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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산행]선자령 새 코스 르포

풍월 사선암 2008. 2. 6. 20:06

[한겨울산행] 3 선자령 새 코스 르포

“엉덩이썰매 타다 보면 어느새 산행 끝”

횡계 주민들 개설…의야지까지 하산 일변도의 7km 눈길

 

▲ 선자령에서 의야지로 가는 길 중간의 설원을 향해 오르고 있는 취재팀.

아직 거의 찾는 사람이 없는 새 코스다.


겨울이면 수많은 등산동호인들이 줄을 이어 찾는 적설기 명산 선자령에 새 갈래길이 생겨났다. 그간 선자령 등산 후 하산로는 초막골이나 보현사계곡 등 모두 동쪽 급사면의 계곡으로 떨어지는 길뿐이었다.


이들 동사면 길은 눈썰매 타기가 겁날 만큼 급준한 비탈길이 대부분이어서 종종 올랐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내려오는 재미없는 산행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점에 착안한 이 지역 주민들이 대관령 방향으로 슬쩍 되내려오는 완경사의 순한 산행로를 개설한 것이다.

 

▲ 의야지 코스 중간의 설원을 걸어보고 있는 취재팀.

등 뒤의 풍력발전기 쪽으로 가야 의야지 방면 능선길로 접어들 수 있다.


당사자는 용평면 횡계리의 ‘바람마을’ 의야지 주민들이다. 의야지는 대관령 해발 750m대에 위치한 마을로 감자, 배추, 당근, 양파 등의 작물이 주된 수입원이다. 이 의야지 주민들은 농사 수입에만 만족치 않고 좀더 의욕적으로 마을을 관광지화하여 추가 수익을 올리고자 5만여 평 규모의 눈놀이장인 스노파크를 이미 몇 년 전 마을주민 공동으로 개장한 바 있다. 여기에다 선자령 등산객들을 이곳으로 하산토록 유도해 좀더 이용객의 숫자와 폭을 넓히고자 한 것이다.


의야지 마을은 50여 호에 주민 약 14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지만, 주민 중 백두대간을 완주한 이가 무려 30명이 넘는 재미있는 마을이다. 김영교씨를 비롯한 이들 농민 등산꾼들은 선자령 정상부터 의야지 마을에 이르기까지 등산로 곳곳에 안내판을 세우고 등산로를 정비해두는 등 모든 준비를 마쳐둔 다음 본지 편집실에 알려왔다.


▲ 대관령~선자령 구간 나무를 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워둔 통나무 담벼락.

바람이 그만큼 세다는 뜻이니 방풍의는 꼭 갖추어야 한다.


엊그제 폭설로 기막힌 설경


기다리던 폭설이 내린 직후인 1월15일 김영교, 김진상, 두 사람과 선자령으로 향했다. 평택 교포리 이장 정상진씨와 그의 선배 농업인이자 오랜 등산꾼인 최민희씨(평택 맥산악회 회장)가 또한 우정 일부러 와서 합류, 횡계리ㆍ교포리 합작 농민 산행팀이 꾸려졌다.


하늘은 파랗고 엊그제 내린 폭설로 만발한 설화는 그후 다행히도 심한 바람이 불지 않아 목화솜 얹은 듯한 꽃망울이 여전하다. 김영교씨는 “대관령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았어도 이렇게 설경이 좋은 날은 드물다”며, “좋은 사진 많이 기대한다”며 사진기자를 은근히 압박했다.


▲ 선자령 정상의 의야지 마을길 초입.

 

긴 겨울 가뭄에 설화를 목마르게 기다렸던 것인지, 주초의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선자령을 향해 오르고 있다. 폭설이 내린 이후 첫 일요일인 13일의 선자령은 설화는 좋았지만 하늘이 흐려서 경치는 오늘만 못했다고 한다. 길은 이미 많은 사람이 오르내린 탓에 넓고 단단하게 다져져 있다. 초행자라도 이런 조건에서 길 잃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북서풍이 심할 때의 선자령은 그렇지 않을 때와 전혀 다른 산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혹독한 조건으로 변한다. 정면 아니면 왼쪽 앞에서 불어오는 북새풍은 저 대관령목장 일대의 거칠 것 거의 없는 구릉지를 지나오며 마치 가속도를 붙인 듯,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독하게 몰아친다.


