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 사태났네
함평 龍泉寺
꽃무릇을 만나러 가는 길, 비가 먼저 반긴다. 재작년에도 모악산을 찾았다가 비를 만나 산행은 포기하고 빗속의 꽃을 제대로 만났다. 그 이전에도 용천사 주변을 몇 번 들렸지만 시기를 못 맞췄던지 재작년에야 꽃무릇이 사태가 질 정도란 걸 알게 되었다. 하늘이 도와준다면 이전에 부부만 올랐던 모악산을 이번엔 가족이 함께 가볍게 오르겠다는 야무진 꿈까지 안고 나선 길이다. / 글·사진 한결가족
광주에서 용천사까지는 일백리 길. 50분 정도 걸린다. 나주 노안면을 거쳐가는 길도 있지만 우리는 송정리에서 영광으로 가는 22번 국도를 탄다. 황룡강 다리를 지나는데, 누런 강물이 강둑을 넘실댄다. 요즘 들어 내린 비의 양을 가늠케 한다. 무서운 기세다. 강을 건너자 흔한 꽃들 대신 메밀을 심은 길가 화단이 다가온다. ‘누가 이런 이쁜 생각을 했을까.’ 참 정겹고 색다르게 다가온다. 우리가족은 환호성을 지르며 메밀꽃에 고운 인사를 건네곤 영광방면으로 길을 잇는다.
얼마쯤 가자 ‘월야’ 소재지가 나온다. 파출소 벽면에 커다랗게 그려진 나비가 반기는 걸 보니 함평 땅에 들어섰나 보다. “나비는 함평에서만 사는가 봐” 우리가족도 이런 농담을 하다니….
‘함평=나비’라는 이미지가 확 박혔나 보다. 나비축제로 ‘환경’군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이를 토대로 이곳에서 나는 농산물들은 모두 친환경적이라는 또다른 이미지를 생성시켜 지역농산물 판매량 증가로 이어지고 있으니, 지방자치사회의 지도자 한 사람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문장’에 이르니 곳곳에 네 번째 꽃무릇 큰잔치를 갖는다는 안내물들이 많다. ‘용천사’는 문장에서 살짝만 더 가서 손불 방면(838번 지방도로)으로 좌회전해야 한다. 산길로 접어드니 벌써 날개를 활짝 벌린 꽃무릇이 야산에 지천이다. 오종종하게 목을 밀어올리는 녀석들도 나름대로 귀엽고 싱그럽다. 우리는 길 양쪽으로 일부러 심은 듯한 꽃무릇이 앞으로 펼쳐질 꽃사태를 맛보기일 뿐이란 걸 안다.
꽃을 보다보면 어지러워요
‘용천사’일대는 온통 꽃바다가 되어 있다. 이럴 때면 언어의 한계를 절로 느낀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출발하면서 “엄마, 용천사엔 꽃무릇 보러 가요?” “으응.” “난 꽃무릇 싫은데” “왜애?” “그냥”이라고 말끝을 줄이던 한결이가 대뜸 나선다. “거 봐요, 내가 싫댔잖아요.” “왜 그러는데?” “음, 꽃무릇은 처음 보면 참 좋고 이쁜데 한꺼번에 많이 핀 꽃들을 보고 있으면 어지럽단 말이에요.” “어떻게 어지러운데?” “멍해지면서 꽃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아요.” 때론 아이의 언어가 얼마나 더 자연스럽고 생생한지….
비가 내려선지 지천인 꽃무릇은 온통 서러운 붉은 빛이다. 무려 20만평이나 되는 너른 야산과 계곡에 가느다란 허리를 곧추 세우고 꽃을 피웠다. 쉴새 없이 내리는 가랑비를 품고 더욱 붉은 모습으로 우릴 수줍게 맞는다.
이런 빗속에 누가 여기까지 찾아오겠느냐는 우리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축제를 치르려고 마련한 주차장엔 차량이 가득하다. 전국최대 규모의 꽃무릇 군락지로 이름을 알렸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노소가 어우러진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유난히 많다. 정겨운 풍경이다.
