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인 생 찬 가 - H. W. 롱펠로우

풍월 사선암 2008. 6. 26. 07:33

  

인 생 찬 가

                                - H. W. 롱펠로우

 

슬픈 詩語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낱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어니,

만물은 겉모습 그대로가 전부는 아니다.


인생은 진실한 것! 인생은 진지한 것!

무덤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너는 본래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닐지니.


우리가 가야할 곳, 혹은 가는 길은;

향락의 길도, 슬픔의 길도 아닌,

내일이 저마다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인생이니라.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빠르다.

우리 심장은 튼튼하고 용감하여

마치 싸맨 북과 같이, 무덤을 향해

역시 장송곡을 울리는구나.


세상의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영(露營)안에서

말못하고 쫓기는 짐승이 되지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미래를 믿지말라!

죽은 과거는 죽은 채 묻어두라!

활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서 활동하라!

가슴에는 심장이 있고, 머리 위에는 신이 있다!


위인들의 모든 생애는 말해 주느니

우리도 장엄한 삶을 이룰 수 있고,

떠날 때에는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의 발자욱을 남길 수 있음을


아마도, 후일에 다른 사람이

장엄한 삶의 바다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나 절망에 허덕일 때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 발자취를


자, 그러니 우리 일어나 힘차게 일하자.

어떠한 운명도 헤쳐 나갈 정신으로

끊임없이 성취하고 추구하면서

그리고 일하면서 기다림을 배우자.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Henry Wadsworth Longfellow)

출 생 : 1807년 2월 27일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사 망 : 1882년 3월 24일(75세)

배 경 : 변호사인 아버지는 아들도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다  

교 육 : 보우댕 칼리지(Bowdoin College)를 졸업하면서 학교 측으로

           부터 현대언어 교수직을 제의받았다.

           당시 19세 (졸업 후 약 3년 동안 유럽에 유학후 귀국)

1829년 : 1835년까지 모교인 보우댕 칼리지 교수로 재직하였다.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기 전에 또다시 유럽으로 갔으며, 함께

          갔던 부인 매리 스토러 포트가 유산 후 로테르담에서 죽었다.

1834년 :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임명

1837년 : 캠브리지에 혼자 돌아온 롱펠로우는 찰스강이 내려다 보이는

          집에 하숙을 한다.

 

이 집은 크레이기(Craigie)라는 괴팍한 여인의 소유였는데 몇 년 후 이 집의 소유가 나탄 애플턴(Nathan Applet!!on)이란 사람의 소유로 바뀌면서 롱펠로우는 그집 딸 프란시스 애플턴과 1844년 결혼하게 되며 이 집은 결혼선물로 롱펠로우 부부에게 주어졌다.

 

롱펠로우는 하버드에서 주옥같은 시집을 내놓아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롱펠로우의 집은 하버드 대학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에머슨, 호오손, 줄리아 와드 호우, 찰스 서머 등 유명한 문학가, 철학자들과 학생들이 이 집에 모여들었다.

 

롱펠로우는 친구인 나다니엘 호오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1847년 자신의 대표작인 [에반젤린](Evangeline)을 쓰는데 [줄거리] 에반젤린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 미국 전역을 떠돌아 다니다가 마침내 필라델피아에서 가브리엘을 찾아내지만 이 때는 이미 그가 죽어가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1854년 시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하버드 교수직을 사직하고는 시를 쓰게 된다. 그 결과 [Hiawatha의 노래]인데 이 장시는 처음으로 미국 인디언을 소재로 쓰여진 시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61년 부인이 우연한 화재사고로 죽고 롱펠로우도 부인을 구하려다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되고 이로 인해 롱펠로우는 수염을 기르게 된다. (사진 참조)

 

그 후 롱펠로우는 사망할 때까지 20여년간 고독하고 우울한 생활을 하게 되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단테의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롱펠로우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등 유명 대학으로부터 명예학위를 받기도 하고 빅토리아여왕으로부터 초청받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명예를 받았다. 1882년 3월 24일 그가 죽었을 때(75세) 반 위크 브룩스는 “뉴잉글랜드의 아침을 비추던 모든 태양 가운데서 그는 가장 달콤하고 가장 큰 태양이었다” 라고 읊었다.

 

롱펠로우의 집에서 1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마운트 오번(Mount Auburn)이라는 공원 묘지에 롱펠로우는 묻혔다. 18년간 하버드대학 교수직에 있었으며, 케임브리지에서 많은 詩를 발표하였다.

 

[에반젤린/1847년] 핀란드의 칼레발라의 영향을 받고서 쓴 인디언의 신화적 영웅 이야기시[하이어워사의 노래 / 55년] [퓨리턴 군인의 연애 이야기 "마일즈 스탠디시의 구혼/58" 등의 장시(長詩)가 유명하다. [인생찬가, 밤의소리/39년] [마을의 대장간을 포함한 민요/42년][화살과 노래를 포함한 블루주의 종루(鐘樓)/45년] [길가 여인숙 이야기/63∼74년] [단테의 신곡 번역/65∼67년] [황금 전설/51년] [뉴잉글랜드의 비극/68년] [신성(神聖) 비극/71년] [크리스터스/72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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