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泰山)을 누가 5악지수(五嶽之首), 천하명산제일(天下名山第一)이라 하였는가.
천외촌에서 바라본 태산은 숲도 없는 그저 평범한 석산일 뿐이다.
저런 산을 보려고 이곳까지 왔나 하는 허탈감마저 든다.
▲ 남천문과 오대부송
그러나 막상 천가를 지나 옥항정에 서면 생각이 완전히 바뀐다. 그때서야 天下名山 第一處(천하명산 제일처), 五嶽獨尊(5악독존)이라는 말을 실감케 된다. 태산의 주봉인 옥황봉은 해발 1,542m에 불과하지만 시야에 어느 하나 거칠 것 없는 조망처에다 팔방에서 조아리며 기어오르는 듯한 중첩한 산릉들은 역시 이 산이 큰 산(泰山)임을 느끼게 한다.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 황제의 권위를 갖춘 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태산이 얼마나 높고 크길래 공자도 登泰山而小天下(태산에 올라서니 천하가 작아보인다)라고 하였겠는가.
태산은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우뚝 솟아 있다. 그래서 공자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뿐만 아니라 태산은 진나라 시황제 이후 72황제가 올라 봉선의식을 행한 산이다. 웅장하고 경이로운 곳으로서 곳곳에는 명승고적들이 즐비하게 흩어져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황산이 미(美)의 산이었다면 태산은 기(氣)의 산이고 예(禮)의 산이다. 그런 태산을 논어 한 권을 들고 공자와 함께 두번째 그림산행을 위해 등행해 본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유쾌한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이른 아침 우선 대묘(岱廟)부터 돌아본 뒤 태산으로 향했다. 9시40분 태산 입구 천외촌에 도착, 거칠게 운전하는 미니버스로 몇 굽이를 돌고 돌아 중천문(847m)에 도착했다. 삭도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는 눈과 얼음이 깔려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중천문 삭도정류장에서 45위엔을 내고 달을 바라본다는 월관봉(月觀峰)으로 오른다.
▲ 범종루
옥황정까지 무려 7천 개가 넘는 돌계단
천교를 건너 남천문에 이르니 18반을 힘들게 오르다 지친 사람들이 계단 여기저기 아무렇게 주저앉아 땀을 닦는 것마저 귀찮아하는 표정들을 짓고 있다. 일천문에서 옥황정까지는 7천 개가 넘는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대송정(對松亭)에서 0.8km에 걸쳐 남천문(南天門)에 이르는 돌계단을 18반이라고 한다. 경사 50도가 넘는 1,633개의 계단이 등객의 마지막 혼을 빼는 곳이다. 이들은 7천 개가 넘는 돌계단을 걸어올라 옥황정에서 기도를 드리면 10년은 더 산다고 하여 자기 키만큼 큰 향촉을 메고 저렇게 힘든 돌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남천문 바로 옆에 망부산(望府山)과 옥황정(玉皇頂) 갈림길 표시가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옥황정으로 오른다. 남천문은 비룡암(飛龍岩)과 상봉령(翔鳳?令) 암벽 사이 해발 1,460m에 자리 잡고 있다. 원대에 세워진 것으로 삼천문(三天門)이라고도 부른다. 양사언은 이곳 남천문에 올라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하는 시를 지었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양사언은 고성과 간성의 부사로 지내며 산을 좋아하여 설악산과 금강산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은 있다.
남천문을 지나 공터에 서니 강하고 차가운 북서풍이 얼굴을 훔친다. 천가 입구 상가지역에는 태산의 명물인 전병(煎餠)을 여기저기서 통을 돌려가며 굽고 있다. 태산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전병에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몇 계단을 올라 석문을 통과하니 이곳이 천가(天街)라고 하는 ‘하늘거리’다. 천가는 남천문에서 벽하사를 거처 옥황정까지 0.8km를 말한다. 천가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조망으로 태산을 왜 큰 산이라 말하는지 알 수 있다.