길 옆의 나무들이 한결같이, 어떤 것은 거의 45도 정도로 비스듬히 동쪽으로 누운 것은 동해 바닷물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북서풍에 겨우내 시달려서다. 여름 내내 불어오는 남동풍도 이 쓰러진 수목의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할 정도로 북새풍의 입김이 승한 것이다.


북새풍에 눈보라가 섞이고 기온마저 영하 10℃쯤 되면 아예 시베리아 벌판이 된다. 이런 날은 등산을 포기하는 게 좋겠지만 대관령을 떠나 중간쯤 가서야 이런 바람이 몰아치는 일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스키 탈 때 쓰는 방풍고글을 적어도 산행 리더만큼은 꼭 챙겨야 한다. 그래야 족적이 쓸려가거나 날려온 눈에 덮인 길을 제대로 짚어갈 수 있다.


1월13일 오늘은 이런 여러 준비가 부질없고 어리석게까지 느껴질 만큼 날씨가 좋다. 다만 기온은 제법 내려가서 아침엔 콧속이 쩍쩍 달라붙는 강추위가 느껴졌다. 구 대관령 상행선 휴게소 건물은 폐쇄된 상태지만, 그 주변에 차, 라면, 오뎅, 과자류 등속을 파는 컨테이너박스 간이식당들이 여러 동 붙어 서 있다.


이 휴게소 동쪽 옆 콘크리트 포장도를 따라 100m쯤 가면 왼쪽으로 꺾어진다. 여기서 선택은 두 갈래다. 우선 곧장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국사성황당으로 갔다가 능선으로 붙는 길이 있다. 우리 고유 민속의 현장인 성황당을 거쳐 가는 길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인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인 서낭신을 모시는 곳으로서 한번 가볼 만하건만 사람들은 모두들 지체없이 오른쪽의, 리본이 잔뜩 달린 등산로로 접어든다.


굵은 밧줄 난간으로 잘 정비된 등산로 옆의 전나무숲이 두텁게 눈을 얹고 한겨울의 전형적인, 그러나 언제 봐도 아름답고 눈부신 풍광을 연출했다. 길 오른쪽 옆 대간능선 비탈엔 통나무가 토막 난 담벼락처럼 늘어서 있다. 북서풍을 막고 수목을 키워내 보려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시도일 것 같은데, 놀랍게도 나무들이 해가 다르게 커가고 있다고 한다.


▲ 선자령을 향해 오르는 도중 길 밖의 설원을 걸어보고 있는 취재팀.


 “선자령은 역시 넓은 설원 보는 맛이여!”

 

등산로는 곧 널찍한 콘크리트 포장길을 만났다. 저 위에 있는 통신시설물 관리를 위한 길로, 이미 말끔히 제설작업이 돼 있다. 곧 북을 여러 개 매단 모양의 중계탑 옆을 지났다. 바로 옆엔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동쪽 아래의 대관령 옛길이 이어지는 지점이다.


선자(仙子)란 곧 신선, 혹은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를 말하니, 이곳 능선의 굴곡이 아름답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주었을 것이다. 이 선자령 일대 풍경은 요 몇 년 사이 크게 바뀌었다. 구릉지 여기저기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세워진 것이다. 하얀 몸체에 세 갈래 날개를 가진, 멀리서 보기엔 아이들 장난감 바람개비처럼 앙증맞아도 보이는 그 풍력발전기들까지 세워지며 선자령 풍경은 더더욱 이국적인 풍치를 띠게 되었다. 여름이면 초록 초원과 대비되며, 겨울이면 흰 설원에서 솟아난 듯 일체감을 보이며 풍경을 돕고 있다.

 

▲ 의야지 코스 중간의 설원에서 엉덩이썰매를 타고 있는 일행.


무선항공통제소 입구에서 콘크리트 포장길이 끝나기 30m 전, 왼쪽으로 소로가 시작된다.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으므로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웬 음악소리일까? 귀에 익은 팝송이 통제소 스피커에서 나와 온 설원에 깔리고 있다. “퍼햅스 러브라고,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가 듀엣으로 한 노래여”라고, 왕년의 디제이 장익진씨가 어딘가 으스대는 듯한 어투로 일러준다.


