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이해해 보려던 때가 있었다. 가을 저녁을, 새벽을 이해해 보려던 것처럼 무모한 시도였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차마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세계 앞에서 두렵고 외롭고 떨렸으므로 '이해'까지가 절대로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지식'의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저편에서만 빛났다.
어느 순간 신앙 체험에서 말하는 '들림'과도 같은 사랑이 올 때, 그 사랑은 신성의 반열에 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의 탐구는 곧 신을 향한 질문이요, 탄식이요, 비통한 갈망이다. 사랑이란 진주를 품은 자는 다만 아프고 뿌듯할 뿐이다.
'기쁨'과 '갈망'이 동시에 자라나는 마음이 곧 사랑이고 그것은 근심과 같은 것이라고 이 시는 말한다. 근심은 외롭고 고단한 것임으로 누군가의 손을 부른다. 손 잡는다는 것, 그 맞잡은 손에서 열리는 빛이 곧 사랑의 뜻임을 알게 한다. 손 잡는다는 것, 손 잡아준다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처럼 쉬운 일도 없으련만 우리는 그마저도 못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처음에 이 시를 눈으로 '읽기' 전에 귀로 '들었던' 분들이 많을 것이다. 메조 소프라노 백남옥의 음성이었고, 작년 봄에 세상을 뜬 작곡가 김순애 선생이 빚은 선율이었다. 송창식의 청신한 목소리와 몸짓 또한 우리 마음에 사랑의 핵심들을 샘물처럼 쏟아 부었다. 발길이 바람 부는 새파란 풀밭을 만나거나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멜로디를 흥얼댔다.
김남조(81)는 영성(靈性) 가득한 시인으로서 우리 여성 문단의 독보적(獨步的) 존재였다. 지금도 기도와 사랑과 겨울의 시인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 신의 보태심 없는 그리움의/ 罰(벌)이여/ 이 타는듯한 갈망/ (…)/ 다 같이 늙어진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서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 할까/ (…)' (〈候鳥〉). 김 시인은 "아무리 시에 재기가 많아도, 시대에 대한 모럴이 가득해도 영성이 없어서는 미달이지 않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진정 시의 원로만이 할 수 있는, 갈증 나는 이 시대의 영혼들에게는 샘물과도 같은 말이다.
장석남·시인 / 강명순 그림 / 송창식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