▲ 옥황정과 향로대
성인(聖人) 공자가 걷고, 시선(詩仙) 이백과 시성(詩聖) 두보가 걸었을 하늘길을 여유를 갖고 조망을 즐기며 걷다가 4각 석조건물인 백운정에서 또한 사방의 절경을 조망해본다. 오른쪽으로는 멀리 망부산(望府山) 정상에 작은 정자가 중국산수화 한 폭을 보는 듯하며, 정면으로는 하늘 위에 또 하늘 산이 작게 떠 있다. 쭉 뻗은 하늘길에는 녹색 인민군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자기 팔뚝보다 큰 향을 아무렇게나 메고 복을 빌기 위해 옥황정 계단을 겹겹이 오르는 모습은 태산에서나 볼 수 있는 중국 특유의 진풍경이다.
건너다보이는 산릉에 우뚝 솟은 홍덕루(弘德樓)에서는 성모여의종(聖母如意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범종소리는 나에게 세속의 무거운 짐을 이곳에 벗어놓으라 한다. 나는 공묘로 오르는 석문 앞에 선다. 석문에는 ‘望吳聖蹟(오나라 아름다운 유적을 바라보다)’라고 쓰여 있다.
잠시 공자를 생각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고, 마흔에는 모든 일에 혹함이 없게 되었으며, 쉰에는 천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사물의 이치를 들어 저절로 알게 되었고, 일흔에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되었느니라’ 했다. 지금도 후학들은 삶의 근본의 이치를 여기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한낮 범부에 지나지 않는 나는 어찌 성인의 말씀에 범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가슴속을 파고드는 범종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범종소리를 가슴에 안고 조금 오르니 벽하사다. 벽하사는 옥황상제의 딸인 벽하원군 여신을 모신 곳으로서, 송대인 1009년에 세워져 1770년에 개축된, 태산에서 가장 큰 고대 건축물이다.
이곳에서 조금 오르면 당나라 현종이 친히 썼다는 기태산명(紀泰山銘)비 가 있다 이 비갈(碑碣)은 한(漢) 이래 가장 웅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당시의 화려한 봉선의식을 심안으로 스케치하여 본다.
▲ 자광각에서 본 암봉
마치 노천 서예전시관 보듯 사방에 명필 음각
몇 발자국 더 오르니 벽애(壁崖)에 새겨진 많은 문구들 중에서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는 글씨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태산을 칭송하는 크고 작은 수많은 문구들은 마치 노천 서예전시관을 보는 듯하다. 그러니 나는 지금 2,0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공자와 함께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옥황정에서 동쪽으로 70m에 위치한 일관봉(日觀峰)에서 떠오른 일출을 보면 새벽녘 운해를 뚫고 오르는 태양이 그 빛이 하도 찬란하여 어래광(御來光)이라 한다. 공자 등봉처인 첨노대(瞻魯臺)에는 웅치천동(雄峙天東)비문과 공자소천하처(孔子小天下處)라고 새긴, 키보다 훨씬 큰 비가 서 있다. 공자는 이곳에서 함께한 제자들에게 ‘동방에 작은 나라가 있는데 그곳은 인자(仁者)가 살 만한 곳이다’라고 했다.
▲ 천가를 오르는 등산객들
그 때에 벌써 지금의 한국을 바라보며 공자가 그렇게 이야기 한 까닭은 무슨 뜻에서일까? 중국인들은 동쪽을 해가 떠오르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 여기며 마음으로 받든다. 그런 동쪽에 작은 나라가 있고, 인자가 살 만한 곳이라고 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勅修玉皇頂(칙수옥황정)’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옥황정 문을 들어선다, 옥황묘(廟)는 태산에서 가장 높은 옥황대제를 모신 곳으로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경내에는 옥황전, 영욱전, 명하정 등이 있다.
옥황정에 들어서니 향 연기와 냄새가 역겨울 정도다. 천상신부(天上神府)라는 현판이 붙은 옥황전 본전 안에 들어가 절을 하려면 100위엔을 내야만 한다. 이구씨는 옥황전 안에 들어가 또 절을 한다. 가는 곳마다 입장료에 향촉대와 절값을 별도로 내야 한다.
▲ 전병가게 아줌마
“절을 하고 돈을 내지 않으면 기도의 효과가 없다”고 하니…. 중앙에 있는 탑에는 ‘태산극정(泰山極頂) 1,545米(m)’로 표기돼 있다. 탑 경계 4각 쇠사슬에는 겹겹으로 사랑을 맹세한 자물쇠가 매달려 있다. 탑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향촉대에 머리 긴 어느 아가씨는 자기 키만큼 큰 향을 세우고는 연신 손을 합장하며 절을 한다. 무슨 소원을 저렇게 열심히 비는 걸까?
