 4. 22. 14:06

 

이만번 형제 충효각

 

호는 두천이요, 홍양인인 이만번은 무풍면 철목리 출신으로 충성심이 강하고 활 쏘기와 말 타기에 능한 무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조 경종때 1720년경 경남 안의에 사는 정희량은 이만번이 뛰어난 무술가라는 것을 소문 듣고 가끔 많은 금품과 함께 사람을 보내어 그와 가까이 지내기를 꾀하였다. 정희량은 그 지방에서 소문난 갑부요 세도가였고, 1725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소론파가 몰락한데 대한 불만을 품고 밀풍군 단을 추대할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난의 주동인물이다. 이만번은 정희량의 호의를 수상히 여기고 부귀에 집착하는 그의 생활태도를 꾸짖으면서 한번도 그의 금품이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728년 이인좌는 대원수라 자칭하여 충청도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동시에 정희량은 부원수라 자칭하여 경상도에서 병을 일으켜 거창, 함양을 점령하고 전라도로 침입하려다가 관군의 방어가 튼튼하여 뜻대로 안되자 다시 거창으로 우회하여 무풍 성초령을 넘어 무주를 침공하려 하였다.

 

이 때에 이만번은 아우 이만경과 함께 결연히 일어나 반란군의 진격을 저지할 것을 결심하고 가재를 털어 곡식 2백섬을 군량미로 준비하는 한편 동리에서 장정 수십명을 모집하여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당시 무주부사는 조유수였으나, 적상산성을 지킨다는 핑계로 꽁무니를 빼버리고 천부장 최봉래가 남아 있었는데 이 또한 학술과 무술을 겸비한 거인이었다. 이만번은 이 최봉래가 이끄는 관군과 합세하여 성초령으로 향하였다. 이때 동행하려는 만경에게 노환으로 고생하는 부모를 돌보도록 간곡히 타이르고 눈물로 헤어지기도 하였다.

 

성초령에 이르니 그곳에 도달한 적군의 병력이 엄청나 이쪽의 작은 병력으로는 방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가진 기계와 매복작전으로 끝내 적이 성초령을 넘지 못하도록 방어하였던 것이다. 정희량의 반란군은 선산목사 박필건과 성주목사 이보혁 관군의 반격을 받아 패전하였고 그의 목은 베어 소금에 담아 서울로 보내게 되었다.

 

이 성초령 싸움에서 이만번의 전공은 혁혁한 것이었다. 이만번의 아우 만경은 호를 두촌이라 하였고 그의 형과 같이 충성심이 강하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친이 중풍으로 수년간을 자리에 누워 말하는 것조차 자유스럽지 못했음에도 조금도 불편이 없도록 시중을 들었다.

 

병중의 부친은 꿩고기와 물고기만을 좋아했는데 그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구해다 바쳤다. 어느 겨울 부친이 꿩고기를 청했으나 온 산에 눈이 덮혀 구할 방도가 묘연하여 비탄에 빠져 있는데 그의 애견이 꼬리를 치고 집 밖으로 나가서 뒤 따라 가 보았더니 설천면 두길리 백운동에 이르러 한 마리의 꿩이 날아 와 가슴에 안기게 되었고, 또 엄동설한에 고기를 구하기가 힘들어 멀리 나제통문 근처의 학담까지 가서 도끼로 얼음을 깨니 월척의 잉어가 뛰어나와 부친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부친을 위한 꿩을 잡기 위해서 매를 길렀는데 부친이 별세하자 놓아 주었더니 몇일을 울다가 죽어버렸다고 한다. 부친이 별세한 후 그는 신병으로 보행이 어려워 가마를 타고 성묘를 했음에도 춘하추동 하루도 빠짐 없이 3년간을 계속하였다.

 

그는 또한 이인좌의 난을 당하자 그의 형을 도와 반란군을 막는데 공이 많았고 집에 도둑이 들면 오히려 방을 내주어 살게 하여, 감화시키는가 하면 흉년에는 길가에 솥을 걸고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등 충성과 선행을 아울러 행하여 만인의 숭앙을 받았다. 고종은 이만번과 만경 형제의 충효를 높이 치하하여 1888년 정려를 내리고 형 만번에게는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만경에게는 자헌대부 예조판서겸 중추부지사를 증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