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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고비마다 직접 뛴 DJ / 대통령 당선 사흘 뒤 미 재무차관과 담판

풍월 사선암 2008. 10. 25. 11:38

경제 고비마다 직접 뛴 DJ

[중앙일보] 대통령 당선 사흘 뒤 미 재무차관과 담판

“금고 텅 비었다” 국민·기업에 동참 호소


10년 전 한국의 외환위기는 겉으로만 보면 국제통화기금(IMF)과 서방 선진국들의 자금 지원에 의해 극복됐다. DJ 정부는 IMF 권고에 따라 금융·기업·공공·노동 등 4대 부문의 개혁을 시간표를 짜놓고 전투처럼 밀어붙였다. ‘주어진 개혁’이니 ‘위장된 축복’이니 하는 소리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 극복의 이면엔 대통령의 리더십과 그 리더십을 믿고 따른 국민의 단합이 있었다.


김대중(얼굴) 당시 대통령은 고비마다 직접 나섰다. 당선된 뒤 사흘 만에 데이비드 립튼 미국 재무부 차관을 만나 ‘면접 시험’까지 치렀다.


새 정부의 개혁 의지를 못 미더워하던 미국에 IMF 협약 이상의 개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DJ가 약속한 ‘IMF 플러스’엔 정리해고도 들어 있었다. 정리해고는 DJ의 정치적 기반인 노동계가 결사 반대해온 사안이었다. DJ도 끝내 미루고 싶었던 사안이기도 했다. DJ가 이를 양보하면서 면접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됐다.


필요할 땐 직접 나서 진솔하게 국민을 설득했다. 국민과의 대화에서 “금고가 비었다”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개혁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재벌 개혁이 미적거리자 5대 재벌 총수를 직접 만나 압박하기도 했다.


위기 극복의 핵심은 인사였다. 그는 ‘코드 인사’를 줄이는 대신 꼭 필요한 자리엔 역량 있는 사람을 발탁했다. 이헌재 당시 비상경제대책위 기획단장을 금융감독위원장에 앉힌 것이 대표적이다.


이 전 금감위원장은 대통령선거 당시 적진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진영을 도왔던 전력이 있었지만 따지지 않았다. 별다른 인연이 없던 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을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이런 경제부처 인사는 당시 공동 여당인 자민련의 의견을 많이 반영했다지만, DJ가 위기를 극복할 역량을 우선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내 사람’이라고 감싸고 돌지도 않았다. 정부 출범 석 달 만에 김태동 경제수석과 강봉균 정책기획수석을 맞바꾼 것도 그런 사례다. 경제부처와 손발이 맞지 않아 잡음이 계속되던 김 수석을 후선으로 물린 것이었다. 김 수석은 ‘DJ 노믹스’를 세우는 데 깊숙이 간여한 학자였지만 인연에 연연하지 않았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팀워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대통령이 교통정리를 해준 것이다.


경제부총리를 없앴지만 ‘컨트롤 타워 부재’에 따른 혼선은 없었다. DJ가 부처 간 역할을 명확히 한 데다, 이규성 재경부 장관이 맏형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이다. 과거 경제부총리가 주재했던 경제대책조정회의는 자신이 직접 주재하며 내각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이에 따른 국민의 적극 호응이 결정적이었다. 장롱 속에 모셔둔 돌반지·금가락지까지 들고 나온 금모으기 운동은 그 상징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노동계가 재계·정부와 함께 모여 노사정위원회 활동을 시작했고, 금기 사안이었던 정리해고 법제화를 수용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DJ는 취임 후 1년 반 만인 1999년 8월 15일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할 수 있었다. 대우그룹 문제 등 부실은 산재했지만, 환율(1207원)·콜금리(4.67%)·외환보유액(647억 달러) 등 경제지표는 정상 궤도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이상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