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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폭락이 주는 공포와 희망의 아이러니

풍월 사선암 2008. 12. 23. 10:49

집값 폭락이 주는 공포와 희망의 아이러니


[머니투데이 임유USC대학 객원연구원(전 여신금융협회 상무)][[머니위크] 임유의 US 리포트/ 스와프밋에 가보니]


금요일 오후, 말로만 듣던 스와프밋(swap meet)에 가보았다. 한인 이민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초기의 많은 이민자들에게는 경제적 기반을 잡게 해 준 '땀과 눈물'의 삶의 현장이었지만, LA폭동과 대형마트의 등장 이후로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곳이다. LA 시내에서 차로 20분을 달리자 North Hollywood라는 소도시에 위치한 La Fiesta 스와프밋이 저만치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절망과 고통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얼핏 보아도 상가의 반이 비어 있는 것 같다. 한참 바빠야 할 시간임에도 손님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오늘 만나기로 한 신발가게 장 사장이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불황', 절망을 얘기하다

 

쉰을 바라보는 중년의 장 사장은 남미에서 신발 도매로 꽤 성공했던 이력을 갖고 있다. 10년의 남미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이민 온 지가 올해로 8년째다. 연신 담배를 피워 대는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참으로 고단했던 그의 2008년으로 들어가 본다.


이곳 스와프밋에 터를 잡은 지가 3년이 됐다는 그의 첫마디는 '절망'이다. 전체 100여 점포 중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은 40여 곳에 불과하다. 한때 90%를 넘어서기도 했다는 점포 점유율이 수직 하강을 시작한 시기는 작년 하반기 무렵이라는 설명이다. 약 8만스퀘어피트(약 7425㎡)에 달하는 대규모 상가를 한국인 사업가가 임차(마스터 리스)해서 100여 업체에게 임대(서브 리스)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달에는 그나마 남아 있는 40여 점포 중 7개 업체만 월 임대료를 제 날짜에 낼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다 보니 결국 사업을 포기하고 건물주에게 운영권을 넘기고 말았다.


"매출은 얼마나 줄었어요?" 어렵사리 꺼낸 질문에 착잡한 눈빛이 답을 대신한다. "직원이래 봤자 나와 집사람뿐이니 인건비 걱정은 없고 월 1600달러 남짓한 월세만 충당하면 되는데…. 매출이 60%가 줄었어." 마진율을 25%로 잡고 7000달러어치를 팔면 손익분기점이지만 올 하반기부터는 아예 장부 기장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재고로 쌓인 신발을 팔아 월세를 충당하고 있으니, 본전은 고사하고 제살을 갉아 먹고 있는 상황이다. "다음달부터는 집주인과 담판을 해서 월세라도 줄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냐"며 헛웃음을 짓는다. 짐짓 비장했던 필자가 무안할 지경이다.


스와프밋에 오는 손님은 라틴계 이민자(불법 체류자가 대부분)와 흑인이 대부분이다. 이른바 저소득층이다. 신용카드 매출이 전체의 10%도 채 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경제가 악화되면 일자리는 줄어드는 법, 그 고통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인생들에게 제일 먼저 닥쳐올 수밖에 없고, 그들을 상대하는 스와프밋이 불황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셈이다. 예순은 되어 보이는 옆집 네일아트 여사장이 3명이나 됐던 종업원을 모두 내보내고 주말에만 한두명씩 파트타임으로 부른다면서 어느새 긴 한숨의 대열에 합류하자, 이곳저곳에서 한마디씩 거든다. 이런 불황은 살다 살다 처음 겪는다면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본 스와프밋, '축제(La Fiesta)'의 전경이 몹시 스산하다.


◆'집값 폭락', 공포에 휩싸이다


한국에서 증권회사 지점장을 끝으로 10년 전에 이민 와서 지금은 부동산 임대업을 하고 있는 김 사장과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시간이면 늘 만원사례인 시내 유명 음식점에서의 만남인지라 서둘러 발길을 재촉한다. 이곳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폭탄 세례를 비켜가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있다. 김 사장은 4400스퀘어피트(약 410㎡) 규모의 아파트 한동(약 99㎡ 크기의 아파트 4채로 이루어진)과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아파트 한동(4채)을 임대하고 있다. 고통의 무게는 술로도 달래지지 못하는가 보다. 회상은 분노로, 다시 한숨으로 이어진다.


부동산 경기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지난 2004년 말, 105만달러와 85만달러짜리 아파트(20% Down, 30년 모기지) 2동을 구입했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집값이 150만달러와 120만달러로 치솟을 때는 가끔씩 자신의 다리를 꼬집어 볼 정도로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때는 200만달러까지 가는 건 시간문제인 줄 알았지." 팔아 버리자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면서, 2007년에 들어 와 하락하기 시작하던 집값이 어느덧 85만달러와 65만달러로 추락해 버렸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고점 대비 45%, 원금 대비 20%가 떨어진 것이다. '이미 투자 금액 40만달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추락이 멈추기만을 초조하게 지켜볼 뿐'이라고 한다. 그나마 아파트가 시내에 있어 받은 월세로 이자와 관리비를 충당하고도 남았는데, 최근에는 월세마저 떨어지는 추세(초기 두달치 월세를 면제해 주겠다는 파격적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보니 만약 월세로 은행 이자를 충당하지 못하면 파산까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며 긴 한숨을 뱉는다. 예순을 바라보는 노신사의 눈길이 어지럽다.


◆'내집 장만', 희망을 쏘다


한쪽에서 절망과 공포를 얘기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희망을 노래한다. 세상은 이처럼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미국에 이민 와 10년을 셋집에 살았다는 친구 녀석의 내집 장만의 부푼 꿈을 듣고 난 이후 줄곧 드는 생각이다.


이곳 모기지(30년 고정)는 이제껏 10만달러 당 월 630달러 정도가 일반적인 상환조건이었다. 그러나 최근 모기지 금리가 연 5.5%(최우량 신용 조건)로 하락하더니 조만간 5% 미만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10만달러 당 500달러 시대가 도래한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80만달러짜리 집을 구입하려치면 10만달러 내고도(Down Payment) 매월 4500달러씩 원리금을 갚아야 했다. 그러나 집값이 떨어져 동일한 집을 50만달러면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모기지 상환액도 매월 2400달러 미만이면(10만달러 Down 조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반값 아파트 공약(?)'이 한국이 아닌 이곳 미국에서 실현되고 있다. 내집 장만의 절호의 기회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최소한 내년 상반기까지는 하락의 추세가 이어질 것 같다면서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친구의 들뜬 목소리가 전혀 밉지 않다. 온통 절망과 어둠의 메시지만 난무하는 세상에 누구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이역만리 이국땅까지 와서, 삶의 터전을 가꾸기는커녕 죽음의 계곡으로 내몰리고 있는 한인들에게도 하루빨리 희망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