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늙음은 죄인가?

풍월 사선암 2008. 10. 5. 00:01

 
 

늙음은 죄인가?


지하철에서 젊은 여자 앞에 섰다가 봉변을 당한 노인의 모습이 가끔씩 떠오른다. “할아버지, 왜 제 앞에 서 계셔요. 경로석 있잖아요.”

 

본의 아닌 처신이 젊은 여자에게 불편을 준 것이다. 한마디 대꾸 없이 얼핏 돌아서는 노인의 뒷모습이 나를 슬프게 한다. 무심코 밀려가다 머문 곳이 거긴데 결과는 주검보다 더한 차가움이었다. 메가톤급 설움이었다. 함부로 설 일이 아니다.


늙음 앞에 자유로울 사람은 없는데 그녀는 아니었다. 현재는 부모의 모습이요, 장차는 자기 모습일 것인데 코앞의 자신 밖에 못 본 게다. 늙음을 앞세우다가는 누구에게 변을 당할지 모르는 세상이다. 늙어 처신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죄인처럼 죽어 살려는 데도 가슴 속 저 맡 바닥에서 가슴 속 저 밑바닥에서 작은 불씨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가 있는데 버리지 못한 미련이 아직 남았음인가.


한 때는 늙음이 벼슬인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늙음 앞에 막상 내가 서보니 벼슬이 아닌 부끄러움이다. 아니 부끄러움이 아니라, 바로 죄인지도 모른다.

야속하게 지나간 세월이 참으로 아쉽다.


늙음이 죄인 세상. 젊은 사람들 보란 듯이 늙지 않아야겠다. 이것은 오기가 아니다. 곱게 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추하지 않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보자고 다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울만의 [청춘]을 외우면서 힘차게 살아야겠다. 늙음은 결코 머리 색깔이나 피부의 주름이 아니다. 꽃보다 아름답게 그리고 화려하게 지는 가을 산

단풍처럼 살다가자.


서울주변의 산들을 올라보면 세계적인 명산임에 하나같이 감탄한다. 채 비우지 못한 마음그릇 비워보자고 오늘도 그 지하철을 탔다. 경로석을 찾았으나 자리가 없어 그 옆에 섰다. 여기가 내 자리인 것 같다. 서고 보니 역시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어두운 창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이 오늘따라 초라한 것은 왜일까?

 

- 류준식 수필선 '아리의 눈물'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