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명상글

추모 행렬

풍월 사선암 2009. 2. 22. 09:56

 

추모 행렬

 

“분명 모두 꺼냈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수치가 있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계가 있다.” 김광림 시인의 시 한 부분이다.

무얼까, 비워도 남아 있는 세계는. 시를 더 더듬어 보자.

“긍정하는 듯/ 부정하는 듯/ 그 어느 것도 아닌/ 남아 있는 비어 있는 세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 죽어 있는 것도 아닌/ 그것들마저 홀가분히 벗어버린/ 이 조용한 허탈.” 긍정도 부정도, 살지도 죽지도 않은 세계는 과연 어떤 것일까.


시의 앞뒤를 바꿔 소개해 알쏭달쏭해졌지만 수수께끼의 답은 첫째 연에 나와 있다. “예금을 모두 꺼내고 나서/ 사람들은 말한다/ 빈 통장이라고/ 무심코 저버린다/ 그래도 남아 있는/ 0이라는 수치.” 없음으로써 존재하는 세계는 바로 숫자 ‘0’이다.

누구나 아는 아라비아숫자 ‘0’은 서기 7세기 쯤 만들어질 때만 해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잔액이 비어 버린 통장에서 ‘0’이라는 제목의 시를 찾아낸 시인의 눈도 새롭다.


비어 있는 숫자 ‘0’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흔히 재물을 가리켜 숫자 ‘0’에 비유하기도 한다. ‘0’은 아무리 많아도 그 앞에 다른 숫자가 놓이지 않으면 ‘0’일 뿐이다. 재산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000’이란 재산 앞에 인품이 ‘1’인 사람이 놓이면 그 가치는 '1000'이 된다. 인품이 ‘9’이면 '9000'이 된다.

때로 악인에게 재물은 재앙이라는 마이너스의 가치로 변한다.

‘0’의 행렬 맨 앞에 성인이 놓이면 그 값어치는 무한대가 된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통장의 잔액이 약 900만원이라고 한다.

비서수녀의 명의로 된 통장에 서울대교구에서 주는 생활보조금이 매달 입금됐는데, 대부분 남을 위해 쓰고 남은 돈이다.

최근 주변에 선물한 묵주 대금이 빠져나가면 ‘0’이라는 수치만 남고 빈 통장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통장은 비어도 사랑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김 추기경을 추모하는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지하철역에서부터 시작하여 명동일대를 빙 두른 인간띠는 김 추기경이 누워있는 성당까지 이어졌다. 김수환이라는 이름이 맨 앞에 놓인 저 긴 줄의 의미는 크기만 하다.

그가 사랑이었다면 저 줄은 끝없는 사랑의 강이고,

그가 용서였다면 저 줄은 무한한 용서의 물결이다.

모든 것을 비우고 떠났어도 김 추기경은 남아 있다.


김태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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