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五友歌(다섯 벗의 노래) - 윤선도

풍월 사선암 2008. 8. 16. 12:48

 

五友歌(다섯 벗의 노래) - 윤선도


내 벗이 몇이냐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떠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은지라

좋고도 그칠때가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찌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않은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지거늘

소나무야 너는 어찌하여 눈과 서리를 모르느냐

땅속 깊이 뿌리가 곧은 줄을 그것으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러고 사철을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떠서 만물을 비추니

밤중에 밝은 빛이 너만한 것이 또 있겠느냐

보고도 말이 없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

 

작자가 56세 때 해남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에 들어 있는 6수의 시조로,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을 다섯 벗으로 삼아 서시(序詩) 다음에 각각 그 자연물들의 특질을 들어 자신의 자연애(自然愛)와 관조를 표백하였다. 이는 고산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어 시조를 절묘한 경지로 이끈 백미편(白眉篇)이다.

 

 

윤선도(1587년~1671년)는 자(子)를 약이(約而)라 하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선조 20년에 출생,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12년까지 85년의 생애에, 반복된 벼슬과 유배와 은둔 생활 가운데, 특별하고 훌륭하며,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불후의 명작들과 시문학 작품들을 남겼으므로, 오늘날 후세의 귀감이 되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요즘에는 초등학교 참고서에도 나와 중요한 문화인물로 추앙받는 것이다.


강직한 성품으로 인한 정치적 좌절과, 자신의 이상과 현실에 대한 연민과 갈등 속에서, 그러나 한 시대의 사류(士類)를 주름 잡았고, 오늘날까지 윤선도의 시가는 물론 정치에 대한 정견과 원림조영(苑林造營)에 대한 연구,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농토를 확장한 배후 연구, 의약(醫藥), 음양(陰陽), 복서(卜筮), 지리(地理)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윤선도의 삶과 학문은 조선조 문화의 한 축이다.


고산은 봉림대군과 안평대군의 사부로 두 대군을 잘 보도하였기에, 훗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한 다음, 사부였던 고산을 특별히 예우한 사실과, 현종의 외조부인 잠곡 김육 선생과 당시 절친하게 지낸 일은 역사에 잘 기록되어 있다.


훗날 영조의 사위(부마)인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여 윤고산이 릉자리로 잡았던 수원에, 정조는(正宗:正祖)자기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옮겨왔으며, 정조 자신의 묘도 쓰게 하고, 수원에 성을 쌓아 작은 서울을 만들고 자주 내왕하였으며, 또한 박명원의 상소로 정조는 윤고산에게 감사의 뜻으로 전라감사를 시켜 고산유고를 간행토록 하여 고산유고에 수록된 산릉의(山陵議:릉자리 감정 의견서) 등을 읽고, 이 산릉의를 홍재전서(弘齋全書:홍재는 정조의 호)에 실으며, 고산을 무학대사 이후 최고의 감여가(堪與家)로 평가하였다.


의당 정인보는 고산의 시가(詩歌) 작품에 대한 평을 "호남 산수간의 야경을 신같이 그려 놓았다"고 감탄하였으며 박준규 교수는 "모양과 색깔과 향기가 3박자로 갖추어진 값진 꽃"이라고 찬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