북적대는 인파와 여러 나라의 요란한 말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어찌 이곳을 성스러운 곳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옥황정 뒤편에 위치한 장인봉(丈人峰)을 찾았다. 2년 전 천주봉쪽으로 오를 때 10m가 넘어 보이던 천하제일산(天下第一山)이라는 글씨를 보고도 강풍과 눈보라 속에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카메라를 꺼낼 수 없어서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 명필을 다시 보고 싶어 찾았다.
오늘도 바람이 약간은 쌀쌀하게 느껴지지만 그 날에 비하면 무척 온화한 편이다. 2년 전 눈보라 속 고군분투를 잠시 회상하며 가슴 후련한 명필을 감상하고 철탑이 세워진 태산제일처 삼각점을 지나 공자묘로 내려선다.
공묘는 조금 한가로웠다. 그 앞에서 논어 첫 페이지를 펼친다.‘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 하랴!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 하여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가 아니랴!’
▲ 천가의 서설
태산 전문가 안 교수에게서 태산석 벼루 받아
학창시절 그렇게도 졸리고 따분하던 이 문구가 이제야 그 깊은 뜻이 머릿속에 바람을 일으키니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일까? 하늘을 쳐다보니 유난히 푸른 하늘에 흰 구름 한 가닥 순풍에 일엽편주인 듯 가는 길이 바쁘다.
되돌아 남천문에 도착하니 딸아이가 배가 고파 걸을 수 없다고 계단에 주저앉는다. 가게에 들려 딸아이는 지오차이핑(부추호떡)을, 나와 이 대장은 맥주 한 잔씩을 단숨에 마신다. 이 맛을 누가 알리요.
우리는 남천문에서 걸어서 중천문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남천문에서 18반 계단길을 내려다보니 계단이 어찌나 가파른지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이런 곳에서는 구르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경사가 심하면 18군데에 쉴만한 반(盤)을 만들어 놓았다 하여 18반이라 하였겠는가.
▲ 태산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18반을 내려서서 조양동을 지나는데 힘들게 무거운 짐을 메고 오르는 사람의 목덜미에는 주먹만큼 굳은살이 박였다. 웬지 가슴이 찡해옴을 느낀다.
대송정에서 조금 내려서니 오대부송이다. 진시황이 봉선을 위해 산에 오르던 중 폭우를 만나 이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는데, 그때 오대부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소나무다. 역광을 받아 묵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본래의 오대부송은 폭우에 떠내려가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청대인 1730년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하산을 마친 뒤 우리는 태산에 관한 자료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대묘(垈廟) 북문 옆에 산다는 안정산(安廷山ㆍ70) 노(老)교수를 찾아갔다. 노 교수는 태안서화협회 주석으로서 태산에 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으며, 태산에 관한 많은 논문과 서적도 출판했다고 한다.
우리들은 안 교수댁으로 초대받아서 차 한 잔을 대접 받았다. 그는 태산 관련 책자와 도록을 챙겨주며 태산에 관한 이야기를 그칠 줄 모른다. 안 교수는 태산은 사화산으로서 1년에 2cm씩 솟아오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말고 그는 갑자기 서재로 올라가더니 뿌연 먼지가 낀 벼루를 들고 나와 나에게 선물했다. 이것은 태산에서 출토된 5억 년이 넘은 화석으로 만든 벼루라며 마음의 정표로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오래 전 태산연구원으로 있을 적에 싸게 구입한 것이며, 지금은 국가에서 법으로 엄격히 규제하여 태산에서 이 돌을 채취할 수 없다고 한다.
나도 미리 준비하여간 설악산 작품 한 점을 선물했다. 아직 한국에 가보지 못하였는데 한국 산을 볼 수 있어서 너무 반갑다고 하며, 한국에도 이런 훌륭한 산들이 많이 있느냐고 하며 미소를 띤다.
안 교수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숭산 소림사를 가기 위해 정주로 가는 열차를 타려고 역전으로 향했다. 오후 햇살을 받으며 작별이 아쉬워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는 노교수의 하얀 머리카락에 겨울바람이 더욱 차게 느껴진다. 5억 년의 세월의 정을 가슴으로 슬며시 끌어안았다.
/ 그림·글 곽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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