나들이객들은 비에 아랑곳 않고 산길 곳곳을 여유롭게 거닐고 있다. 발걸음은 가장 먼저 ‘용천사’로 향한다. 4세기경 마라난타 스님이 창건했고, 한때(조선중기까지) 서남해안 일대에서는 가장 큰 사찰이었다는데, 몇 번의 전란으로 폐허가 된 이후 최근 들어 복원작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은 자그마하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새겨진 꿈틀거리는 용 조각과 한 켠에 비켜 나무 아래 언덕에 서 있는 3개의 작은 석불상이 잠시 눈길을 붙잡는다. 어디에나 꽃무릇이 올라오고 있다. 쑤욱쑥, 아찔한 속도감이 느껴질 정도다. 절 이름을 짓게 한 ‘용이 승천한 샘’이라는 용천에서 약수 한 모금 마시는 걸로 절 구경을 마친다.
전국 최대의 꽃무릇축제
절 앞엔 가족단위로 만든 돌탑들이 꽃무릇들과 어울려 다른 데서 보는 돌탑들과 달리 상승감이나 억지가 덜 느껴진다. 꽃무릇에 둘러싸인 모든 것들은 행복해 보인다. 절 주변을 빙 둘러 만들어진 2km 남짓한 산책로를 따라 걷는 발걸음도 여유롭다. 잘 가꿔진 산책로 양쪽으로 가득한 꽃무릇 바다를 눈에 가득 담으며 우산을 받쳐들고 느긋하게 걷는다. 나지막한 산중턱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 별천지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말끔하게 정돈된 길을 따라 쉬엄쉬엄 걷다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용천사 주변은 꽃무릇만 있는 게 아니다. 함평군에서 맘먹고 다듬어 꽃무릇으로 축제를 여는가 하면 절 주위를 따라 온갖 야생화와 자생식물로 생태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자연스레 발길이 그리로 옮겨진다. 산길을 따라 녹차나무와 각종 야생화를 심어 놓은 생태공원이 오밀조밀 자리잡고 눈길을 붙잡는다. 전에 왔을 땐 봉숭아물들이기 체험과 신문지로 만든 공예품을 보여줘 더 좋았던 기억이 있다.
항아리로 멋을 부린 입구를 지나 조롱박 수세미로 꾸며진 터널을 통과하면 마실 물이 있는 원두막 쉼터가 나타나 별로 아프지도 않는 걸음을 쉬게 한다. 자갈과 황토가 정겨운 오솔길을 걷다보면 송판에 고사성어를 잔뜩 새겨놓고 마음을 비우며 읽고 가라는 항아리들과 움집도 나온다. 절 입구 저수지엔 용으로 만든 분수대가 물을 뿜고 있는데,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것은 큰 바윗돌을 잘라 만든 듯한 징검다리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야생화와 옥잠을 보면서 우리가족의 지금과 미래를 짧게 생각한다.
이제 여정을 마무리할 시간. 깔끔하게 자리잡은 다원으로 들어갔다. 색깔을 넣어 예쁘게 만든 초에 불을 붙인 뒤 솔잎차와 오디차를 앞에 놓고 여유와 낭만을 즐긴다. 창밖으로는 초가집과 지붕 위의 조롱박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처마에서 연신 떨어지는 빗소리, 참 좋다.
'즐거운 생활 > 등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산반도 일주 (0) | 2009.04.21 |
---|---|
<백두대간 종주기>지리산 (0) | 2009.04.21 |
전남 곡성 둘러보기 (0) | 2009.04.21 |
메밀묵처럼 담백한 정이 넘치는 봉평 오일장 (0) | 2009.04.21 |
하늘 닿은 산에 물소리 흐르고 - 봉화의 삼사 각화사, 축서사, 청량사 (0) | 2009.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