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정보,상식

전통 문화의 보물창고 - 규장각

풍월 사선암 2007. 8. 13. 11:34

선조들과 역사 속 대화 '타임캡슐'


정조 왕권강화 · 인재양성 · 정치개혁 겨냥 설치 조선시대 정치 · 사회 · 문화사 방대한 자료 보관 '법고창신' 시대정신 230년 지난 현재에도 유효 

 

 서울대 도서관 소속이었다가 1992년 분리돼 독립 건물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서울대 규장각 전경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함대의 일원이었던 쥬베르는 조선 사람들의 책 읽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또 한 가지는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큼 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 민족. 조선시대 뛰어난 민족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기록물의 편찬과 보관이라고 필자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의궤와 같은 국가적 사업으로 편찬된 기록물부터 개인의 일기나 문집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에는 글을 좀 읽는다는 사람 치고 자신의 기록물을 남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규장각은 선인들이 남긴 뛰어난 기록물과 문화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보물 창고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남겨준 기록 유산들. 이 속에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추구한 삶의 가치와 함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뜻은?

우리 역사에서 정조 시대(1776~1800:생몰년 1752~1800)는 '왕조 중흥과 문화 중흥의 꽃이 활짝 핀 전성기이자 조선의 르네상스'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흥의 꽃을 피우는 데는 적지 않는 어려움이 따랐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 세력들의 견제 속에 어렵게 왕위에 올랐다. 왕권을 강화하고,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인재의 양성. 이것은 정조가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정조는 왕권 강화와 함께 학문을 장려하고, 학문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를 구상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표출된 공간이었다. 규장각은 세조 때에 이미 양성지에 의해 그 설치가 제창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숙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이라 쓴 숙종의 친필 현판을 걸고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왕이 직접 지은 글)나 어필(御筆:왕이 쓴 글씨)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삼았다. 규장각은 정조의 즉위 이후 정치, 문화의 중심기구로 우뚝 섰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경희궁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즉위 후 처소를 본궁인 창덕궁으로 옮겼다. 그리고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의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을 '규장각'이라 이름 했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젊고 참신한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속속 규장각에 모았다. 정약용을 비롯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함께 규장각에 나와 연구하면서 정조 개혁정치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제 조선후기의 문화중흥을 이끌어 가는 두뇌집단의 산실이 된 것이다. 규장각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역대 왕들의 글이나 책 등을 정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개혁정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전통을 본받아 새 것을 창출한다)'은 규장각을 설립한 취지에 가장 부합되는 정신이었다.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하여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이곳에 발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관직이 높은 신하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함으로써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했다. '객래불기(客來不起: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와 같은 현판을 직접 내려서 규장각 신하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때로는 정조 자신이 몸소 그들과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며 학문에 대해 토론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해 학문의 전당과 유교정치 이념을 전파하는 중심기관으로 만든 것처럼 정조 역시 규장각을 통해 학문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개혁 정치를 수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규장각에서는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학문적 열정이 담긴 수많은 책들이 간행됐다.


규장각은 규장각 신하들인 각신(閣臣)들이 모여 연구를 하는 규장각 이외에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다. 우선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文院)을 두었고, 역대 왕들의 초상화,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을 비롯해 국내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西庫)와 포쇄(曝�: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위한 공간인 서향각(西香閣),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그리고 휴식 공간으로 부용정이 있었다.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고금도서집성'(5022책) 등을 보관했는데, 이러한 책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문물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정조는 젊은 관리들이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는 제도인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이미 과거를 거친 사람 가운데 37살 이하의 젊은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시키는 제도로서, 이들은 매월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치르는 등 강도 높은 교육을 받으며 정조의 개혁 정치의 방향을 학습했다. 초계문신제도는 1781년 시작,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이뤄졌으며 총 138명이 뽑혔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이다.


 
 

1777년 정조가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는 현판을 달아 1층을 규장각이라 했다.

▲규장각의 영광과 수난

규장각은 조선시대 왕실자료의 보관 및 서적 수집, 출판 등 도서관의 기능과 더불어 문화정책 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나아가서는 정조의 개혁정치를 후원하는 중심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1782년에는 강화도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외규장각'이라 하고, 역대 선왕의 어제, 선원보(璿源譜:왕실의 족보), 의궤(儀軌:조선시대 왕실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 등을 관리했다. 그러나 외규장각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잿더미가 됐으며, 당시 프랑스군대가 약탈해간 의궤 297책이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규장각은 1910년 일제의 강점과 함께 폐지됐다. 그리고 규장각 도서는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조선총독부는 규장각 도서를 경성제국대학에서 관리하게 했는데, 1945년 해방이 되자 규장각 도서는 경성제국대학을 승계한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됐다(1946년). 규장각 도서는 서울대학교에서도 오랫동안 도서관 소속으로 존재하다가, 1992년에 현재의 독립 건물을 짓고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존재하게 됐다.


현재의 서울대학교 규장각은 국보 및 보물을 포함한 26만여 점의 고도서, 고문서, 고지도, 정부기록류, 책판 등을 소장하고 있는 한국학 자료의 중심지이자 전적류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규장각은 자료를 보존, 관리함은 물론이고 한국학 자료를 체계적으로 조사, 연구하는 한편 자료의 D/B화, 전시 및 교육과 홍보 등의 업무를 아울러 수행하고 있다. 연구소이자, 도서관, 박물관으로서의 종합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법고창신'이 필요한 시대

규장각에는 전통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서적들과 고지도, 책판, 고문서가 보관돼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와 같은 방대한 연대기 자료를 비롯해 조선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 조선시대 지도의 종합판인 '대동여지도' 등 제목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책들이 다수 소장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동정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 기록이 중심이지만 사회, 경제, 문화사적인 내용 뿐만 아니라, 조선에 들어온 코끼리 이야기, 도적 홍길동은 연산군대의 실존 도둑이었다는 것, 드라마 '대장금'이 실존인물 '장금'을 모델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 등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의궤에 기록된 왕실 결혼식, 장례식 등의 현장 모습을 담은 그림은 그 시대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접할 수 있게 한다. 전체 22첩을 모두 모으면 세로 6.7m, 가로 3.3m의 방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대동여지도를 통해서는 김정호를 왜 최고의 지도학자라 부르는지에 대해 쉽게 수긍을 하게 된다. 냉면집이 그려진 '평양지도', 거북선이 그려진 '해남지도' 등 조선후기의 지방지도에는 특색 있는 각 지방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얼굴이 까만 사람은 까맣게, 천연두를 앓아 곰보가 생긴 사람은 곰보 자국까지 정밀히 그린 선현들의 초상화 첩을 통해서는 시대를 이끌어간 인물들의 실제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규장각은 한 인물의 사상과 행적을 볼 수 있는 개인 문집들, 각종 기행문과 백과사전류 저술, 또 앞으로 연구돼야 할 희귀본 자료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우리의 시대에 선조들이 남겨 준 기록유산들이 이처럼 많이 남아있는 것은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큰 행운이다. 필자는 규장각을 대표할 만한 자료들을 소개하면서, 그 가치와 현대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정조가 규장각을 처음 설립할 때 가졌던 법고창신의 정신은 23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활의 양식 > 정보,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쌀뜨물의 또 다른 비밀  (0) 2007.09.16
생활의 지혜  (0) 2007.08.16
화분의 식물이 이상할때  (0) 2007.08.01
몬시뇰이란?  (0) 2007.07.19
고대 7대 불가사의  (0) 2007.07.18