통제소 울짱을 따라 대간 능선 등날을 딛고 오른 다음 다소 경사가 가팔라지는 곳에서 갈림길이 나선다. 나중에 만나지만, 오른쪽 능선길을 택하는 게 좋다. 그래야 선자령에서 최고라 할 새봉 조망점에 오를 수 있다(국토지리정보원 발행 지형도에서 새봉은 이곳에서 북쪽 약 700m 지점의 1071m봉에 표기).


해발 1,050m의 이곳 새봉 정상은 목재로 넓게 조망대까지 만들어 두어 여러 등산객들이 쉬며 주변 경치를 볼 수 있게 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간식과 뜨거운 차를 들며 찬 바람과 햇볕을 함께 즐기는 멋이 제법 괜찮다. 날이 맑아서 망원경만 있으면 경포해변의 허연 파도머리까지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관령 일대는 개마고원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 지형이다. 수천만 년 전 지표면이 침식작용을 받아 평탄해졌다가 한 세월이 지난 뒤 어느 때인가 지각변동에 의해 급속히 융기했다는 기묘한 탄생 이력을 가진 구릉지가 북서쪽 저 멀리 황병산정까지 끊임없이 뭉글뭉글 펼쳐지고 있다. 예년 같으면 여기서 능선을 따라 형성된, 동쪽으로 파도머리처럼 끝이 휘감긴 긴 설릉 풍광이 장관일 터인데, 아쉽다.

 

▲ 선자령 정상. 높은 표지석이 서 있다.

 

전망대 이후 내리막에서 잠시 엉덩이 썰매를 타며 내려가는 도중 아까 갈라졌던 갈림길을 만나고, 1071m봉(지형도 상 새봉)을 언제인지 모르게 지난 뒤 넓디넓은, 풀 한 포기 없이 말끔하게 눈으로 뒤덮인 설사면이 펼쳐진다.


선자령 산행은 이런 설원 보는 맛에 하는 것이다. 몇몇 남녀 등산객들이 참지 못하고 길을 벗어나 설원 가운데로 뜀박질하듯 가로질러 나아가서는 벌렁 눕거나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기념사진을 찍는다. 북새풍의 찬 기운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투다. 붉거나 푸른 재킷을 입은 등산객들 모습이 어울리며 풍경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풍력발전기 바로 옆을 지나는데 쉬익 쉬익 하고 돌아가는 소리가 좀 위협적이다. 길옆엔 ‘간혹 날개에 얼어붙었던 빙설이 떨어져 위험하니 밑으로 가지 말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 선자령 길 아래 눈이 하얗게 내려앉은 전나무숲.

 

산악스키 즐기기에 안성마춤인 길


초막골 가는 갈림길목을 지나 100m쯤 더 오르자 선자령 정상. 놀라울 만큼 큰, 높이가 7m나 된다는 백두대간 선자령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표지석 서쪽 옆 공터 모서리에 세워진 자그마하고 노란 ‘바람마을 의야지 5.3km’ 표지판에서 선자령 새 길은 시작된다. 김영교씨는 여러 번 선자령에 사람들이 올라설 때마다 “저 의야지 코스 정말 멋집니다”라며 한 번 가볼 것을 권유했지만 아무도 이 길로 내려서는 사람은 없다. 대개 버스로 온 단체 산행객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자령에서 사방으로 뵈는 풍력발전기가 어림잡아 30기가 넘는 것 같다. 그저 조경용 삼아 세운 것처럼 뵈는데 한 기당 36억 원이나 된다고 하며, 한 기에서 발전하는 전기로 2,000가구 정도가 쓸 수 있다고 한다.


대형 우주선이 착륙했던 자리 같은, 서쪽 저편의 완벽하게 둥근 모양의 공터는 과거 전파감시국이 있던 자리로, 지금은 배추밭으로 쓰이고 있다. 그 공터쪽 계곡을 향해 우리는 잡목 사잇길로 내려섰다.

