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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창 두루 둘러보기

풍월 사선암 2009. 4. 21. 13:18

전남 순창 두루 둘러보기 

옛 돌들과 이야기 나누며 가는 길

 

이 길은 한결같다. 단 한 번도 싫은 적이 없었다. ‘나무’의 힘을 알려주는 길이다. 아니 자연을 이야기하는 길이다. 마음 답답하거나 우울할 때면 자주 달려오고픈 곳이지만 공연히 어여쁜 풍경에 티 묻힐까 봐 아끼고 아끼다 달려보곤 하는 길이다. 그렇게 아끼다 이 길로 시작하는 것이니 이번 우리가족 나들이는 더 없이 좋으리라.

글·사진 한결가족 

 

‘동광주’를 벗어나 ‘담양’가는 길은 이제 더 시원스레 뚫린 덕에 국도인데도 고속도로 같다. 망월동의 5.18 묘지도, 광주댐 근처의 소쇄원과 식영정 가는 길도, 담양 초입의 면앙정과 송강정, 명옥헌 그리고 한국대나무박물관도 여전히 우릴 유혹하지만 오늘은 그냥 고개 돌리고 지난다. 며칠 전부터 이번 나들이는 오로지 정해진 지역에만 충실해 보기로 마음먹은 터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돌 것이다.

 

초입에 말한 ‘담양-순창’간의 ‘메타세콰이어’길. 오늘 우리 나들이를 더 푸르게 만들어주는 이 길은 지금은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길이 됐지만,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걸 담양군민들이 악착같이 지켜낸 길이다. 이 길을 달릴 때면 꼭 오대산 월정사 들어가는 전나무 길도 함께 떠오르곤 한다. 우리 땅에 이런 나무들이 듬직하게 서 있는 길이 있다는 게 얼마나 뿌듯하고 오진지….

 

그 멋진 길 따라 24번 국도를 타고 순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순창 고추장 마을’이 있다. 수랏상에 진상하던 고추장이었고 상품으로도 나와 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고, ‘문옥례여사 할머니 고추장·장아찌집’이 첫손에 꼽힌다고 하는데, 한옥 모양으로 만든 마을과 집집마다 처마에 매단 갖가지 메주들과 집안 가득 들어찬 항아리 풍경만으로도 온 가족이 한 번 나들이 할만한 곳이다.

 

고추장 마을을 뒤로하고 조금만 가면 왼쪽으로 ‘강천사’가는 793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강천사는 절 자체보다는 들어가는 길의 경치와 ‘강천산’이 더 멋들어져 지인들에게 산행지로 자주 권하기도 하는 곳이다. 근처의 추월산, 병풍산, 산성산 등 어느 산을 올라도 어우러지는 곳. 휴일이라선지 오늘은 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너무도 이쁘고 소리까지 맑은 내가 있기에 손으로 물결을 움켜쥐어 보고 발도 담그면서 천천히 음미하며 걷기에 참 좋은 길이다. 우리 가족은 5월과 10월에 가장 멋들어진 길이 된다는 데 동의한다.

 

대웅전과 요사 너덧 채의 당우가 늘어선 ‘강천사’는 아주 작은 절이다. 신라 진성여왕(887년)때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한 때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려 천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기도 했단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 선조(1604년)때 소요대사가 재건했으나 또 한국전쟁 때 모조리 재가 되었다. 지금 건물은 근래에 지은 것들이고 옛 맛은 오층석탑에서만 느낄 수 있다. 나들이객들도 절내를 두루 둘러보기보다는 절 앞의 샘에서 긴 길 걸어온 목을 축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듯해 우리도 한 모금 머금어 보지만 너무 이쁜 계곡만 바라보고 와서인지 물맛도 그 효용이 덜하다.


준비하면서 보니 순창은 남근석과 돌장승, 입석이 많아 ‘돌 지역’이라 할 만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그 곳으로 향한다. 강천사에서 오던 길을 밟아 ‘팔덕면’ 소재지의 팔덕초등학교 건너편의 시멘트 길로 들어선다. 2년 전만 해도 표지들이 없어 헤매다가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여쭈어 겨우 찾았던 ‘산동리 남근석’ 이젠 안내판이 잘 되어 있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당산나무와 모정이 있고, 한 켠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4호’인 남근석이 서 있는데 표면에 가장자리가 말린 연잎과 연꽃 봉오리, 그리고 줄기가 세심하게 돋을 새김되어 있다. 그 동안 우리 땅 여러 곳의 남근석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 본다.

 

5백여년 전에 한 여장부가 남근석을 두 개 깎아서 치마에 싸 가지고 오다가 무거워서 하나는 창덕리에 놓고 하나는 산동리까지 가지고 와서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지만 누가 세웠건, 만든 목적이 무엇이건, 남사스런 물건을 조금도 남사스럽지 않게 온 정성을 다해 새겼을 석공의 마음을 잠시나마 더듬어 본다. 커다란 나무 아래, 그것도 철책에 둘러싸여 있어 남근석이 조금도 힘을 못 쓸 것 같은 게 안쓰러울 뿐이다.