 

제법 매서워서 고개를 모로 꼬게 하던 북새풍의 기세가 금방 사그러들었고, 제설작업이 된 도로의 삼거리로 내려서자 푸근하기까지 하다. 풍력발전기 관리를 위해 한일목장 입구로 하여 이곳 선자령 턱밑까지 개설한 도로는 눈이 내리기 무섭게 제설작업을 해둔다고 한다. 그럼 이제부터는 멋없게스리 찻길을 따르는 것이냐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하면서 김영교씨는 둔덕 위 한 지점에서 남쪽 설원을 가로지르며 나아간다. ‘맨 아래쪽, 안부에 서 있는 풍력 발전기 방향’이라고 알아두면 길 찾아가기가 쉬울 것이다(좌표 N 37°42′13.4″ E 128°44′38.9″).


김영교씨가 미리 준비해온 비료 비닐포대를 깔고 앉아 안부까지 폭 떨어지듯 하는 엉덩이썰매 타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의야지 3.7km’ 노란 팻말이 선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마침 의야지 마을의 또다른 등산꾼인 김윤회씨가 마중을 나와 주었다.


길은 오른쪽으로 오랜 산판길을 따라 주욱 가로질러 나아간다. 그 후 깊은 고요가 감도는, 폭 3m 정도로 넓고 환하게 트인 옛 산판길 등산로를 따라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군인들이 훈련하며 지난 흔적인 듯한 발자국들이 한 가닥 직각으로 가로질렀을 뿐, 의야지 주민들이 낸 길은 외길이었다.


“실은 여기가 새봉이래요. 우리 마을서는 이 봉우리를 새가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해서 새봉이라고 불러요.”

1085m쯤 되는 밋밋한 봉 바로 옆을 지나며 의야지 산꾼들은 그렇게 말했다. 지형도 상 새봉, 등산로 안내판이 일러주는 새봉, 주민들이 말하는 새봉 모두가 제각각이다.


침묵 속에 조용한 산속을 오랫동안 걷자 머릿속도 흰 눈밭처럼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다. 상석을 갖춘 밀양박씨 집안의 쌍무덤과 울창한 낙엽송이며 잣나무숲도 지나면서 오로지 능선만 따라 걷자 이윽고 ‘선자령 등산로 입구’팻말이 세워진 능선 꼬리다. 얼어붙은 개울 건너 의야지 마을 스노파크에선 제설기가 사륜바이크 트랙에 뿌리는 눈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조선일보 / 글 안중국 차장 / 사진 허재성 기자

 

 

산행길잡이
하산 중 능선과 산판길 잃지 말아야


대관령에서 선자령 정상까지는 거의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의야지 하산길도 족적이 잘 나 있거나 눈이 별로 깊지 않다면 또한 별 어려움이 없는 길이다. 다만 아무도 간 흔적이 없는, 폭설이 내린 직후엔 독도능력이나 체력에 자신이 없는 한 가지 않는 것이 좋다. 만약 하산 중 족적이 사라지면 반드시 되돌아와 제 길을 찾도록 한다. 눈 깊은 산록으로 잘못 내려섰다간 큰 고생을 한다.


대관령~선자령 구간은 양쪽으로 조망이 매우 좋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의야지 능선길은 조용하고 깨끗한 숲속 눈길을 걷는 맛이 주된 매력이다. 바람이 대관령~선자령에 비해 한결 덜하다는 것도 특징이다. 


목장 철문(N 37°41′33.1″ E 128°43′51.8″)을 만나 오른쪽으로 우회할 때 잠시 수목 사이로 지나야 했을 뿐, 거의 전구간이 널찍한 옛 산판길로 이어져서 산악스키로 하산한다 해도 아무 문제 없어보였다. 폭설이 내린 뒤 한 번쯤 가면 멋질 것이다.


의야지 주민들은 애초엔 비료포대를 엉덩이 썰매용으로 빌려주려 했으나 보나마나 태반은 여기저기 버릴 것이란 의견이 압도적이어서 그 계획은 접었다고 한다. 완경사 눈벌판을 이룬 구간이 많으니 두꺼운 비닐 한 조각쯤 가져가면 하산이 한결 재미날 것이다.


대관령에서 선자령까지는 약 5.5km, 선자령에서 의야지 마을까지는 약 7km로 총 12.5km쯤 된다. 길이 잘 나 있거나 눈이 깊지 않다면 5시간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