 

짝을 이룬다는 ‘창덕리 남근석’으로 향한다. 산동리보다는 찾기가 어렵다. 묘지나 정자가 있으면 좋을 듯한, 지금은 계단까지 세운 둔덕 위에 점잖게 서 있다. 산동리의 설명과는 달리 태촌마을에 살던 거지가 신분상 결혼이나 성생활을 할 수 없는 설움을 달래느라 남근을 깎아 세웠다고 써 있는데, 산동리의 것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약간 작은 듯하고 역시 아래 부분에 연꽃을 새긴 점이 독특하다. 옥동자를 낳을 수 있다는 믿음 덕에 매년 대보름이면 많은 부녀자들에게 공을 받았을 남근석은 양이 벌건 들판에 세워져 있어선지 더 당당하고 씩씩해 보인다.


강천사에서 나오는 길, 팔덕면 소재지를 조금 지나면 오른쪽에 구룡리 입석마을 표지석이 서 있다. 시선을 돌려보면 마을 앞 논가운데 서있는 당산나무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돌무더기에 선돌이 세워져 있다. ‘구룡리 입석·당산나무’는 나무에 비해 선돌이 왜소해 보이는데 나무도 아주 큰 편은 아니지만 논 가운데 한 그루만 우뚝 서 있어 당차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대보름이면 입석과 당산나무 아래서 제를 지내고 풍물을 잡기 시작하여 동네 구석구석을 지신밟기하던 어린 시절의 우리 동네 모습이 여기에도 있었으리라. 이런 곳을 볼 때면 자연을 사랑하고 때론 숭배하기도 했던, 그리하여 삶의 터전을 보호받고 싶어 하던 우리 선조들의 여린 마음이 아련히 느껴지곤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들녘에서 일하던 시절 같으면 새참 먹을 시간도 한참 지났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날이 갑자기 더 더워진다. 쏟아지는 햇살을 잠시 피하고자 돗자리를 꺼냈다. 다행히 들녘엔 일하시는 분이 없다. 나무 아래 돗자리에 드러누워 종알거리다가 들판을 바라보니 엊그제 심은 듯 어린 모가 참으로 앙증맞다.

 

“자, 자아아~~ 어이~” 소리를 맞받으며 못줄을 잡던 시절이 그리워져 시선 돌리는데, 어찌나 무성한지 햇살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나무의 이파리들이 소란스럽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들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우리 몸이 출렁인다. 마치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드러누워 위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참 좋다. 정말 좋다.


다시 24번 국도와 만나 순창읍으로 들어간다. 나무 아래서 흐뭇한 게으름을 피운 덕에 늦은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눈에 띄는 건물이 있어 멈춘다. 순창초등학교 내에 있는 ‘순창 객사’다. 지금은 아이들 놀이터가 된 이곳은 조선시대 순창에 내려온 관리나 사신이 머무르던 곳으로 영조35년(1759)에 지었다 한다.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이 일본군에게 붙잡힌 아픈 곳이기도 한데 지금도 큰기둥과 건물이 예전의 세를 짐작하게 한다. 저런 건물을 지금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객사에서 나오는데 군청 옆에 ‘한해오 효자비’가 현대의 물결 속에 외롭게 서 있다. 그래도 이 학교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마음가짐이 다르지 않을까….

 

‘이야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렇게 어여쁜 돌장승이 있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남계리 돌장승’. 이제까지 보아온 장승은 대부분 부라린 눈에 툭 튀어나온 이목구비, 무서운 모습이었는데 이젠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할 듯하다. ‘중요민속자료 제 102’호인 이 장승은 돌옷을 입은 사내아이와 새색시의 얼굴을 합쳐 놓은 듯 장난기 어린 웃음이 일품이다. 정말로 기분 좋은 천진난만함이 절로 묻어난다. “도리 도리 짝짝! 오메, 이쁜 거!” 순창읍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남원쪽으로 가다가 ‘은행교’ 바로 앞에서 왼쪽 둑길로 3백m 가량 가면 강쪽이 아닌 들판쪽 둑 아래 왼쪽에 홀로 서 있다. 북쪽의 허한 지세를 보완하도록 세웠다는데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닮은 것도 같고, 양식은 미륵을 닮은 듯도 하다. 지금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것으로 끝없이 복을 짓고 있는 어여쁜 돌장승이다. 다시 순창터미널을 찾아 그 옆으로 난 임실·전주쪽의 27번 국도를 따라 2백m 쯤 가다보면 읍내 벗어나기 직전 왼쪽에 ‘충신리 돌장승’이 있다. 보통의 돌장승처럼 대강 다듬은 모습인데 사각의 돌기둥에 눈은 작고 눈썹은 아주 길고 크다. 언뜻 보면 조용하신 할아버지 모습인데 턱아래 작은 젖가슴이 볼록하게 새겨있어 여장승이라 본단다. ‘중요민속자료 제 101호’로 순창지방의 액운과 질병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고 정월초면 당제와 함께 장승제를 올리는 풍속도 있었다 한다.

 

이제 27번 국도를 따라 내일 둘러 볼 임실로 향한다. 자연휴양림이 있는 ‘회문산’은 우리 가족이 자주 가는 곳이라 그냥 지난다. 회문산 자락엔 백제 무왕 때 창건,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자 만일 동안 기도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기록을 담은 비석이 있는 ‘만일사’도 있지만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차를 돌리지 않고 지나친다. 자꾸만 ‘남계리 돌장승’의 웃음이 떠오른다. 장성, 담양, 곡성, 정읍, 임실과 접한 땅. 용골산, 회문산, 강천산이 있고 물이 맑은 고장. 남근석과 입석, 장승들의 마을공동체 문화 유적이 두드러진 것은 이 땅이 산과 구릉이 많고 농사지을 들이 적어 풍성한 농산물에 대한 염원이 더 간절했던 까닭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